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출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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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찾아가는 무력감이 나에게도 찾아왔다. 떨쳐내고 싶어도 도저히 떨쳐낼 수 없게 만드는 무력감, 그 무력감은 나를 갉아먹는다. 내 활력을, 자신감을, 그리고는 지성까지도 갉아먹는다. 그리고 그 치명적인 무력감의 무서움은, 원인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원인을 찾을 수 없는건, 원래 무력감이란 그런 것이라서일지도, 아니면 그 무력감에 뚜렷한 원인이 있는게 아니라 병적인 무력감일지도, 아니면 내 본능이 내가 해결할 수 없는 무력감의 원인을 감추어 나를 보호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숨을 쉬는 소리만 들어도 내가 정상이 아니라는걸 알지만, 물어보아도 대답할 사람이 아니라는걸 아는 내 주변 사람들은 차마 나에게는 직접 묻지 못 하고 안부만 물어오곤 한다. 대답할 사람이 아닌게 아니라, 대답하고 싶어도 원인을 모르지만 말이다.

일상은 변했다. 깊은 밤에 카페에서 일출까지, 늦는 날은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시간을 보내곤 하던 일상은 사라졌다. 반복되지만 매일이 특별했던 하루하루가 아니라 한달 중 하루도 제대로 기억에 남지 않는 일상이 시작되었다. 일어나서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보냈다. 시간이 모든걸 해결한다는 말처럼, 단순히 시간을 흘려보내면 언젠가는 그 무력감이 사라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만이 있었다.

그렇게 몇달이 지나고 오랜만에 다시 카페에 앉아있다. 마지막으로 카페에 왔었던 계절에는 이 시간쯤 하늘이 밝아오기 시작했지만, 이 계절에는 어두울 뿐이다. 그 어두운 하늘을 보며 랩탑을 켰다. 놀랍게도 몇달을 가방에서 꺼내지조차 않았던 랩탑은 아무 문제 없이 켜졌다. 배터리를 잘 만들었나보다. 그리고 로그인에 2번이나 실패했다. 랩탑과 데스크탑의 비밀번호가 다른데, 몇달만에 랩탑을 켜니 익숙치 않아서 데스크탑의 비밀번호로 로그인을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로그인에 하고나니 바탕화면에 있는 파일 하나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파일은 몇달간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안겨준 글을 담고 있다. 6월에 쓰다가 포기한 글, 그 글을 다시 읽어보아도 특별한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나는 왜 그 글에 몇달간 메달렸으며, 그 글을 완성하지 못 한 것에 특별한 감정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데스크탑에도 같은 파일이 있으며, 데스크탑을 켤 때마다, 제목을 쳐다볼 때마다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다. 그리고 방금 그 글을 지웠다. 그 글이 왜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가져다 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감정에서 벗어나야 할 때이기 때문이다.

일탈이 길어지면 스스로에 대한 기대도 커지기 마련이다. 하루하루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며, 그 무의미한 시간을 보상할 수 있을 수준의 결과물을 내고 싶어진다. 하지만 정신이 무너진 나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다. 의미 없는 시간에 대한 보상을 얻고자 하는 내 생각은, 그 다음 날을 또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그 악순환에서 벗어나야 한다. 연결고리를 끊어야 한다. 무의미한 하루를 보내지 않거나, 무의미하게 흘러간 시간에 대한 보상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거나, 그 모든 시간을 보상할 수 있을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이루기 위해서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 다시 한걸음씩 나아가야 한다.

어느새 하늘이 밝아졌다. 구름이 잔뜩 껴서 마냥 밝지는 않지만, 구름에 가려져도 태양이 거깄다는건 알 수 있을 정도로 빛을 비추고 있다. 내 오늘도 그런 날이기를 바란다. 밝게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아직 내 안에 불이 남았음을 확인할 수 있는 그런 날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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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동안 글이 없으시기에 무슨 일이 있으셨나 궁금했습니다.

시간을 보내는 것이 혹은 보상이 무의미하건 유의미하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동안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자각만 놓지 않는다면 유의미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자각을 놓치게 되면 죽어있는 것과 다름이 없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죽은 이후에 자각을 정말 놓치고 있는지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기에 함부로 판단할 문제도 아니지요. 그리고 우리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사는 경우가 더 많지요. 목적이 이끄는 삶이건 번뇌가 이끄는 삶이건 살아서 숨쉬는 동안 항상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어떠한 목적을 달성을 했건 만족을 모른다면 영원히 허무함만 남게 되어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기도 하지요.

하루하루에 대한 자각이 희미했으니 그럼 저는 죽어있었던 것이나 다름이 없었나 봅니다. 이제는 살아가야죠. 기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불이 밝게 빛나는게 곧 보이실겁니다 !!

긴 터널을 지나시는 중인가보네요 ㅠㅠ
마지막 레퀴엠을 작곡하던 모짜르트 의 글을 읽는듯 했어요 때론 힘든 작품이 작가를 절망시키기도하는건 미술계서도 적지앓은 이야깃거리고요
감히 토달긴 두렵지만 이루지못한 . 아직 완성해본적 없는 그 작품의 기대와 중압감을 미래에 남겨놓은 한사람으로서 ㆍㆍ^^♡
법륜스님의 조언을 소개합니다
오늘 하루는

가볍게 사세요 다람쥐처럼
의미나 생각들ㅡ 그 목에두른 죽은개는 벗어버리시고

구름 위에 오늘도 태양이있 어 다행입니다

미루고 미루다 결국은 끊어버리고서야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네요.

작은 빛이 다시 밝혀졌다는 점이 반갑습니다!
카페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지시길, 회복하셔서 또다시 좋은 글 올려주시길 바랍니다~~!^^

요즘 읽고 있는 책에서는 하강나선상승나선으로 표현하더라구요.
몇달을 발목잡던 파일을 홀가분하게 지우셨으니, 하강나선의 종점을 찍고 상승나선으로 나아가는 길인가봅니다^^
오늘 하루도 건강하고 즐겁고 유쾌하게 보내시길 바랍니다.

화이팅 하세요 @kmlee님!

오랜만에 뵙는 것 같네요.
환절기 감기 조심하세요!

예. 오랜만이네요. 제이탑님도 건강 유의하세요!

오랫만입니다 ㅋ 이 글이 킴리님의 어느 단편 소설 속 일부 장면이 아닌가 싶습니다~

소설 속 장면이면 좋겠네요! ㅎㅎ 그 경험도 도움이 될거라 믿습니다.

한걸음 내딛으셨으니 그 다음 걸음은 좀 쉬울 거라 기대해 봅니다. 잘 돌아오셨어요

무기력하게 연속되는 날들의 고리를 스스로 끊어 내셔야...
자신의 무기력한 모습을 인지하려 들고 바꿔야겠단 생각이 들었다면
그 고리를 끊는 방법도 찾아 내실 수 있을거라 생각해요.^^

네. 특별한 방법은 없죠. 무기력한 모습을 바꾸고 싶다면 행동해야겠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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