[오마주 프로젝트] 여행에세이 -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요

in #kr6 years ago (edited)

다섯번째 오마주입니다.
아름다운 글을 재편집하는 이 시간이 참 좋네요.
오늘은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나간다'는 멋진 슬로건을 갖고있는,
@Roundyround 님의 여행에세이를 추천드립니다.
가만히 있어도 좋은, 그런 여행이 고파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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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만히 있었는데요
Written by @roundyround




인도에 있는 동안 어디에 계셨죠?


출국심사대 앞에 선 내게 뜻밖의 질문이 돌아왔다. 6개월 관광비자의 만료일이었다. 더운 여름날을 나기 위한 얇은 반팔 티셔츠 쪼가리 몇 장만을 쑤셔 넣고 인도로 떠나왔던 것이 6월 중순이었는데. 시간 참.

'잘 있다 가는 사람에게 왜 이러세요'하고 속으로 구시렁거렸지만 이내 약간의 미소를 억지로 머금고는 다람살라에 있었노라고 대답했다. 심사관은 가장자리가 낡아 나달거리는 내 여권을 첫 페이지부터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인도에서 다른 곳은 가지 않았나요?



비자 만료일에 딱 맞추어 출국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여권에 다다다 붙어있는 인도 비자 딱지들이 의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가 문제냐고 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별 말없이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한 번째. 손가락 셈을 세어 다시 확인했다. 열한 번째 인도와 헤어지는 시간.


주로 다람살라에서 지냈고, 마날리랑 델리에 잠깐 갔었어요.


그렇군요. 뭐 하셨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요.


이번에는 정말이지 신경질이 나서 '그건 당신이 알 바가 아니고!'하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내뱉은 나의 짜증 섞인 대답에 그는 피식 웃더니



유 아 쏘 퍼니.



라고 했다. '퍼니'라... '웃기는 양반이네' 뭐 이런 건가? 여권에 꽝꽝 도장을 찍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출국심사대에서 '유 아 쏘 퍼니'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그래요. 인도를 여행하는 사람 중엔 정말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답니다. 인도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열 번도 넘게 인도를 찾는 동안 라자스탄도 안 가봤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고백하다 보면, 내가 그 별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열한 번째 인도를 찾았던 2016년의 여름, 가을을 통째로 다람살라에서 지냈다. 6개월. 지루한 몬순을 버티고 나니 매일 아침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면 '굿데이!'라는 외침이 절로 터져 나오는 청명한 계절이 찾아들었다. 마른빨래를 걷을 때면 그 바삭한 냄새가 좋아 옷가지에 코를 박고 한참이나 킁킁거리기 일쑤였다. 그 계절은 참으로 눈이 부셨다. 아침, 저녁 쌀쌀해진 날씨에 이불속에 웅크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겨울의 문턱에서야 슬슬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인도 전역을 대혼돈 속에 빠뜨린 모디의 화폐 개혁으로 맥그로드 간즈 그 작은 산동네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현금이 없어서 몇 날 며칠을 굶었다는 사람들은 외국인 여행자, 현지인 할 것 없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덕분에 은행과 씨름만 하다가 마지막 한 달을 보내고 왔지만 '인크레더블 인디아'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므로 나쁘기만 한 경험은 아니었다고 이제는 생각한다.

mcleod ganj, india, 2016



들고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제법 오랜 세월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을지라도 내 고향이 맥그로드 간즈요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달라이라마가 사는 곳, 티베트 망명정부의 거점, 티베트 난민들의 보금자리. 올해 만난 사람을 내년에도 볼 수 있을지, 아니 봄에 있던 사람이 그해 여름에도 여전히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곳.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겠지'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그런 동네. 떠돌이 유전인자가 몸속에 흐르고 있는 사람들은 그 공간의 위태로운 정체성 자체에 본능적으로 끌려 모여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티베트 사람들이 꿈을 갖고 이곳으로 흘러들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새로운 꿈을 찾기도 했지만, 갖고 있던 꿈마저 버리고 마는 이들도 있었다. 말 끝마다 '나는 난민이라', 혹은 '우리 난민들은' 하던 티베트 친구들과의 대화에는 정말이지 진력이 나서 속으로 난민 신분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느냐며 답답한 가슴을 두드릴 때도 많았다. 여권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농담 아닌 농담들. 내가 입을 닫아버리게 만들던 회한의 말들. 넌 자유가 있잖아. 집이 있잖아. 여권이 있잖아. 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잖아. 8년 전 내 마음을 들끓게 만들었던 그 말들 때문에 때로는 숨이 막혀오기도 했다. 그들의 삶은 지리멸렬했다. 나는 그들 삶을 재단할 자격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끝내 모른 척했다. 제 발로 떠나왔지만 이제는 이곳을 감옥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텅 빈 언어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해하는 척 흉내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 삶의 수많은 결을 하나하나 살피며 쓰다듬을 여력이 내게는 없었고. 하지만 그들의 삶이, 그들이 원하는 곳에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지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변함없었다. 나는 경계에 섰다.


경계에 머문다는 것은 동네를 거닐다 낯익은 얼굴들을 만나면 여어- 하고 고갯짓으로 인사를 나누며 지나치는 것이었다. 혹은 그 자리에 서서 싱싱한 파를 살 수 있는 채소 가게에 대한 정보를 나눈다는 것이었다. 자주 가는 카페 주인의 딸내미와 놀아주느라 진이 빠진다는 것이었다. 친구가 된 이들의 소소한 소식들을 전해 들으며 동네 사람으로 지내는 일상을 하루하루 쌓아간다는 뜻이었다. 경계에 머문다는 것은, 동시에, 가끔씩 그들 앞에서 여권을 꺼내어 보여주기가 민망해진다는 것이었다. 양고기를 먹지 못하는 내가 칼자루를 손에 쥐고 눈 앞에 놓인 양고기 수육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이나 고민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는 얼굴들 마주치지 않고 '오롯이 혼자' 머무를 공간을 찾기 위해 좁아터진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아야 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mcleod ganj, india, 2016












생활의 영역으로 다가가다가도 어느 지점이 되면 부딪히게 되는 보이지 않는 경계의 벽 언저리. 그 자리가 내가 선택한 자리였다. 그런 나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시간뿐이었고 외로움은 덤이었다. 시간과 나는 그 외로운 자리에 덩그러니 놓였다. 출국심사대에서 고백했듯 나는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뭘 하며 지내느냐'는 질문을 실제로 많이 받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냥 가만히 있는다'라고 대답했다. 시간이 흐르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도 적절할 것이다.


2007년 라다크에서 만나고 9년 만에 우연히 다람살라에서 다시 만난 제이미는 명상에 심취해있었는데 내가 하루를 보내는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느니 명상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진지하게 내게 권했다. 명상을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이 복잡한(혹은 공허한) 마음을 붙들고 가만히 있는 이들을 내심 '가엾이'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충고와 권유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가만히 있는 와중에도 내 마음은 번뇌로 가득 차 있었지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로. 그 길은 밝고 곧았다.

mcleod ganj, india, 2016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되었다. 그렇게 있어도 좋았다.




  • 오마주 프로젝트는 한 달이 지난 자신의 글, 타인의 글로 누구나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오마주 프로젝트 로 재발굴한 글입니다.
  • 오마주 프로젝트는 @armdown 님과 @stylegold 님 아이디어로 시작되었습니다.
  • 이 글의 저작권은 @roundroundy 님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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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란 게 참, 뭐랄까. 음식하고는 조금 달라서, 갓 나온 직후의 맛과 얼마만큼 지난 후, 그리고 한참이 되고 나서의 맛이 저마다 다르게 다가온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두와 함께 이런 맛을 느끼고자 하는 행보에 화사함이 깃들기를 염원합니다.

와 멋진 댓글에 잠시 생각을 멈추게 되네요.

멋진 댓글이라니...민망스럽네요.실은 좋아죽는 중이면서눈팅을 주로 하지만, 매번 보면 유쾌하고 유익한 포스팅을 많이 봐서요.ㅎ 우중충한 날인데 좋은 하루 되시길 바라봅니다.

이런 것도 있었군요! 멋진 프로젝트에 훌륭한 글입니다. 아름다운 문장에 감탄이 절로 나오네요.. 아무튼 같은 사람 사는 세상인데, 경계가 있고 그 안에서 구분짓기가 있다는게 좀 안타깝네요.

단편소설 하나 읽고가는 느낌이에요..
까치발을 들고서 여권검사를 지켜봤다는 등등의
대목에서 눈감고도 그 장면이 머릿속에 그려질 만큼
세세했어요. 그리고 중간중간에 끼어있는 사진이
완벽하리 만큼 절묘했구요..감탄하고 갑니다..
외국에서 생활하는 터라 한국소설책을 읽을
기회가 많이없는데.. 저는 오늘 부터 걱정 끝이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외국에서 생활하시는군요?ㅎ 스팀잇에 좋은 글을 써주시는 분들 많으니까 매일매일 읽을거리가 넘쳐나요ㅎㅎ
들려주셔서 감사하고, 즐겁게 봐주셔서 더감사해요 :-)

그냥 가만히 있었다라.. 참 좋네요.
사진도 편집도 멋진 글, 잘 읽고 갑니다.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요.

ㅋㅋㅋㅋ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네요!
11번이나 인도를 찾다니... 인도만의 매력에 푹 빠지신듯...

글과 사진에 푹 빠져서 봤네요 ~ 좋은 글 감사합니다!!

경아님의 이 포스팅이 제게 진짜 의미있는 이유가 뭐냐면요! 제가 다람살라에서 지내다 바로 오늘 떠나거든요! 게다가 이번에도 비자 만료일 딱 맞춰서 한국 가는 비행기 탈 예정이거든요! 짐 싸면서 경아님 손길 닿은 이 글 몇 번이고 다시 읽는데 ‘아, 시간...’ 하면서 기분이 이상했어요. 무사 귀국을 위한 선물처럼 느껴져요. 고마워요, 경아님! :-)

어멋 내일 올리려다가 왠지 오늘 올리고 싶어져서 올렸는데!!
신이 저에게 빨리 올리라고 메세지를 보냈나봐요ㅋㅋㅋ
저도 고마워요!!ㅎ 무사히 돌아오세요!! 반겨줄 사람들이 많아요 :-)

아 역시 믿고보는 라운드님의 글과 경아님의 솜씨가 합쳐지니... 감동이 배가 되네요. 경계에 섰다. 에서 울림이 장난 아니네요..

저도 한 번 정독하고, 편집하면서 또 봤는데, "어떻게 이런말을..!!" 싶었던 문장들이 많았어요ㅎㅎ

한번쯤 가보고 싶은 느낌이 절로 드네요.. 은은한 멋진 프로젝트입니다~

오마주 프로젝트...멋지네요!
이런 아이디어들이 많아져야 할텐데요 크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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