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빗속에서 노래하다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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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화를 굉장히 좋아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영화 속 인물을 관찰하기를 좋아한다. 다시 말해 이입은 그렇게 잘 되지 않는다.

그런데 유독 이입이 매우 잘 되던 영화가 하나 기억에 남아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내가 그 영화를 볼 때 매우 어렸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그 영화가 전형적인 메타 영화이기 때문이다. 바로 수많은 이들이 본, Singin' in the Rain(사랑은 비를 타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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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줄거리는 유명한 한 배우가 영화를 촬영하는 와중에 일어난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다.

"메타"라는 접두사(prefix)는 식상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metaphysics)을 거론할 수 밖에 없는 그 어원을 떠나서, 현대 영어에서는 어느 시점에선가 자기 지시적(self-referential)이라는 뜻이 되어버렸다.

사실 자기 지시적이라는 표현도 다소 쓸데없이 현학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별 대단한 의미는 없다. 쉽게 말해서 한 작품이 자기 지시적인 작품, 또는 메타 작품이라면, 그 작품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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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in' in the Rain 영화 속에서는 영화가 촬영되고 있다. 로코코 시대로 추정되는 배경을 둔 뮤지컬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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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연 배우 돈의 상대역은 무성영화 시절부터 스타였던 리나라는 여배우이다. 돈은 스타병에 걸린 그녀가 피곤하게 느껴지는데, 설상가상으로 리나의 목소리와 말투는 조금도 아름답지 못하다.

돈과 리나는 무성 영화판에서는 그야말로 대스타였지만, 유성 영화로 가는 과도기에서 시험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무성에서 유성으로 영화의 기술과 트렌드가 옮겨가면서, 도태된 스타들이 많았다. 무성 영화를 즐겨보는 입장에서 영화사의 이 부분을 생각할 때, 그 격세지감에 따른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것만 같다. 어떤 이들은 계속해서 더 큰 스타가 되었고, 어떤 이들은 급속도로 몰락했다. 전자의 예시로는 그 유명한 그레타 가르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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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 영화 육체와 악마(Flesh and the Devil)의 한 장면

무성 영화에서 가르보는 항상 새하얗게 빛났다. 화면 장악력이 뛰어난 전형적인 배우의 얼굴로, 굉장히 차가우면서 강인한 느낌이 있었다.

유성 영화로 넘어가서 목소리와 어투가 공개된 후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대스타로 남았다. 마타 하리와 춘희를 비롯해서 배우라면 탐낼만한 역할들을 내리 맡았다. 유성 영화에서도 그녀는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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퀸 크리스티나의 한 장면. 몽상가들에서 에바 그린이 흉내를 내는 장면으로도 유명하다.

무성 영화를 볼 때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중성적인 것으로 드러난 가르보의 목소리는 얼굴에서 풍기는 강인한 캐릭터를 꼭 닮아 있었다. 게다가 첫 인상의 차가움이 무색할만큼 소탈했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웃음소리는 언제 어디서 떠올려도 또렷하게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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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성 영화의 대스타이자 그레타 가르보의 상대역, 심지어 약혼자였던 존 길버트는 정 반대의 길을 걸었다. 무성 영화에서 그간 보여주었던 이미지에 맞지 않는 목소리는 점점 초라한 배역으로 돌아왔고, 그레타 가르보에게 파혼을 당하고 술에 빠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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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우정에서 비롯된 배려로 가르보는 길버트를 퀸 크리스티나의 상대역으로 고집했지만, 그녀가 더욱 승승장구하게 된 반면 그의 처지는 바뀌지 않았다. 목소리가 원흉이었을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직도 많은 큰 배역을 소화할 수 있는 30대 중반의 나이에, 그는 심장 마비로 사망했다. 물론 존 길버트는 유성 영화로의 혁신 속에서 살아남지 못한 여러 대스타 중 불과 한 명이다.

유성은 물론이고 컬러가 일상적인 것이 된 시대에서, 영화 Singin' in the Rain은 그 시절 무성 스타들의 불안감을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에서 일차적으로, 이 영화는 영화에 관한 영화가 된다. 그리고 특별히 자기지시적이기도 하다. 배우에게서 기본적인 발성 외에 성적 매력, 인간적 매력을 가미하는 아름다운 목소리나 훌륭한 노래 실력까지 기대해야 하는가? 새로이 재정의된 배우란, 뒷골목 클럽에서 탭댄스(이전에는 캉캉)를 추던 엔터테이너를 화면에 띄운 것에 불과한가? 뮤지컬 영화가 대세이던 시절의 대히트작인 이 영화는 스스로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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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중에 돈은 연극 배우 캐시를 만난다. 셰익스피어와 입센의 작품을 무대에서 연기하고 싶어하는 캐시는 영화 자체에 대한 비판을 제기한다. "그게 예술인가요, 그게 연기인가요" 등의 날선, 근본적인 질문들. 리나를 싫어하면서도 스타병에 같이 걸려버렸었던 돈은 혼란에 빠진다. 로코코 배경으로 무려 뮤지컬 영화를 촬영하려는 돈의 혼란은 마치 첫 유성 영화 재즈싱어를 만든 이들이 해봤을법한 고민이다. 소리까지 가미되어 음악을 동원하는 영화, 적나라하게 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하게 되는 시점에서 그들이 가졌을 법한 생각들. 물론 주제로서의 영화 자체에 그치지 않고, Singin' in the Rain 같은 춤과 노래로 가득찬 유쾌한 영화가 스스로 던질법한 질문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이 영화는 자신에 관한 영화가 된다.

이것이 과연 예술이 맞는가?

돈은 캐시를 떠나서는 연기도 하기 싫어진다. 그가 생각해낸 묘안은 캐시를 대역으로 참여시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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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돈에 항상 쪼들렸을 것 같은 배우 지망생 캐시는 목소리 대역이 된다. 연극이야말로 진정한 예술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그녀가 영화에 참여하개 되기까지의 갈등은 그리 깊이 묘사되지는 않는다. 어쩌면 어디에선가 누군가는 계속 던지고 있을 질문들이 얽혀 있기 때문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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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의 역할은 결국 캐시의 목소리에 힘입어, 무성 영화에서처럼 아름답고 우아하게 된다. 기술로 인해 인간에게서 필요한 것만 취해서 기록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누군가의 얼굴과 몸매,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 요즘에 와서는 한 사람의 모든 것을 다 편집하고 변형시켜서 화면에 띄울 수 있다.

또한 이 영화 속에는 돈과 캐시의 로맨스가 있다. 캐시라는 여성은 남의 목소리 대역을 하면서, 실제로 사랑하게 된 남자의 상대역이 자신이 아닌 현실에 직면한다. 그녀와 돈의 관계는 연인이라고는 하지만 배우와 (이제는) 팬의 관계처럼 되어 버린다. 캐시는 영화배우를 경멸했었지만, 돈을 사랑하게 됐기 때문에 이제는 멀리서 그를 바라보아야 하는 순간만큼은 팬의 심정이 된다.

로코코 뮤지컬의 대표곡이자 캐시가 대역으로 불러야 하는 노래의 제목은 Would you?로, 그 가사는 그런 심경을 잘 그리고 있다. 또한 영화를 보고 그 안의 로맨스에 이입하는 관객의 입장을 대변해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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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녀를 안아주네요. 당신은 그렇게 해주실 건가요?
그녀의 매력을 얘기해주죠. 당신은 그렇게 해주실 건가요?
그들은 나와 당신처럼 그렇게 만났어요. 그저 친구처럼요.
하지만 스토리가 끝나기 전에...그는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키스하겠죠.
당신은 그렇게 하실 건가요?
만일 그 여자가 나였다면, 그렇게 하실 건가요?
그리고 감히 말할 수 있나요, 그들처럼 하자고.
나는 그럴 거에요. 당신은요?

이 시점에서 영화는 영화 바깥에서 영화를 들여다보고 있다. 수많은 영화들이 쏟아져나와서 로맨스를 외치며, 관객이 현실에서 유지하고 있는 로맨스를 미화시키거나, 실제보다 더 목마르게 만든다.

영화의 결말에서 캐시야말로 목소리를 갖춘 스타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돈과 캐시는 드디어 공인된 연인이 된다.

그들의 마지막 장면은 영화 속에서 현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영화 속의 영화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로코코 뮤지컬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영화 속의 영화의 제목은 Singin' in the Rain. 스타는 돈 그리고 신인 배우 캐시이다. 그들이 부르는 마지막 노래는 You Are My Lucky Star.

나의 행운의 별, 그리고/아니면 운 좋은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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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의 심정으로 좋아하는 배우를 보던 캐시의 입장에 자신도 모르게 이입하던 관객은 그 짧은 순간 동안 신데렐라처럼 느낀다. 로맨스에 별로 취미가 없는 관객의 입장에서도 혹할 수 있는 결말이다. 영화는 묻는 듯 하다. 당신도 이들처럼, 그러실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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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많은 갈등과 고민, 변화가 존재하는 영화군요. 미디어에서 많이 접했으면서도 본적이 없는데, 찾아서 보고싶은 생각이 드네요

노래와 춤은 훼이크에요! 근데 픽션의 매력은 그것이라고 생각해요. 어떤 의도가 있다 한들 다 잊어버리고 스토리만 봐도 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한다는 것...

좀 나갔지만 "시계태엽 오렌지"를 영화화했을 때 하필 Singin' in the Rain 주제곡을 범행 장면에 사용했던 것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Singin' in the Rain 제작 당시에, 사용해야 하는 곡들이 이미 있었다고 해요. 그렇다면 줄거리에 이런저런 장면을 넣어서 노래의 내용에다가 맞추었을텐데...시계 태엽 오렌지를 생각하면 반대로 그 노래를 끌어와서 전혀 맞지 않는 장면에 넣죠.

노래가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는 본 적이 없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네요^^; 말씀하신 내용을 보니 영화 '아티스트'가 외면적으로는 내러티브가 굉장히 유사해보여요. 사실은 완전히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긴 하지만요.
이 영화 한번 찾아봐야겠어요!! 감사해요 좋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아티스트는 이 영화에다가 스타의 탄생(정확한 한글 제목인지는 모르겠네요. 원제는 A Star is Born)을 더해서 줄거리를 짠 것 같아요. 그리고 선셋 대로의 여주인공도 왕년의 무성 영화 여배우로 굉장히 자부심을 갖고 있는 약간 어두운 역할인데 그것도 참고한 것 같아요.

그러고보니 혹시 제이미님 프로필에 선셋 대로가 그 선셋 대로에서 따오신거였나요? ㅎㅎㅎ

맞아요. 특별히 좋아하는 영화라서가 아니라(좋아는 하지만), 길 이름이 제목인 영화가 많지는 않아서요. ㅎㅎ

영화 '아티스트'를 떠오르게 하는 글이네요.

'사랑은 비를 타고'는 너무 유명하고,
어떤 특정 장면은 tv에 자주 나와서
이 영화를 봤는데 기억이 안나는 줄 았았어요.ㅎ
안 봤네요.ㅋㅋ
시간 내서 함 봐야겠어요. ^^

감사합니다.^^ 위에서도 말했듯이 노래와 춤은 어떻게 보면 훼이크에요. 많은 영화에서 이 영화에 대한 암시가 은연중에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영화에 관한 영화라 그런 것이겠죠.

옛날 영화 즐겨보시는군요
당시의 배경이나 생활상이 궁금해서 가끔 관심있게 보기는 하지만 굳이 찾아보는 편은 아니긴 한데, 사진상으로 그렇게 옛날 스럽지 않군요 ㅎㅎ

네, 저때의 테크니컬러 영화는 사실 그렇게 낯선 느낌은 아니에요. 지금도 뮤지컬로 계속 나오기도 하고, 의상의 경우도 클래식이란 이름으로 돌고 돌고...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난 포스팅 했으니. 리스팀 가요. 😊

웅 형형님 고맙습니다. ㅎㅎㅎ

짝짝짝!!! 클래식 스타일의 의상들이 정말 맘에드는군요!!!!
클래식!!!!! 짝짝짝!!!

이런...클래식 감지 봇이 출동하였군요.

안녕하세요! 클래식스타일을 사랑하는 WOOODY @jaeseokyu 입니다!^^
클래식 스타일의 복식을 보며 wooody님 께서 감탄하셨어요!!
바로 저! 클래식 스타일을 사랑하는 wooody가! @jamieinthedark (아 영어길다..) 님의
포스팅을 리스팀 하였습니다! 짝짝짝!

앗, 음...소모임 회장님이셨군요. 미x 님의 리스팀 정신 계승!

아 읽다보니 그레타 목소리 듣고 싶어지네요!!!! 소개해주신 영화도 한 번 보고 싶공 :)

오옷...한번 그런 생각이 드신 것만 해도 기쁩니다! ㅎㅎ영화 이야기는 또 쓰려구요!

음...저도 로맨스 영화나 뮤지컬을 썩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
캐시의 신데렐라스토리는 뭔가 감명깊네요 ㅎㅎㅎ
아니면 제이미님이 이입이 잘 되게 글을 잘 쓰신거일수도 ^-^ ㅋㅋㅋ
그리고 전 저 시대에 태어났어도 무성영화 유성영화 둘 다 안 됐을 태생이었네요 ^-^ ㅋㅋㅋ
(아 어느 시대에서든 영화계 자체에 데뷔를 못했겠군요 음..그렇네요..음...)

사실 누구에 이입했는지도 모르겠어요. 돈, 캐시, 이미 옛날 영화를 좋아했어서 그런지 생각나던 밀려난 배우들...메타 영화는 스토리를 일방적으로 알려주는게 아니라 영화가 영화 바깥으로 나와서 나랑 같이 봐주는 느낌이 드니까 이입이 된 영화였던 것 같아요.

(영화계 이야기는 무시)

와... 댓글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무시하시다니
천벌을 받으 실...아니 미파님으로부터 리스팀을 받으실겁니다!! 두둥!!ㅋㅋㅋ

장담할 수 없어요. 오이사랑 클럽에 가입했거든요^^

오잉??ㅋㅋㅋ 오이사랑클럽은 또 뭐임??ㅋㅋㅋ

우선 보팅해놓구 집가면 봐야겠다 ㅠㅠ

ㅎㅎ고마워요.

옛날 영화가 명작이 더 많은 거 같아요.
요즘 영화는 재밌게 봤어도 금방 잊어버리지만
고전 영화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게 꽤 많아요.
이 영화도 음악과 춤 등 너무 많은 기억이 남아있는 영화죠.
포스팅 재밌게 보고 갑니다.

그러게요. 순전히 재미로만 봐도 좋은 영화들이 옛날 영화 중에 많죠. 유럽 영화들까지 포함하면 너무 광범위하고 공부해야 보이는 것들이 많지만, 그냥 편하게 볼 수 있는영화 중 지금까지도 제일 재미있는 영화를 꼽으라면 제 경우엔 아라비아의 로렌스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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