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eem essay @jjy의 샘이 깊은 물 - 초겨울의 론도(Rondo)

in #kr6 years ago

초겨울의 론도(Rondo) @jjy

매섭도록 추운 날 진분홍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림자는 대롱대롱 문에 매달린 듯 한참이나 유리창을 더듬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며칠 전에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내가 오만 원짜리를 내고 밥을 먹었는데 거스름돈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대의 말을 들을 생각은 없고 오직 당신 말만 되풀이 했다.
주인은 답답하기도 하고 화가 날 지경이었지만 때마침 점심시간이라
손님도 많고 작은 가게 안은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빠 싸울 시간도
없었다.

아무리 따지고 싸워도 치매증상이 있는 할머니는 한 번 인정한
사실을 바꾸려하지 않았다. 지난번에 요양보호사와 함께 찾아 오셨을
때 이미 주머니에 있는 돈을 확인 했으나 그 돈은 전부터 있는 돈이
라고 했고 달래던 요양보호사가 알겠다고 하며 모시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완강했다. 거기다 일은 의외의 방향으로 번져갔다.
거스름돈도 받아야 하고 오백만원이 든 통장도 받아야한다고 했다.
한겨울 가게 앞 차디찬 콘크리트에 주저앉아 누구를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오백만원이 든 통장과 도장을 어떤 사람이 잠깐만 보여 달라고
해서 잠시 보여주었더니 어딜 다녀온다고 하고 안 주었다고 하면서
기다린다고 했다.

가게에서는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
경찰에 신고할 일도 아니고 할머니를 그대로 내버려 두자니 추운
날씨에 감기라도 걸리시면 혼자 계신 할머니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요양보호사에게 들은 내용으로는 할머니 통장에 있던 돈은 얼마
전에 큰 사위가 와서 다 찾아가서 통장 잔고는 바닥이 나있다고
한다. 그래도 할머니는 그 통장에 오백만원이 있다고 굳게 믿으시며
그 남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할머니의 조카딸에게 전화를 해서 사정을 했더니
미안해하면서 오만 원을 돌려드리면 대신 갚겠다고 해서 그 말대로
하고 다음 날 조카딸은 미안하다고 하며 오만 원을 갚으려 찾아왔다.

치매 걸린 노인은 친 자식도 피하는데 한 치 건너 조카딸이 대신
갚겠다고 하는 마음씨가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 이다음에
할머니 돌아가시면 부조하는 셈치고 드렸으니 안 받겠다고 사양하는
것으로 일은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요양보호사가 없는 시간이나 주말을 틈타 그 가게
앞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통장을 가지고 간 남자를 기다린다고
하는데 아무리 달래도 할머니는 일어날 태세가 아니었다.

다시 조카딸에게 전화를 하고 조카딸이 멀리 사는 딸들에게 연락을
했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조카딸이 자신의 명의로
된 통장 중에 해지한 통장을 하나 드리면서 그 남자에게서 받았다고
거짓말을 둘러댔다.

할머니는 통장에 바늘구멍이 났다고 역정을 내고 조카딸은 은행 문
열면 통장 새로 만들어드린다고 하면서 모시고 갔다. 월요일이 되자
조카딸은 할머니 드실 밥과 몇 가지 반찬을 싸가지고 와서 아침을
드시게 하고 은행으로 모시고 갔다.

첫 번째 고객으로 할머니께 오만원이 든 통장을 만들어드렸다.
할머니는 그제야 마음이 놓이시는지 집을 향해 유모차를 밀고 가셨다.


이미지 출처: 티스토리

대문을 그려 주신 @cheongpyeongyull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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