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essay] 힘없는 사랑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

in #kr6 years ago

힘없는 사랑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

   S o u l   e s s a y  


 음악의 선율이 눈에 보이는 물리적인 것이라면, 우리는 길거리마다, 집집마다, 방구석 구석에 재생되었던 음악들이 오래된 눈이나 먼지처럼 쌓여 있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음악이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소재가 사랑과 이별인 걸 생각하면, 세상은 온통 사랑과 이별로 가득 차 있고, 이 세상의 환경 미화원들은 은퇴 직전까지, 치우기가 무섭게 다시 쌓이는 ‘사랑과 이별’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릴 것이다.

 사랑 노래의 대부분은 남녀 간의 연애 감정을 다룬다. 이걸 보면, 인간이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랑’이거나, 최소한 ‘사랑’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추론할 수 있다.

 <연애 시대>의 명대사 하나를 보면, 어째서 모든 거리마다, 집집마다, 방구석에도 연애 감정이 음악에 실려 쏟아져 내리는지 짐작할 수 있다.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일 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낼 뿐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연애를 한다. 내일을 기다리게 하고 미래를 꿈꾸며 가슴 설레게 하는 것.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
-드라마 <연애시대> 중.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이기 때문에, 십대도, 청년도, 장년도, 심지어 연애 세포마저 허리가 굽어 있을 것 같은 노년도, 저마다의 선율에 사랑의 가사를 얹어 노래한다.

 붉게 타는 노을을 보면서 소리쳐 부를 사랑의 대상을 떠올리고, 상하이 트위스트를 추면서 난생 처음 만났던 사랑의 대상을 떠올린다.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대상은, 어린 아기가 아니고 놀랍게도 연애 상대다. 밤비 내리는 영동교를 비를 맞아가며 걷는 이유는, 버스비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그 사람을 잊지 못해서다.

 장르를 불문하고 저마다 사랑을 노래하고 있지만, 노래마다 표현하는 사랑의 색과 결은 저마다 다르다. 분류하는 기준에 따라 수십 갈래로 나눌 수 있겠지만, 사랑 노래를 화자의 성향에 따라 다음과 같이 두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보고자 한다.

하나, ‘들뜨고 확신에 가득 찬 화자’가 말하는 사랑 노래

둘, ‘신중한 나머지 힘없어 보이는 화자’가 말하는 사랑 노래

 사랑을 노래하는 이 두 사람의 화자는 저마다 비판 받을 만한 허점을 안고 있다.

 첫 번째 부류의 화자는, 내 삶의 유일한 사랑은 바로 당신뿐이라는 완전한 확신을 갖고 있다. 세상을 조금 살아본 사람들은, 이 ‘완전한 확신’이라는 말을, ‘완전한 착각’이라는 말로 바꾸어도 별 무리가 없다는 걸 안다. 이 화자는 운명론자다. 우리는 어떻게든 만나게 될 운명이고, 내 삶은 너 아니면 안 된다는 읍소를 늘어놓는다. 세상 ‘끝 날’까지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고백한다. 이 화자는 분별력 있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끝나는 날이 세상의 끝 날이라면, 당신은 앞으로 세상의 종말을 여러 번 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끝장나지 않고 보란 듯이 굴러갈 겁니다. 그리고 내 삶의 유일한 사랑이라고 말했던 그 ‘당신’은 현재 문법 체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단수형 복수’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겁니다.”

 두 번째 부류의 화자는, 아주 신중하고 소심하다. 평생 너와 함께 하겠다,는 것 같은,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나를 사랑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한다.(‘이런 나’의 구체적인 정황은 보통 드러나지 않는다. 신체기능에 문제가 있는 건지, 돈이 없는 건지, 나이차가 서른 살쯤 나는 건지, 어떤 건지 알 수 없다. 겸손함을 어필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사랑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뭔가 불안한 마음이 느껴진다. 현실 속에서 바람 앞의 촛불 같은 우리의 사랑을 어떻게 유지할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세상을 조금 살아본 사람이라면, 이 화자를 꽤나 진실하다고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진실성’ 측면에서는 이런 의심을 살 수 있다.

“아니, 사랑한다면서, 우리는 운명적이야! 같은 말도 못합니까? 사랑한다면서, 당신을 평생 웃게 해줄게. 같은 약속도 못합니까? 한창 뜨거울 시점에도 이렇게 사랑에 힘이 없는데, 나중엔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 닭 보듯 할 게 눈에 선하네요.”

 사랑을 노래하는 두 부류의 화자가 모두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지만, 그 둘 중에 내가 선호하는 화자는 후자이다. 난 자기 비하로 가득 하거나 자신의 소심함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가사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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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사랑~
-임재범, <너를 위해> 중

 사랑을 얻기 위해 자기를 포장해도 모자랄 판에, 자기를 이토록 적나라하게 드러내다니! 내가 아는 여자들 중에,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가진 남자를 좋아하는 여자는 없다.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은, 여자를 덩달아 불안하게 만들 것이다. 그래도 이 가사가 좋은 것은, 내 허물을 다 드러내도 날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판타지 때문이다.

 소심한 화자인 듯 보이지만, 강한 약속으로 마무리하는 노래도 있다. 두 부류 화자의 혼종이라고 할까. 다음은 김동률의 <감사>의 가사다.

부족한 내 마음이 누구에게 힘이 될 줄은 그것만으로 그대에게 난 감사해요.

이제야 나 태어난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아요. 그대를 만나 죽도록 사랑하는 게 누군가 주신
나의 행복이죠.

 앞부분에 부족한 자신을 언급해서 소심한 화자인 줄 알았는데, 뒷부분에서 강한 확신을 가진 운명론자의 면모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뭐 좀 혼란스럽긴 하지만, 가사에 자기를 낮추는 겸양이 들어있으므로 난 이 가사 좋아한다.

 난 왜 힘없는 사랑 노래를 좋아하는가.

 난 평소에도 주장이 센 사람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기 말에 강한 확신을 갖고 주먹을 흔들며 말하는 사람의 급을 좀 낮춰보는 경향이 있다. “저 사람은 분명 고수는 아닐 거야.”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고수가 없는 건 아니다. 전적으로 내 편향된 시각일 뿐이다.)

 그런 경향성이 사랑 노래의 가사를 보는 눈도 혼탁하게 만들어 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랑을 확신하며 외치면, 음 저 정도로 간절하고 감정이 고조되어 있군, 하고 좋게 봐줄 법도 한데 말이다.

 힘없는 사랑 노래의 화자는 비리비리해 보이고, 불쌍해 뵈고, 눈빛이 좀 불안해보이지만, 왠지 감정이입이 용이하다. 그래서 ‘부족한 나를’ 어쩌고 하는 가사만 보면, 자동으로, 음 좋군, 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비리비리해 보이고, 불쌍해 뵈고, 눈빛이 좀 불안해 보이는 화자가 내 속에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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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따뜻한 차 한잔 마시듯 쏠메님의 글을 읽네요. 음악이 눈에 보인다면 환경미화원이 사랑과 이별 노래를 치우다 노이로제에 걸릴 것이라는 도입부를 읽는데 재미난 상상이다! 하면서 왠지 기분이 좋아졌어요 :) 그러고보니 어릴 땐 상상력이 풍부해 만화영화 작가를 해도 좋겠다던 제가 언제부턴가 상상보다는 근심이나 계획같은 것만 하고 있었네요.

난 평소에도 주장이 센 사람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자기 말에 강한 확신을 갖고 주먹을 흔들며 말하는 사람의 급을 좀 낮춰보는 경향이 있다. “저 사람은 분명 고수는 아닐 거야.”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저는 주장이 센 사람이 어렵거나 무서워 피하게 돼요. 주장은 신념과는 달리 ‘강요’ 의 느낌이 들어서요.제가 만난 대부분의 주장 강한 사람들은 타인의 경험이나 의견을 얕보는 경우가 있어왔기 때문인가봐요.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보이기도 하고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생각도 들고요.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고 단정할 수 있는 걸까요?

도입부에 상상을 써놓고, 이 설정으로 동화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ㅎㅎ 조만간 선보일 수 있을 거 같아요.ㅋ 역시 스프링필드님은 어릴적에 상상력이 무지 풍부한 아이였을 거라 생각했어요. 엉뚱한 상상도 많이 하고 멍하니 공상도 많은 아이- 그 상상력은 어디 가지 않고 그 마음 어느 곳에서 싹이 트길 기다리고 있을 거 같아요^^

주장 센 사람은 왠지 거부감이 들어요. 주변에 공기가 희박해지는 느낌이예요. 보이지 않는 공간이 갑자기 좁아지고 갑갑해진다고 할까요.
주장 센 사람들에겐 다른 사람의 경험이나 생각이 들어설 자리가 없는 거 같아요. 주장 강한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닐 것이고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부류가 있더라구요.
여하튼 전 소심하기도 하고, 내 주장에 앞서 상대방 기분이나 생각을 먼저 살피는 자아가 약한 인간형이 좋더라구요ㅋㅋ 전 그런 인간형을 '소시민적' 인간이라고 부르곤해요.ㅎ

와. 중학교때는 집에 오면 침대에 누워 하루종일 천장을 보며 상상만 하다가 잠들곤 했어요. 보이지 않는 공간이 좁아지고 주변에 공기가 희박해지는 느낌이라니. 하아. 제 말이 그말인데 왜 그런 표현이나 어휘가 생각이 안날까요!! ㅋㅋㅋ ‘소시민적’ 정말 좋은데요? 소.. 소심인 아닙니다. 소시민이라구요! ㅋㅋ

스프링필드님도 소시민적인 부류로ㅋㅋ 소심인적 요건을 갖추어야 소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ㅎㅎ 어쩌다 소시민적인 사람을 만나게 되면 먼 옛날 떠나온 같은 도시 출신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갑고 친근하고 그래요^^
밥먹듯이 상상하던 중학생. 음, 작가 스멜~~ㅎㅎ

자신의 부족한 면까지 보여줄 수 있는 용기야 말로 가장 강한 사랑 노래가 아닐까 싶습니다:)
저도 가사에서 막 왁왁하는 노래들은 별로네요 ㅋㅋㅋ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고 애끓는 감정은 반쯤 감추고 나직이 읊조리는 사랑 노래야말로 듣는 이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더라구요^^

<연애시대>가 자주 회자되는 것 보면 정말 좋은 드라마였던 것 같아요. 예전엔 정주행하며 보고 또 보고 했는데 지금 다시 보면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겠죠?

작사가 채정은은 어떤 마음으로 써냈을지 궁금해지네요. 유독 남자노래를 많이 썼는데 말이죠. 두 부류를 왔다갔다 하는 것 같네요. 대답없는 너 같은 가사를 보면요. ㅎㅎㅎ

네 <연애시대> 덕후시군요.ㅎ 저도 두 번쯤 정주행했지요. 두 주인공이 보여주는 엇갈림에 안타깝고 애정을 엿볼 때면 설레고. 여러 감정을 주었던 드라마였지요.^^
작사할때도 자아와 경험이 녹아 들어가겠지요. 그때그때의 경험과 사랑에 대한 관점이 영향을 주지 않을까요ㅎ

저도 연애시대 너무너무너무 좋아해요. 음악도 좋고, 피클병 씬을 아실런지... 그 장면을 여러 번 돌려봤던 기억이 나요.

연애시대 덕후들이 많네요ㅎㅎ 한 번 단체 감상회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지ㅋ 손예진의 열연이 돋보였던 피클병씬ㅎ

본지가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안나 유튜브로 다시 찾아봤어요. 저는 연애시대 덕후는 아닌가봅니다. ㅠㅠ예전에는 정주행쯤 이틀에 몰아볼 수 있었는데 요새는 덤비기가 쉽지 않네요. ㅎㅎㅎ

제게 연애시대=피클병 씬이예요..... ㅜㅜ

피클'병씬' 이거이거 발음에 유의하셔야 합니다. ㅋ

ㅋㅋㅋㅋㅋㅋㅋㅋ 중국어욕처럼 들리네요

역시 스프링필드님...!! 댓글 보고 한 번 더 봤어요. 다시 봐도 찡해지네요.

그렇다면 저는 고수로 생각해주시기는 글렀군요. 주먹펴고 일어선 말투를 사용하는 저는....

직접 뵈면 또 다를 거라 생각해요. 근데 소수점님을 주장이 강한 분이라 생각해보진 않은 거 같아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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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땐 확신에 찬 사랑 노래에 가슴이 뛰었는데, 나이가 드니 소심한 사랑 노래가 가슴을 시리게 하더라구요.
더 나이가 들면 '사랑, 뭥미?'하겠죠.ㅜㅜ

ㅋ 더 나이가 들면 과거 사랑의 기억, 연애의 추억을 떠올리며 또 가슴이 뛰겠지요ㅎㅎ

저도 후자입니다~!!!^^

‘당신’은 현재 문법 체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단수형 복수’

이 문장 신선한데요~!!^^

ㅎ 당신과 영원히 함께 하겠다는 가사가 워낙 흔하다보니, 그 '당신'은 여러 명이 아닐까 하는. ㅋ

< ‘부족한 나를’ 어쩌고 하는 가사만 보면, 자동으로, 음 좋군, 하게 되는 것이다.>

아... 정말 그렇습니다.... ㅜㅜ ㅎㅎㅎ

메가님도 목소리 작고 소심한 고백에 이끌리시는군요ㅋㅋ 사랑한다는 건 어쩌면 자기를 한없이 낮추고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

<사랑한다는 건 어쩌면 자기를 한없이 낮추고 상대를 나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이 되는 게 아닌가>

아... 제가 남의 편을 심하게 사랑하나보군요... 인정하기 싫네요...-.-;

메가님의 남의 편님은 복받으셨네요!ㅎㅎㅎ 메가님의 메가톤급 사랑을 한 몸에 받고 계시니...^^

그래 어쩔 수 없는가봐 나도 보통 여자 인가봐
이별에 담담할 수 있을거라 살아왔는데 아닌가봐
너를 눈물로 붙잡고 싶어 되돌려줘 내 사랑을
너 없이는 살 수가 없는데 어떡하라고
난 어떡하라고 내게 이러니

린 <보통여자>

제목부터가 <보통여자>군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군요. 근데 '너 없이는 살 수가 없'다는 강한 확신을 보이고 있군요. 혼종입니다ㅋㅋ

solnamu님이 kyslmate님을 멘션하셨습니당. 아래 링크를 누르시면 연결되용~ ^^
solnamu님의 무엇이든 쓰게된다김중혁

...림 속 사물들의 비율이 엉망진창이더라도, 노래의 멜로디가 이상하더라도, 나는 그 결과물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건투를 빈다.

좋은 책 선물해주신 kyslmate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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