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동네 북카페에서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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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의 어느 날 휴일, 얼마간의 자유 시간이 생겨 책과 노트북을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그럴 때면 보통 시립도서관에 가는데, 그 날은 휴관일이었다. 내게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알차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목적지를 최대한 빨리 정하고 자리를 잡아야 했다.

 뜻하지 않게 얻은 여유 시간에 가끔 가는 카페는 좌석수가 많고 2층까지 있어서 공간이 넉넉하다. 보험 회사가 모여 있는 빌딩 근처에 있어서, 카페의 손님은 보통 보험 회사 직원과 고객일 경우가 많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려고 앉아 있으면,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종합적으로 설계하는 말들이 들려온다. 다른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면 노후 자금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방안이나 암이 노인들이 삶에 얼마나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지에 대한 얘기도 들을 수 있다. 고객들은 보통 앞에 앉은 직원을 통해 한 가지 이상의 보험을 가입한 사람들이다. 직원들은 고객이 자신을 통해 보험 상품을 추가 구입하기를 바랐다. 중년 또는 노년의 고객들은 집에서 소일하다가 평소 간간이 연락하며 지내던 보험 설계사의 연락을 받았을 것이다. 설계사가 차 한 잔 하자고 불러낼 때,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반가운 마음에 카페로 나와 앉은 것일 테고.

 그곳은 그나마 주차가 쉽고 가까운 곳에 있는 그럴 듯한 카페였지만, 그 날은 거기로 가고 싶지 않았다. 결론이 똑같은 인생 설계를 그날만큼은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장소를 생각하다가, 음식점들이 늘어선 거리 중간에 ‘북카페’라는 간판을 달고 있던 곳이 떠올랐다. 집에서 10분 거리로, 애들을 데리고 간단히 저녁을 먹기 위해 오갈 때 자주 보았지만 한 번도 가보지는 않은 곳이었다.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입구가 좁은 1층 매장은 커피숍이었고, 지하로 내려가면 북카페가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예전 서울 홍대 앞에서 가보았던 북카페의 모습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지하 북카페는 벽면을 차지한 큰 책장들과, 테이블들 사이에서 칸막이 역할을 하는 작은 책장들엔 세월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다. 보통 북카페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신간서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뭐 상관없었다. 거기 책을 읽으려고 간 건 아니니까. 그저 조용히 앉아 집중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테이블의 배치는 자유로웠고 작은 소품들이 배치되어 있어 공간은 아기자기했다.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것 같았는데, 내가 들어설 때 남성분은 가장 큰 테이블에 앉아 책을 읽고 계셨고, 여성분은 그곳의 소품들을 정리하고 계셨다. 손님은 거의 없었다. 아니, 내가 머물렀던 3시간동안 손님은 내가 유일했다. 나이 지긋하신 사장님은 그 사실을 전혀 개의치 않으신 것 같았다. 세상사를 초월한 사람처럼 묵묵히 책을 읽거나, 커피를 내릴 뿐이었다. 그 분은 커피에 꽤 조예가 깊은 듯 했다. 카페 한 쪽에 드립 커피를 따로 판매한다는 게시물이 붙어 있었다. 먼 곳에서도 주문이 들어오는지 택배 배달도 가능하다고 적혀 있었다. 카페를 유지하는 수입원은 거기서 나오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카페를 취미로 운영하는 자산가인지도.

 북카페는 사장님 자신을 위한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일평생 사서 읽고 개인적으로 소장했을 책들이 누런 세월의 색을 입고 그 공간에 모여 있었고, 그가 큰 테이블에 앉아 책을 넘기는 모습이 그 공간과 너무도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자신과 그 책들을 이런 공간에 놓아두기 위해 일평생 생활의 질고와 싸워왔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만약 그것이 그의 꿈이었다면, 그는 지금 승리자였다. 카페 운영엔 별로 관심이 없지만, 저 나이가 되었을 때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책을 읽을 공간을 소유하고 싶다는 소망은 간절하다.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한 가지만 빼고는 다 좋았다. 그 한 가지는 큰일이지만, 작은 일이다. (얘기를 들으면 납득할 것이다.) 마실 것을 주문한 직후 화장실로 가서 큰일을 보았다. 변기 물을 내리니 물이 내려가지 않고, 물이 점점 차올랐다. 변기에 앉기 전에 한 번 물을 내렸을 땐 시원하게 내려갔기에, 막혔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난 순간 고민에 빠졌다. 위험을 감수하고 한 번 더 내릴 것인지, 아니면 아직 남아 있는 나의 부끄러움과 함께 그 상황을 사장님에게 모조리 인계할 것인지를 말이다. 다시 한 번 도전하기로 했다. 그 도전의 결과는 끔찍했다. 어두운 표정으로 사장님께, “화장실 변기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라고 말하자 사장님은 자주 있는 일이라는 듯 무심하게 대답하곤 화장실로 들어가셨다.

 난 재빨리 주문한 음료를 들고 자리로 와서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고 독서와 글쓰기에 몰입했다. 평소보다 더 많은 분량을 읽었고, 원고지 30~40매 분량의 원고를 한 시간 만에 뚝딱 써내려갔다. (그곳에서의 몰입이 화장실의 일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곳의 분위기는 사람들이 여럿이 쓰는 거실 같아서 편안함과 긴장감이 적절한 비율로 유지되었다. 편안함과 긴장감의 최적화된 비율은 집중력을 끌어내는데 도움이 된다. (집중력 이외의 것도 딸려 나오긴 했지만.)

 세 시간을 머물고 카페를 나오면서, 파리 날리는 그곳을, 사장님이 무심하게 책장을 넘기고 화장실 변기를 수리하는 이곳을, 또 오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번엔 내가 자리 잡은 테이블 이외의 곳은 들어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지상으로 이어진 계단을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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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동네에 새로 생긴 만화방에 가끔 갑니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작은 방들이 벌집처럼 주욱 연결되어 있어요. 각박하다 보니 트렌드가 "편안함"으로 많이 바뀌나 봅니다.

벌집방들이 들어찬 만화방은 저도 가봤어요. 정말 안락하더군요.ㅎㅎ 여유만 있다면 하루 종일 있고 싶은 곳이었어요. ^^

저는 변기막혀본 경험이 한번도 없어서 생각만 해도 식은땀이 흐르네요... 저라면 다시는 안 갈것 같아요.ㅎㅎㅎ

ㅋㅋ 변기의 아찔한 경험을 상쇄할만큼 분위기가 좋았어요ㅋ

북카페에서 글이라 정말 좋은곳이네요.

네 편안한 곳이예요^^

몸과 마음을 비우는 거사를 치른 후엔(?) 글이 더 잘써진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는데 그 경험을 하신것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ㅋㅋ 전 사람들의 말소리, 음악소리가 마구 겹치는 카페에서 무언가에 몰입하기 쉽지 않더라구요. 이런 조용한 카페에 한번 가보고 싶네요.

거사를 치르고 글이 더 잘 써진다는 얘기도 있었나요?ㅋㅋ 그렇다면 글쓰기 전에 요거트 하나씩 먹고 유산균을 섭취해야겠군요ㅎ
시끄러운 음악 대신 잔잔한 음악, 조용한 분위기 딱 좋았어요^^

변기가 막혀야 집중이 최고조에 이르는 것 같습니다. 그곳 사장님하고 친해지실 듯 합니다. ㅋㅋㅋ 잘 읽고 갑니다.

ㅎㅎ 동감입니다.
사장님과 친해지실듯....

사장님과 친해져봐야겠어요ㅎ

다음 방문때도 변기를 기대해야 하는 건가요ㅋㅋ 사장님 자주 뵈어야겠네요ㅎ

boddhisattva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boddhisattva님의 TOP 200 effective Steemit curators in KR category for the last week (2018.09.10-2018.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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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카페에서 쓰는 글이라니!
왠지 글이 잘써질꺼 같은데요?ㅎㅎ

네 잘 써졌어요ㅎㅎ

마음에 드는 공간을 발견하심을 축하드려요~^^
꿈을 이룬 듯 초월한 듯한 사장님 부럽네요^^

네 가까운 곳에 좋은 곳이 있었어요ㅎㅎ
저도 사장님 부럽습니다^^

저는 나중에 조그만 버섯농장을 지어서~
버섯을 키우며 농장 원두막에서 스팀잇을 하며
글을 쓰는 게 소원입니다~

와. 버섯농장에서 버섯 키우며 원두막에서 글쓰기~~ 낭만의 끝이군요!^^ 그 꿈 저도 응원합니다. 꼭 이루시길요ㅎ

li-li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li-li님의 평론가들의 도서리뷰 # 52 / 18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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