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l 단상] 인스턴트식 판단

in #kr6 years ago (edited)

컵라면.jpg

남자가 말했다.
"난 아침에도 국물 없으면 밥을 못 먹어."
"그래서 오늘 아침은 뭘 드셨어요?"
"컵라면. 우동 국물이 끝내주더만!"

아침에 우동 컵라면을 먹으며 떠올린 가상의 대화다.
주변엔 1차원적으로 섣불리 해석하면 안 되는 일들이 많다.
늘 사안마다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국물없이 밥을 못 먹는 남자는, 아내를 괴롭히는 가부장적인 남자로 인식될 소지가 크다. 하지만 그 남자가 손수 컵라면을 끓여먹는 사람이라면? 누군가는 남자를 조금 안쓰럽게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전자와 후자의 인식 차이는 크다.

세상의 뉴스엔 수많은 키워드들이 등장한다. 그 키워드들은 그 속에 이미 그 대상에 대한 '인식의 요구' 내지는 그 대상을 향한 '일반의 선입견'을 품고 있다.

난민, 노조, 자영업자, 성폭력 피해자, 남성 혐오, 최저 임금...
요즘 자주 보이는 말들이다.

이 말들이 품고 있는 함의만으로 모든 걸 판단해선 곤란하다. 1차원적인 해석은 본질과 정반대되는 해석의 오류를 불러올 수도 있다.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필요하면 여러 경로로 관련된 사안을 찾아 다른 해석이나 내가 놓친 건 없는지도 알아봐야 한다. 뉴스 헤드라인만 보고 박수치거나 비판할 일이 아니다.

많은 경우, 내가 가진 인식의 틀로, 혹은 진보/ 보수로 양분되는 관점으로 어떤 사안을 재빨리 해석하고 재단하곤 한다. 그렇게 뉴스들은 한 개인의 인식의 공장에서 비슷한 겉봉을 달고 자매품으로 대량 생산된다.

어떤 사안의 고유의 색이나 논점은 빛을 잃고, 좌우로 줄 선 껍데기만 남게 된다.

난 아침에 우동 컵라면을 먹었다. 빵이나 시리얼로 아침을 간단하게 해결하곤 하는데, 오늘 아침엔 불쑥 컵라면이 먹고 싶었다. 만류하는 아내에게 "라면이나 빵이나 밀가루인 건 매한가지니까." 하고 말하곤 물을 끓였다.

난 국물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사람도 아니고 해장이 필요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안쓰럽게 볼 정도의 처지도 아니다. 그저 우동 국물이 먹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아침에 우동 컵라면을 먹었다고 말했을 때, '국물 없이 밥 못 먹는 부류구나.', 라든가 '쯧쯧. 안 됐군. 대접 못 받는 남자 여기도 있구먼.' 하고 인스턴트식 판단을 내리는 사람보다 조용히 웃으며, "그게 먹고 싶었던 거야?" 하고 판단을 잠시 유보하며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려 주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은 것이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어떤 사람에나, 어떤 사안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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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감사합니다ㅎ

전 아침부터 라면도 먹고 삽겹살도 먹어요. 그냥 먹고 싶은 대로 먹는거지요. ㅋㅋ 오늘 글에 무척 공감이 되어요. 왜냐면 저도 그런 잣대없이 순수하게 사람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중이거든요! ㅎㅎ

아침부터 포식하시는군요ㅎㅎ 에빵님 순수하신 건 알죠~~^^

무슨 음식이든 기분좋게 드셨으면 되는거죠 ^^

네 기분좋게 먹었습니다ㅎ

컵라면을 국대신으로 먹을 수도 있죠, ㅎㅎㅎ 사람마다 이유가 다 다르니까요, ㅎ

사람마다 다른 이유와 사정을 헤아려볼 여유를 가지고 싶네요ㅎ

공감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것은 1차원적인 해석이 주류를 이루면 그것이 진리가 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어쩌겠습니까... 또한 그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니 때론 어쩔수 없이 국물없인 밥 못 먹는 남자가 될때도 있음이 참 머릿속을 어지럽힙니다. 사는게 뭔지... ㅎㅎ 항상 생각하게 해주는 글을 써주시어 고맙습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네 1차원적인 해석으로 뭉친 맹목적인 다수가 뿜어내는 에너지에 종종 기가 질릴 때도 있지요.
사람을 헤아린다는 것, 헤아림을 받는다는 것, 쉽지 않음을 경험합니다. 나라도 애쓰는 수밖에요. ^^

"영희씨, 결혼하자. 당신 손에 물 안 묻히고 살게 해줄게."
철수는 결혼준비물로 고무장갑과 식기세척기가 빠지지 않도록 꼼꼼히 챙겼다고 합니다.

본 글에서 쓰신 내용을 악의적으로 이용해서, 쟁점에서 이기기 위해 새로운 단어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고무장갑과 식기세척기ㅋㅋ 식기세척기 정도면 그나마 사정이 나은 편이네요. 말씀하신대로 철수 같은 사람들이 눈 가리고 아웅하는 걸 많이 봅니다. 노답일 경우가 많다는 게 슬픈 현실이네요.

글을 읽다보니 이 노래가 자꾸 떠올랐습니다.

ㅋ 제목만 봐도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노래가 의외로 서정적이네요^^

언론이 우리에게 씌우는 인식의 프레임도 우리의 삶 속에도 인스턴트적인 것들이 많으니 우리의 판단도 많은 선입견과 피해의식이 뒤얽혀 모르는 사이에 인스턴트적으로 변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근데 다른 댓글들을 보니....저만 진지충인거 아니죵 ㅎㅎㅎ;;)

네ㅎ 인스턴트 음식을 많이 먹어서 그럴 수도요ㅋ 인스턴트 음식이라는 게 시간적 여유가 없을 때 먹는 것이니, 생각 역시 우리에게 여유가 없어서 그렇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진치충인거 아니죵~에서 진지충을 모면했습니다ㅋ

'그게 먹고 싶었던 거야?' 하고 나의 다음 말을 기다려 주는 사람. 내일 눈 뜨면 제일 먼저 쏘울메이트님이 쓰신 이 말을 떠올리고 하루를 보내볼게요. 감사합니다. :-)

그런 사람을 가졌나요ㅎ 그런 사람이 라운디님 주변에 계시길 바랍니다^^ 즐건 토욜 되세요!!

무엇보다도 집에 우동 컵라면이 있었다니 부럽습니다. :)

ㅎ 튀김우동을 좋아합니다. 세일하길래 한 묶음 사놨네요.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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