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이야기 #2.인간의 의식

in #kr7 years ago

개인의 본질

지난 글에서 영혼이 개인의 본질을 나타내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이 아니라면 개인의 본질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타인의 인지

개인의 정체성에 타인의 인지는 큰 무게가 없다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개인은 항상 자신이 자기자신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난 글에서 예시로 든 피니어스 게이지의 사례를 생각해도 게이지는 전두엽을 다치고 성격이 완전히 변한 이후에도 자신의 의식은 연속적이라고 느꼈을테니까요. 따라서 타인의 인지를 토대로 개인의 본질을 찾아보기 위해 가상의 A씨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A씨는 사고로 다리를 잃었습니다. 편의를 위해 의족을 착용했지만, 당연하게도 주변 사람들은 A씨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A가 양다리, 양팔을 모두 잃고 장기도 손상되어 인공장기로 대체한다 하여도 마찬가지겠죠. A씨가 성형수술을 하여 얼굴이 변하고 헤어스타일을 바꿔도 여전하다는 점에서 외형은 본질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뇌의 경우는 어떨까요? 간질발작을 앓는 환자들은 대뇌피질의 일부를 절제하곤 합니다. 차이가 없겠죠? A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A가 사고로 머리를 다쳐서 수를 계산할 수 있는 능력만 잃었다고 가정합시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A의 머리에 일종의 계산기를 연결하여 연산을 보조하였는데, A는 다치기 이전보다 수를 계산하는 속도는 빨라졌지만 본질적으론 계산기를 이용하는 A과 크게 다른 존재라고 할 수 없는 듯 합니다. 이어서, A씨가 자주 다치는 것을 염려한 가족들은 A와 자신들의 뇌에 뇌파로 메세지를 보낼 수 있는 장치를 연결했습니다. 이 또한 본질적으로 스마트폰을 이용하는 A와 크게 다르지 않겠죠? 비록 속도가 조금 더 빠르겠지만요. 계속해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A의 뇌에 추가할 수 있는 기능은 늘어납니다. 300년 전만해도 인터넷과 같은 기술을 상상도 할 수 없었듯 현대를 사는 우리는 상상하기도 힘든 기술도 나타날 수 있겠죠?

따라서 A씨의 기능도 본질이라 할 수 있는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A씨의 성격이 주요할까요? A씨가 머리를 다쳐 기억을 모두 잃었고, 복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가족들에게 A씨는 A씨입니다. A씨가 망상장애에 시달려 자신이 A가 아닌 B라고 굳게 믿으며 당신이 A라는 주변사람들이 자신을 모함하는 것이라 믿는 경우는 어떨까요? 안타까워하겠지만 여전히 A의 주변사람들은 A씨를 A씨라고 생각하겠지요.

여기까지 볼 때, 개인의 육체, 정신 중 어떤 것도 타인의 인지를 바꾸진 못 했습니다. 그렇다면 둘 모두가 변할 땐 어떠할까요? 아주 지독한 범죄자가 A씨를 납치하고 전신성형을 통해 아무도 알아볼 수 없는 사람으로 바꿔놓았습니다. 그리고는 계속 세뇌를 하여 A씨의 기억과 정체성을 바꿔놓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다행히도 경찰이 A씨를 구출하였는데 유전자검사를 통해 A씨의 정체를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A씨를 가족에 품에 돌려보냈는데, 가족들은 처음에는 망가진 A씨를 부정했지만 당연히 원래의 A씨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만약 그게 불가능하다 하여도 새로운 A씨와의 삶에 적응하겠죠.

유전자를 조작할 수 있는 기술이 나타나도 마찬가지겠죠? 어떻게 변해버린 A씨라도 공증만 있다면 가족들은 A씨임을 믿을 것입니다. 경찰이 실수로 B씨를 A씨로 착각하고 가족의 품에 돌려보내도 가족들은 지극정성으로 B씨를 돌볼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인지, 타인의 인지 또한 개인의 본질과 관계 없다면 무엇이 중요할까요? 개인적으로는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혹은 다시 형이상적인 관념적 믿음이 중요하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영혼은 존재하지 않지만 자신이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 믿음은 자유롭다'하는 아이러니를 용서하시길.

유물론적 결정론

상술한 시각은 유물론에 따라 설명되었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기술이 발전되면서 정신은 신비로운 형이상적 작용이 아니라 뇌의 작용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개인의 인격은 뇌의 작용일 뿐이므로, 형이상적인 본질이 존재할 수 없다는 주장은 발전하여 결정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뇌의 작용은 유전과 양육에 의해 결정되지요. 어떠한 유전자와 양육을 받는가하는 문제 또한, 부모의 유전자와 양육에 의해 결정되며 계속 거슬러 올라갈 수 있겠지요. 이는 개인이 태어나기 전에 일어나는 일이며,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개인이 어떤 사람이 되어 어떤 선택을 하는가 또한 결국 결정되어 있는 일이라는 시각입니다.

이러한 사실에 허무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으면 우리가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매미는 짧은 생애동안 치열하게 울고 수개미는 교미 직후 죽거나 교미에 실패해도 죽지만 교미를 위해 치열하게 날아오릅니다. 이들의 삶이 결정되어있고 의식적이지 않은 작용으로 보인다하여 이들의 삶이 의미 없는 일이라 할 수 있을까요? '어차피 왜 살아?'라는 질문은 유물론적 결정론 하에서도 실언입니다. 결정되어 있는 영화 주인공의 행보를 흥미롭게 여기듯 우리 인생의 주인공인 우리의 인생도 흥미롭습니다. 만약 정해진 삶을 거부하기 위해 자살을 택해도, 결정론 하에서는 당신의 자살도 결정된 일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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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결정론에 굉장히 무게를 실어준 실험이 바로 리벳 실험입니다. 실험내용은 의사결정을 관장하는 뇌 부위의 신경세포의 활성을 관찰하고 피험자들이 결정을 내린 순간 행동을 하고 결정을 내린 순간을 자기보고하게 하는 것이었는데, 결과는 충격적이게도 피험자들이 결정을 내렸다고 보고한 순간보다 의사결정을 관장하는 뇌 부위의 활성화가 빨랐습니다. 이를 토대로 피험자들의 자기보고보다 빠르게 피험자가 내릴 결정을 예측한 실험도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실험들은 뇌의 직관이 의식보다 빠르게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죠.

물론 리벳 실험에도 다양한 비판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이 글은 결정론이 참인가, 거짓인가를 다루는 것이 아닌 결정론적 관점이 사실이라 한다면 어떠한가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품는 글이므로 결정론이 참이라는 가정 하에 계속해서 글을 이어가겠습니다.

결정론적 관점 하의 윤리

결정론을 토대로는 범죄 또한 개인의 의지가 아닌 필연일 뿐입니다(의지가 허상이므로). 사실 이러한 시각은 현대에도 어느정도 녹아 있습니다. 우선, 심신미약에 의한 감형, 무죄판결도 개인이 자기 자신을 잃은 상태에서 행한 범죄라는 점에서 행해지는 판결입니다. 이 경우, 심신미약의 원인에 따라 다르지만 이것이 뇌의 이상에 의한 것이라면 뇌의 이상을 본인이 택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므로 징역 대신 그러한 뇌의 이상을 정상화 하여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결정론에 따르면 모든 범죄가 이러한 참작의 여지가 있습니다. 폭력적인 성질을 가진 유전자, 바르지 못한 양육 등이 범죄성향을 낳을 것이고 이는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죠. 하지만 범죄행위는 타인의 자유를 해치며, 의지가 없다하여도 그러한 범죄성향은 교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단, 결정론이 받아들여진 사회에서 범죄자는 그저 흉악하고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안타까운 존재가 될 수 있겠죠. 따라서 '결정론이 사실이라면 범죄도 필연이니까 처벌해서는 안되나?'하는 질문 또한 의미가 없습니다. 결정론이 사실이더라도 여전히 범죄자는 교정의 대상이니까요.

잔혹한 행위가 폭력성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은 개인에게도 나타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험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실험들 또한 범죄자의 처벌보다 재사회화와 범죄예방이 더욱 중요함을 시사하는데, 아마 여러분들에게도 친숙할 실험들입니다. 결정론을 다루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이는 하나의 철학적 관점을 소개하는 것이므로 실험의 신뢰도 혹은 윤리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밀그램 실험입니다. 이는 윤리적인 사람도 명령에 따라 잔혹한 행위를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실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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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서 Student(이하 학생)는 배우가 연기했습니다. Teacher(이하 선생)은 피험자였으며 선생은 버튼을 통해 학생에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었는데 선생에게는 전압을 높힐 수 있는 장치도 주어졌습니다. 실험자는 선생이 학생에게 문제를 내고 문제가 틀리면 전기충격을 가하도록 지시합니다. 실험자는 흰색 가운을 입고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며, 계속해서 전압을 올리도록 요구하는데 피실험자의 65%가 최대치인 450V까지 전압을 올렸습니다. 이러한 밀그램 실험은 권위 있는 사람의 지시에, 개인의 윤리와는 무관한 잔혹한 행위를 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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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짐바르도의 스탠포드 죄수 실험은 더욱 비참한 실험입니다. 지원자 중 무작위로 교도관과 죄수를 나누어 그들의 변화를 시켜보는 실험인데, 죄수에 대한 물리적 폭력은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도관들은 굉장히 권위적으로 행동하며 죄수들을 압박하였습니다. 죄수들 또한 빠른 속도로 수동적으로 변하며, 일당을 받으며 실험에 참가하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일당을 포기할 뿐 아니라 벌금을 물면서까지 가성방에 대한 의지를 표현했습니다. 결국 이 실험은 당초 계획된 2주에서 훨씬 못 미치는 기간만 지속되었고, 피험자들은 오래토록 이 실험의 후유증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러한 실험들이 시사하는 사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범죄행위가 실제 개인의 평소품성과 많이 다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여기서 한술 더 떠, 결정론에 따른다면 개인의 평소품성 또한 개인의 선택과 의지가 아니죠.

그렇다면 의식은 왜 존재하는가?

이는 아주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결정론자들도 실증적으로 혹은 관념적으로도 이를 완벽하게 해결하지는 못 했습니다. 극단적인 결정론자들은 이러한 의식은 그저 허상일 뿐이라고 여기기도 하지요.

복잡한 과제를 받아들이기 위해 존재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리벳 실험에서 제시한 것처럼 단순한 과제는 의식 없이도 작동하지만, 더욱 복잡한 과제는 의식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한번 키보드로 문장을 입력하는 과정을 볼까요? 처음 키보드를 사용하는 법을 익힐 땐, 매번 글자열을 확인해야했습니다. 매번 확인하고도 손가락을 정확하게 움직이는 일이 쉽지 않아, 오타도 잦고 속도도 느리지요. 하지만 점점 이는 의식을 떠나서 작용가능하게 됩니다. 가령, 저는 이제 1분에 오타 없이 키보드의 글쇠를 1000번 가량 누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손가락을 직접 움직이지 않고 어느 손가락을 이용해야하는지 대답해보라면 아주 단순한 문장조차 쉽게 대답할 수 없지요. 이처럼 처음에 익숙하지 않은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의식이 필요하지만, 점차 과제에 익숙해짐에 따라 의식이 필요 없어진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미친듯이 문장을 써내려갈 땐 문장이 의식을 넘어선 속도로 나오고 있다는 생각도 하거든요.

또 하나의 새로운 관점을 소개하기에 앞서 맹점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맹점이란 양눈의 망막에 있는 구멍입니다. 오른쪽 눈을 감고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뒤, 눈높이에 물체를 두고 점차 오른쪽으로 옮기다보면 정면에서 약 20도 가량에 이르렀을 때 잠시 사라졌다 나타나는데 이 지점이 맹점입니다. 왼쪽 눈도 마찬가지로 왼쪽으로 20도 가량에서 맹점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맹점은 망막에 구멍이 뚫려있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그 구멍을 통해 시신경과 실핏줄이 망막을 뚫고 나와 망막의 내벽에 붙어있습니다. 이 때문에 망막엔 실핏줄의 상이 맺히게 되는데 이 점 때문에 안구는 끊임 없이 흔들리며 뇌는 이 영상에서 실핏줄을 제거합니다. 이러한 보정에 우리 뇌의 20%가 사용된다는데 맹점은 생각보다 큰 설계적 결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맹점이 나타난 이유는 척추동물의 안구가 투명한 피부 아래에 있던 빛에 민감한 세포로부터 발달했기 때문인데, 이러한 현상을 Historical Constraint(역사적 제약)이라고 부릅니다. 첫단추를 잘못 꿰었다고도 할 수 있겠죠.

우리 의식도 이러한 맹점과 비슷한 결과물일 수 있습니다. 정말로 필요해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에서의 불필요한 부산물인 것이지요. 이는 꽤 극단적인 가정이지만 흥미롭습니다.

맺으며

우리 인간은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의 존재유무, 자유의지의 존재유무와 상관 없이 소중히 여겨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형이상적 영혼이 존재한다면 영혼이 존재하는 개개인은 모두 소중하고, 영혼이 없다면 한번 뿐인 삶이기에 소중합니다. 자유의지가 있다면 개인의 자유의지로 인한 선택을 존중해야하고, 자유의지가 없다면 스스로가 선택하지 못한 삶을 사는 개인을 존중해야합니다. 제각각의 유전자를 지녔으며 제각각의 부모에게 제각각의 교육을 받는 모든 개개인에게는 우열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존엄성과 가치를 지닙니다.

다음 글에선 평등을 주제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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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2개로 나눠써야 할 분량이었는데 빨리 평등에 대해 다루고 싶다는 생각에 조금 급하게 글을 쓰게 되었네요. 원고에서 과감하게 많은 내용을 생략하면서 전개하다보니 호흡이 너무 급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1시에 시작한 글인데 마무리 하고 보니 8시네요. 초안이 있어도 아무래도 글을 쓰는건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여전히 급하게 써서 실수가 많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네요... 이 글은 저 혼자 쓰는 글이 아니라 여러분들의 의견도 소중합니다. 궁금한 점, 비판, 새로운 관점, 그저 글에서 느낀점, 어떤 것이라도 언제나 환영합니다.

그럼 긴 글 읽어주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글이 흥미로우셨다면 Follow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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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벳 실험부터 historical constraint 까지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Follow 하면서 계속 읽어야겠어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흥미로운 글 쓰도록 노력할게요.

'영혼은 존재하지 않지만 자신이 존재한다는 형이상학적 믿음은 자유롭다'
영혼이라고 믿어지는 것은 외부 자극에 대한 인지, 또 그에 대한 반응이 축적되어 생기는 것 아닐까요?

재미있는 글 감사 드립니다.

그러한 자극이 인격을 형성하는데 개인의 인격이 뇌손상에 의해 급격하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굉장한 아이러니를 가져다주죠.

육신이라는 것이 이렇게 망가지기 쉽다보니 불멸의 무언가를 추구하는건(심지어 명성과 같은 실체가 없는 관념적 대상이라도) 본능적인게 아닐까 싶습니다.

재밌게 읽어 주시고 좋은 의견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저는 그게 좀 당연하게 느껴집니다. 하드웨어(저장장치 또는 출력장치)가 망가질 경우 소프트웨어의 정상 작동을 기대하기 어려울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필멸자로서 불멸의 것을 구하기 때문에 종교가 생겨났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믿을 구석이 있어야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지 않습니까?
경찰이나, 군인이 자기를 희생할 수 있는 것은 '국가'라는 평상시엔 느끼기 힘든 공기 같은 존재를 믿고 지키기 위함이지요.
우리가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것도 무엇인가를 믿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상은 돈일 수도 있고, 존경스러운 상급자일 수도 있고요.

저도 그리 생각하여 본능이 아닐까 여겼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발견은 일상에서 시작된다고 하듯 당연시 여기는 일도 여러번 곱씹어 보는게 가치 있다 생각해 이야기 해보고 싶었습니다.

성곤님처럼 액티브한 독자분이 계시니 절로 신이 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처음 글을 썼을 땐 댓글이 0개라 굉장히 슬퍼서 댓글 하나하나가 정말로 큰 힘이 됩니다.

영화 Experiment도 이런류의 실험인가요?

스탠포드 죄수실험에서 모티브를 따온 영화에요.

아...그렇군요... 재미있게 봤고, 다소 충격적이었던 영화입니다. 특히 그 마지막 장면에서... 파리대왕하고도 조금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구요..~~

영화를 안 봐서 결말은 모르겠지만, 실제 실험 기록부터가 완전 스릴러에요.

맺음말이 너무 뜻깊어서 몇 번을 읽어도 좋네요. 외우고 싶을 정도입니다.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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