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백에 대한 생각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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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설명이 없는 장면들이 좋다. 늘어지는 설명을 들으면 창작자가 만들어 낸 세상에서 인물이 자연스럽게 녹아드는게 아니라, 인물이 작품 밖으로 나와서 수용자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와 다른 생각을 가진 수용자에게 원하는 바를 쉽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건 아니다. 하지만 그건 비록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제각각 고유한 수용능력을 가진 수용자들을 무시하는 행위, 내지는 타협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을 갖고 있어, 나는 독백은커녕 대사 한 줄 없이도 인물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는 장면을 만날 때는 경외감을 느낀다. 멋진 장면을 보았다는 감동과, 나는 그런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없을거라는 자괴감이 함께 다가온다.

최근에는 정신적으로 이상이 있는 인물이 자신의 문제를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하다가도 반복되는 괴로움 속에서 무너지고, 결국에는 스스로 목숨을 끊지만 자신이 정신적 문제를 이겨내지 못 하고 목숨을 끊는 사람은 아니어야 하기에 자살이 아닌 사고사로 위장하는 장면을 대사 한 줄 없이 표현한 장면을 보았다. 이 작품에서는 사건의 순간 뿐 아니라, 사건의 전후에도 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지 않았기에 내 해석이 창작자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창작자의 목표가 생동감 있는 현실적인 인간이라면 해석이 제각각인게 자연스럽다. 현실이 그렇지 않은가?

반대로 독백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가까운 사람에게도 쉽게 꺼내놓지 않는 삶의 철학을 갖고 있다. 아무리 행동으로 나타내려고 해도 도저히 드러날 수 없는 그런 마음 속 깊숙한 곳에 머무는 철학이 있다. 이 경우에는 작품 속 인물 간의 대화에서 드러내는게 어색하기도 하다. 인물과 인물의 대화가 아니라, 창작자가 나에게 인물의 생각을 직접 설명하는 것 같은 기분도 느낀다. 그래서 꼭 인물의 철학을 밝혀야 한다면 독백이 적합하다. 혹은 간접적으로 수용자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적절한 상황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처음에 인물이 작품 밖으로 나와서 수용자와 대화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싫다고 했지만, 역으로 그 효과를 노리고 독백을 넣기도 한다. 수용자를 자유롭게 작품 밖에서 감상하도록 두는게 아니라 수용자를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수용자를 가르치려 들지는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물론 이렇게 간단히 창작물 속에서 독백이 좋다, 나쁘다를 가릴 수 있는건 아니다. 평소에도 대화 상대를 가르치려고 하는 인물이라면 수용자에게 가르치듯 말을 걸어도 이상하지 않고, 원래도 속에다 품어야 할 혼잣말을 구절구절 늘어놓는 인물이 혼잣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결국 다 부질 없는 이야기다. 그냥 잘 써야 한다. 잘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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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잘 쓰고 싶은 사람 여기 한 명 더 있습니다. ^^

자막 없이 미드나 영화보면 설명이 필요없는 장면!!!
하하. 영어에 까막눈이라 ㅋㅋ

공감합니다. 덩케르크처럼 상황의 연출로 충분히 감동을 전하고 관객에게 각자의 여지를 주는 작품이 좋습니다. “너는 지금 즙을 짜야해”라는 식의 독백에 준하는 연출로 관객의 고유한 수용능력을 무시하는 작품은 개인적으로 별로입니다.

부산행이 생각납니다. 충분히 과도한 연출 없이 배우의 표정만으로도 진한 감정이 충분히 전달되었는데 아쉽더라구요.

영화에 한해서 말한다면 저는 영화란 그 종류가 무엇이 됐든 이미지로 무엇인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읽으니 그런 점에서 '얼굴에서도 행간을 읽을 수 있다'는 발라즈의 말도 생각나는 군요.

'정신적 문제로 자살한다는 오해를 벗기 위해 자살을 유예한다'는 부분을 읽으니 장강명 소설가의 "표백"도 떠오릅니다.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헬조선' 속에서 주인공들이 나름의 성공을 이룬 뒤 자살을 택해 베르테르 효과를 이끌어낸다는 내용인데, 읽으면서 공감이랄까, 만약 자살을 하게 된다면 통계청에서 내놓는 자료의 '+1'은 되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글을 잘 쓴다는게 참 난제인 것 같습니다. 생각을 거침없이 꺼낼 수 있는 능력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한 것이라면, 상대의 수용력도 관통할 수 있는 것. 뛰어난 철학자가 작가이기도 했던게 우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잘쓴다는 것 정말 어렵습니다.

설명하지 않고, 그저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지. 저도 도달하고 싶습니다.^^

저도요ㅎ 매력적인글에 대한 정의는 다 다르겠지만...담담하면서도 매력적인 글 쓰고싶어요.

나이트런이 님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참 궁금하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들었네요;;;

이렇게 보면 창작물이라는게
참 어렵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듭니다;;;

웹툰은 챙겨보기가 힘들더라구요. 웹 연재에 맞게 스크롤도 너무 길고 컷과 컷 사이 거리도 너무 멀어서...

조금 다른 비유지만 쉰들러 리스트의 빨간 외투 소녀의 등장과 죽음 이 떠 오르는군요. 몰입이 중요한데,,그래서 영화는 혼자 보는 게 가장 좋다고 하나봅니다.

전 설명이 없으면 잘 이해를 못하는 사람이라서...
전 구구절절 설명해주는 걸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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