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s daily] 일상의 구석에 새긴 작은 무늬들

in #kr6 years ago (edited)

일상의 구석에 새긴 작은 무늬들

   S o u l ’ s  d a i l 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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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살배기 첫째 딸과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모험적인 도전을 해보았다. 2살배기 둘째 딸은 장모님에게 맡기고, 아내와 난 첫째 딸을 데리고 극장에 갔다. 영화는 <쥬라기 월드2>로 정했다. 영화 선택은 아이의 기호와 아내와 나의 선호가 공정하게 반영된 결과다. 평소 공룡을 좋아하는 아이는 영화 선택에 이견이 없었다.(‘공룡’이라고 말하는 순간 오케이 사인이 났다.) 각자 33.3%의 지분을 갖고 영화 선택에 참여했다. 공룡 영화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접점이 있었다.

 극장 불이 꺼지니까, 공룡도 나오기 전인데 아이는 무섭다고 했다. 아빠가 안고 볼까, 했더니 대번에 건너온다. 아이는 한동안 안겨 보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또 건너오기도 하고, 엄마의 의자 뒤를 파고 들어가서 엄마 뒤에서 숨어서 보기도 했다. 분명 2D 영환데, 아이는 몸을 써가며 5D로 즐기고 있다.

 아이는 공룡이 나올 땐 꽤 몰입해서 영화를 보았다. 아내와 난 대체로 성공했다는 평가를 내렸다. 비록, 공룡이 안 나올 땐, 브라키오 사우루스가 언제 나오는지에 대해 일곱 번쯤 물었고, 평소에 친근하기 그지없었던 티라노 사우루스가 왜 사람을 물고 흔드는지 의문을 표했으며, “나 무서워.” 라는 말을 열 번쯤 하긴 했지만 말이다.

 아이를 낳고 육아를 하는 동안 극장에 거의 가보지 못한 아내는 새롭게 열린 가능성에 한껏 고무됐다. 아이가 클수록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 더 많아질 것이다. 지난달에 7살 아들을 극장에 데리고 가서 <어벤져스>를 함께 봤다는 친구가 부러웠는데, 이젠 우리도 공룡 영화까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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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최종 목표는 손잡고 도서관에 가서 각자 자신이 고른 책을 몇 시간이고 읽다 오는 것이다. 아이에게 맞춰서 일방적으로 즐거운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아이와 내가 제각기 독립된 주체로서 즐기는 시간을 갖는 것 말이다. 물론, 아이와 내가 온전한 주체로서 함께 뭔가를 즐길 시기가 왔을 때 아이가 나와 놀아줄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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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가 그네타기를 좋아한다. 스릴 즐기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내게 세게 밀어달라고 수시로 요청한다. 난 힘껏 그네를 민다. 그네는 하늘로 올라갔다가도 몇 번 오가는 사이 점점 진폭이 작아진다. 계속 밀어주지 않으면, 진폭이 작아진 그네는 결국 멈춰서고 만다.

 그러고 보면, ‘관계’는 그네라는 생각이 든다. 일부러 멈추려 들지 않아도 힘을 들이지 않으면 그네는 멈춰 선다.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굳이 자르려 들지 않아도, 그냥 놔두기만 하면 서서히 분해되어 흩어지는 게 관계다. 관계를 끊고 싶다면,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내버려 두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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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한동안 푹 빠져 있던 간식은 ‘오뚜기 냉동 피자’다. 그동안 수많은 냉동 피자가 나왔지만, 오뚜기 피자가 왜 특별한가 하면, 가성비 때문이다. 제일 무난한 콤비네이션과 불고기 피자는 정가가 5900원이지만, 행사를 자주해서 대체로 4900원에 살 수 있다. 지금까지 딱 한 번 마트가 통 큰 행사를 했을 때, 3900원으로 구입한 적도 있다. 가격을 대략 5000원선으로 잡고, 그 가격에 살 수 있는 냉동 피자 몇 종을 비교해보았다. 여러 종을 먹어 봤지만, 오뚜기 피자의 가성비가 가장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피자에 토핑된 치즈의 양 때문이다.

 피자 값이 크기에 비해 싸다면, 이유는 한가지다. 치즈를 적게 쓰기 때문이다. 몇 푼이라도 남기려면 그 방법 밖에 없는지, 5000원 내외의 가격을 가진 피자 중 오뚜기 피자를 제외하면 치즈의 양이 턱없이 부족하여, 전자렌지에 조금 오래 돌렸다 싶으면 치즈가 다 말라붙어서 그냥 빵을 씹는 느낌만 난다. 피자를 넣었는데 빵이 나오다니! 콩 심은데 콩 나는 자연법칙을 완전히 거스르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오뚜기 피자는 치즈 토핑의 양이 비교적 충실하다. 데우다보면 접시에 흘러내린 부분이 있을 정도다. 그리고 입으로 베물었을 때 치즈가 쭉 늘어나면서 손과 입 사이에 외줄 다리가 만들어지는 광경도 연출할 수 있다.

 지금도 우리 집 냉장고엔 오뚜기 냉동 피자가 4판 있다. 지난 날, 꽤 자주 밤마다 글을 쓰기 전에 먹었던 탓에, 복부가 팽창하는 변화를 겪고 있다. 사회에서나, 스포츠에서 자주 언급되는, ‘허리 층을 두텁게 하자.’라는 말이 긍정적이기만 한 줄 알았다. 복부 팽창은 결과적으로 허리 층을 두텁게 한다. (그것도 모자라, 새로운 층을 더 만들기도 한다.) 정확히 무슨 뜻인 줄 모르고 쓰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좋은 것에는 치명적인 부작용도 있기 마련이다. 최근 삼일 정도 쉬었으니, 오늘 정도는 반판쯤 먹어도 괜찮지 않을까. 오늘은 불고기 맛이 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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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판사가 주인공인 법정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개인주의자 선언>의 저자로도 널리 알려진 현직 판사 문유석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다.

 그 드라마가 좋은 점은, 입체적인 인물.
 남자 주인공 임바른 판사는 어릴 적부터 수재로, 1등을 놓쳐본 적 없는 인물이다. 전도유망한 엘리트 판사. 사람들이 보기엔 화려해 보이는 그 인물의 이면엔 쓸쓸하고 슬픈 구석이 있다. 집안이 평탄하지 않다. 판사가 되었지만, 정작 집주인이 집세를 올린다는 통보에 엄마가 읍소하는 것 밖에 대책이 없는 가난한 형편이다. 판사라는 직업은 사회에서 최상위 계층으로 보이지만, 국가 공무원이라 월급도 생각보다 많지 않다. 집안의 돈 문제를 해결하기엔 길이 멀어 보이고, 집안 좋은 여자와 선을 보는 것도 별로 내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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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사진=JTBC '미스 함무라비' 캡처>

 지독한 개인주의자이지만, 고교시절 좋아하던 박차오름 판사의 오지랖과 약자를 향한 열정에 점차 동화되어 간다. 박차오름의 행동에 이견을 보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그녀 옆에 선다.

 왠지는 모르겠으나, 임바른 판사를 보면 위로 받는 기분이 든다.

 나이를 먹으니, 나를 둘러싼 사람들 누구도 나를 돌봐줄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나에게 약한 구석이 없는 게 아닌데. 다만 나이를 먹었을 뿐인데 말이다. 그럴 때, 나 스스로라도 나를 위로하고 돌봐야 한다. 영화에서, 드라마에서 비슷한 심정일 것 같은 사람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것이다. 허구의 대상에 날린 위로와 응원은 결국 내게 돌아온다. 이야기 속 인물을 바라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실은 그 안에서 나를 보고 있었던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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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게 되는 좋은 문장도 많고, 중간중간 유쾌한 표현에 웃음도 짓고..
글 참 잘 쓰십니다~!!^^

감사합니다ㅎ 웃음이 목표인 글이었는데 목표 달성했네요ㅋ

조근조근 담은 일상을
잘 읽었습니다.
다음 글이 기대돼요.

기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ㅎ

오뚜기 컵피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냥 왔는데, 글 보니 땡기네요^^

오뚜기에서 컵피자라는 것도 나왔나보네요. 자매품! ㅋㅋ

관계는 그네다

라는 말에 공감 하고 갑니다 ㅎㅎㅎ
끊기지 않기 위해 이렇게 한번 더 댓글 남기고 가요 ㅋㅋㅋ

네 쎄게 밀어주세요.ㅎㅎㅎ 저도 밀러갈게요.ㅋ

일상에서 지나가면 무의미해질지도 모를 것들을 붙잡아 다시 볼 때 무늬를 새길 수 있는 것 같아요.

언젠가 네식구가 함께 할 수 있는 것들도 생기겠죠?ㅎㅎㅎ갓뚜기 피자는 먹은지 오래되었는데 다른 건 비교대상이 아니었군요. 미스 함무라비는 현직 판사가 대본에 참여했다는데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최근 들어 보고 싶은 드라마가 많아서 아예 보고 있지 않다능...ㅎㅎㅎ

네 상처와 멋진 감정들이 어우러져 일상의 무늬를 만들지요.ㅎ
우리 두 살난 둘째까지 함께 극장으로 총출동하는 날이 머잖아 오겠지요. 지금의 귀여움을 좀 잃어버린 상태겠죠. 역시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지요. ㅎ;;
최근 고메 피자라는 걸 먹어봤는데, 그것도 치즈 함유량이 괜찮습니다. 하지만 가격이 천원정도 비싸다는 점. 역시 가성비에선 오뚜기입니다.^^ 미스 함무라비, 나중에 몰아보세요.ㅎㅎ

나중에 마트갈 때 기억해두겠습니다. ㅎㅎㅎ
미스 함무라비...무법변호사도 보고싶은데 아직 따라가지를 못했어요. 일단 몰아본다면 나의 아저씨부터 몰아 볼 생각입니다.ㅎㅎㅎ

몰아보실 드라마가 많네요. 벌써부터 이터널님의 충혈된 눈이 떠오르는 듯 합니다ㅎㅎ

오뚜기 좋아요~~ 오뚜기 피자 먹어봐야겠어요~

네 간식으로 괜찮습니다ㅎ

soosoo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soosoo님의 [Link & List] "유급 평론가들의 도서리뷰" 41차 (update. 18.06.10)

...>5 jennn 1 kyslmate/td> 4 kyunga 6 ...

나이를 먹으니 누구도 나를 돌봐줄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말 정말 공감합니다. 어른이 되는게 그런것인가봅니다. 내가 돌봐야 할 사람이 많아지는 것...저도 허구의 누군가에게 응원을 보내봐야겠네요.ㅋㅋ

어른이 되는 건 외로움을 잘 견디는 것일수도 있겠네요. ^^ 반갑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이리도 좋은 쏠님의 일상 이야기! 결국 따님은 울지 않고 끝까지 잘 봤나요? 몇살때인지 기억은 안나지만, 우리 큰 아들의 첫 극장행은 실패였답니다 ㅋㅋㅋ

네 깜깜해서 무섭다는 말은 했지만 울지 않고 끝까지 잘 봤습니다ㅎㅎ 공룡이 나올 땐 제가 깜짝깜짝 놀라고 공룡이 안나올땐 딸이 지루한지 무섭다고 하더라고요ㅋㅋ

꼭 월요일만 되면 도서관이 가고 싶어집니다. 이유를 모르겠어요. 휴관인걸 알면서도 항상 아쉽습니다.

도서관은 언제 가도 받아주는 곳이죠. 말씀들으니 월요일에 여는 도서관이 있는지 찾아보고 싶네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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