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s daily] 그것은, 선천성 그리움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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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누구나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을 간직하고 있다. 그 그리움의 실체를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시리고 아련해지는 순간이 있다. 어릴 적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면, 난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했다. 실제로 할머니가 보고 싶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그저, ‘손에 잡힐 것 같지만 가까이 있진 않은’ 그런 존재에 대한 그리움을 누구로 특정할 수 없어, ‘할머니’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내 마음이 수취인불명의 그리움으로 가득할 때면, 함민복 시인의 시가 생각난다.


선천성 그리움

 함민복


사람 그리워 당신을 품에 안았더니

당신의 심장은 나의 오른쪽 가슴에서 뛰고

끝내 심장을 포갤 수 없는

우리 선천성 그리움이여

하늘과 땅 사이를

날아오르는 새떼여

내리치는 번개여




 선천성 그리움은 누군가가 곁에 있다고 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말은 어떤 사람이 우리 마음의 빈 공간을 백퍼센트 채워줄 거라고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건 어쩌면 우리에게 다행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이 한 사람으로 인해 어떤 공백도 없이 다 채워질 수 있다면, 그건 일종의 도박일 수 있다. 반대로 한 사람으로 인해 우리 마음이 탈탈 털려 0%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니까. 그런 관점에서 선천성 그리움은, 우리 마음의 보호 장치이다.

 믿었던 누군가와 마음이 맞부딪히고, 실망과 상실의 망치가 마음을 두들길 때, 우리 마음의 선천성 그리움은, 공기층으로 작용한다. 어떤 사람으로도 채울 수 없는 그 부분이 마음의 통증을 완화하고 충격을 흡수해주는 것이다.

 오늘 밤에도 왠지, 할머니가 보고 싶다.

2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다. 군대 있을 때 말귀가 어두운 후임병이 하나 있었단다. 그 후임병은 고참의 지시를 제대로 듣지 못해서, “잘 못 들었는데 말입니다.”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야단을 맞거나, 얼차려를 받기 일쑤였다. 내 지인은 후임병의 처지가 딱해서 다른 고참보다 잘해주었단다.

 어느 날, 그 후임병이 무척 심각하고 어두운 표정으로 그의 곁에 오더니, 자기는 진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걸 못 알아듣겠다고 하소연하더란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사람들 이야기를 잘 알아들을 수 있을지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더란다.

 내 지인은 그 후임병이 안타까워서, 이런저런 노하우를 알려주었단다. 먼저 다른 사람이 말할 때는 그 입모양을 유심히 보고, 다른 사람이 말하는 동안에는 딴 생각 말고 집중해야 한다, 등등 초등학생에게 할 법한 조언을 한참동안이나 해주었다. 말이 끝나자, 그 후임병은 자못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 잘 못 들었는데 말입니다!”

 가끔 교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똑같은 얘기를 수십 번 해도 똑같은 행동을 하는 아이가 있다. 그럴 때면 그 군대 이야기가 생각난다.

3
 국어시간에 상대를 배려하며 말하는 방법에 대한 수업을 했다. 상대방이 실수했을 때, 뭔가를 잘 했을 때, 감정이 상했을 때 등 상황에 따라 어떻게 말해주면 좋을지를 공부한다. 예를 들어, 친구가 미술 준비물을 깜빡하고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 이런 나쁜 예와 옳은 예가 나온다.

“아, 어제 밤에 분명히 챙긴 것 같은데, 준비물이 없네. 어떡하지?”
“야, 진짜 챙긴 거 맞아? 정신을 어디 두고 다니냐?”

“아, 어제 밤에 분명히 챙긴 것 같은데, 준비물이 없네. 어떡하지?”
“그래? 어제 밤에 챙긴 것 같은데 없어서 당황스럽겠네. 오늘은 내 거 같이 쓰자.”

 교과서에선 나쁜 예와 옳은 예의 구분이 확실하다. 후자처럼 상대방이 들었을 때 기분이 상하지 않게 말하는 것이 정답이다. 하지만 살다보면 후자가 늘 정답이기만 한 건 아니다. 준비물을 상습적으로 챙겨오지 않는 친구에겐 전자처럼 따끔한 질책이 필요할 때도 있다.

 어쨌든, 아이들은 옳은 예를 열심히 학습했다. 비슷한 다른 상황을 주고 친구를 배려하며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어떤 아이가 자신 있게 손을 든다. 반짝이는 눈빛이 무색하게 엉뚱한 대답을 한다. 순간 엉뚱한 대답을 한 아이에게 비난과 비웃음이 쏟아진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손을 든다. ‘배려하는 말하기’를 발표해보겠다며. 하-

 그래 얘들아, 삶으로부터 배운 것이라야 삶을 바꾼단다. 책으로 배운 건 아는 티를 내거나, 시험 칠 때나 유용하지.

4
 이제 돌이 막 지난 둘째 딸은 신발을 좋아한다. 자기 분홍 구두를 들고 흔들면서 아기 새처럼 짹짹거리며 신겨달라고 한다. 신발을 건네받으면 발 한 쪽을 들어 보인다. 자신의 의도를 확실히 전달한다.

 자기 신발뿐만 아니라, 다른 신발을 구경하거나 만지는 것도 좋아한다. 울거나 찡찡거릴 때 신발장 앞으로 안고 가면 울음을 뚝 그치고는 신발장 문을 연다. 그리고 엄마, 아빠의 다양한 신발들을 마음껏 구경한다.

 가끔, 아이의 신발 사랑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다. 거기에 어떤 뜻이 담겨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아이야, 벌써부터 신발을 신고 혼자 걸어 나가고 싶은 건 아니지? 엄마, 아빠의 품을 떠나 독립하고 싶은 건 아니지?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서운해진다. 이런 얘길 아내에게 한다면 이런 얘길 들을지도 모르겠다.

“노트북 사랑이 각별한 당신, 그 노트북 들고 혼자 살고 싶은 건 아니지?”

5
 미국에 또 학교 총격 사건이 벌어졌다. 미국에선 한 해 동안 학교에서 총격사건으로 죽는 사람의 숫자가 군인이 전사하는 숫자의 두 배라고 한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총기 규제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굳건하다. 미국의 많은 권력자들은, 총기를 규제했을 때 소시민들이 자신을 보호하지 못할 거라고 진짜로 믿는 걸까. 자기 권력 기반을 지키기 위한 주장이란 걸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데 말이다.

 총기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 간, 국가 간의 많은 문제에서 서로 총을 들지 않는 것보다, 서로 총을 겨누는 것이 자기를 보호하는 더 좋은 길이라고 믿는 믿음은 넓게 퍼져있다. 남한도 핵을 보유하자는 주장도 그런 믿음의 부산물이다.

6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일전에 교사끼리 가진 모임에서 어떤 관리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다. 교감이 돼서 선생님들을 아주 괴롭게 하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평교사일 때는 괜찮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주변의 평도 나쁘지 않았다. 교감이 되더니, 평교사일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누군가가, 역시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군요, 라고 했더니 함께 얘기하던 다른 형님이 그 말을 정정해주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자리가 그 사람을 보여주는 거지.”

 어떤 자리에 간다고 원래 그 사람에게 없던 것이 나오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때 그 자리에선 드러낼 필요가 없던 어떤 면이, 특정한 위치에 가면 비로소 드러나기도 한다. 좋은 점도 마찬가지다. 두각을 드러내지 못하던 어떤 사람이, 위치를 바꾸자 날개 단 듯 훨훨 날아가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 사람에게 없던 것이 새로 생긴 게 아니라, 묻혀 있던 잠재력이 발현된 것이다.

 내 남은 삶에서 대단한 자리를 얻는다는 생각은 안하고 있지만, 혹시라도 위치를 옮길 땐, 반드시 거울을 봐야지. 그때까지 안보이던 내 안에 나쁜 것들이 드러날지도 모르니.

7
 연휴를 맞아, 대구에 가족 여행 중이다. 아내가 옷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해서 대형 아울렛에 왔는데, 오는 길에 아이 둘이 차에서 잠이 들었다. 내가 차에 남아 아이들을 재우기로 하고 아내는 홀로 쇼핑을 하러 들어갔다. 덕분에 쓰던 글을 마무리하고 7번까지 덤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첫째가 좀 전에 잠시 깨서 발이 저리다며 울었지만, 안아주니 이내 다시 잠들었다. 첫째 딸을 품에 안고, 노트북을 딸의 엉덩이와 내 다리 사이에 꽂아 놓고 자판을 두드리고 있다. 극한 환경이다. 하지만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 뿌듯하다. 아이들의 평화가 쌕쌕대며 숨을 토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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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라고 사람들이 다양한 곳으로 연휴를 즐기러 가네요.
대구에는 연고가 있으신가요?
대구로 가족여행 가셨다니, 대구에 볼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게 되네요.
아직 아이들이 어리니, 우방랜드같은 놀이공원을 가시진 않았을테고..
혹시 거기서 알라딘, 교보문고, 대형마트를 구경하시나요?^^

네 대구에 연고가 있는 건 아닌데요, 아이들 데리고 가려가보니 이동거리를 생각해야 해서 여기로 오게 됐어요ㅎ 재작년에 첫째 데리고 와봤는데 김광석거리, 근대화문화거리, 허브힐즈 등 은근히 볼데가 많더라구요. 아이들 데리고 다니기 무난하구요.
우방랜드도 계획했는데 계획 급변경해서 거긴 안갔네요ㅎ 알라딘 중고서점도 갔죠. 여행가는 도시가 어디든 알라딘 중고서점은 저의 위시리스트예요^^

소울메이트님 아이가 있으셨군요 ^^ 따님을 안고 극한환경에서 타자를 치는 모습이 상상되서 웃음이 나오네요 ㅋㅋ

네 딸만 둘입니다ㅋㅋ 아이가 생기면서부터 극한 환경 속에서 글 쓰는 법을 터득하고 있습니다^^

가족들과 복작이는 와중에 평화를 찾는 모습이 너무 부럽네요 .

네 언젠가부터 복작이지 않는 시간은 새벽뿐입니다ㅋㅋ

그래 얘들아, 삶으로부터 배운 것이라야 삶을 바꾼단다.

하- 하고 감탄과 한숨 사이의 어떤 것이 터져 나오네요. 자리가 그 사람을 보여준다는 이야기도, 아이들의 평화가 숨을 토해낸다는 표현도! 아무래도 쏠메님을 향한 감탄, 제 자신에 대한 한숨이 아닐런지 ㅎㅎㅎㅎ

스프링필드님의 칭찬에 제 마음이 봄으로 피어납니다ㅎㅎ 자신에 대한 한숨은 일기 장인의 겸손으로 받아들일게요^^ㅋ

선천적 그리움이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참 위로가 되네요.
오늘밤에도 왠지 저도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흐흐.

위로가 된다니 다행입니다^^ 채은님도 할머니군요ㅎㅎ

다 작성하시고 마지막 글쓰기를 눌렀을때의 쾌감이랄까? 열악한 환경에서도 짬을 내어 마무리를 하신 모습이 상상됐습니다^^ 프로의 글쓰기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군요~ ㅎㅎ 추가로 제 딸아이도 분홍색 구두 사랑 때문에 운동화를 신겨야 하는 날이면 아주 곤욕입니다. ㅠ

네 때와 장소를 가리면 글 한 줄 쓰기 힘든 현실이죠ㅋㅋ 선택의 문제라기보다 생존의 문제라고나 할까요.
분홍색 구두는 여자 아이들의 잇아이템이군요ㅎㅎ 넘나 비슷해서 웃깁니다^^

짱짱맨 호출에 출동했습니다!!

짱짱맨 감사합니다ㅎ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학교 선생님이 총으로 무장을 하면 이런 비극을 막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높으신 분들이 있어요. ㅠ.ㅠ
도대체 얼마나, 누구한테까지 총을 팔아먹을 작정인지..

네 정말 그런 궤변을 늘어놓는 사람이 있더라구요. 선생님들이 군사 훈련도 받게 생겼네요ㅋㅋㅠ 돈이라는게 이렇게 무서운 거네요. 총보다 더요

사람은 원래 그리움을 타게끔 태어난 것 같아요. ^^

네 예외없이 누구나가 그렇죠ㅎㅎ

2번과 3번에 유난히도 크게 공감을 했어요. 정말 저희 반에도 그런 아이가 있거든요. 그보다 남의 말을 끝까지 안 듣는 게 더 문제이긴 하지만요... 3번처럼 배운것과 삶이 유리되는 것도 참 걱정입니다. 결국 우리는 제대로 된 인간을 키워내기 위한 교육을 하는 건데 말이죠.

네 어느 반에도 그런 애들이 있죠ㅋㅋ 참을 인자 세 개를 늘 마음에 품고 지내야하죠ㅎ 교사로서 그런 아이들을 대할 때도 책에서 배운데로 안 되는 게 현실입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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