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별을 쫓는 해바라기 23steemCreated with Sketch.

in #kr6 years ago

형은 허술한 건물의 지하실에 갇혀 있었다. 사실 갇혀 있다기보다는 잠시 칩거 중인 것처럼 편안한 모습이었다. 실내를 어슬렁거리던 형이 계단을 내려서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얻어맞아 얼굴이 몇 군데 멍이 든 것을 제외하고는 크게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았다.

"그 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너를 이리로 불러달라고 했어. 내 가슴 속 깊이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고 싶어서 너를 부른 거야. 이야기가 좀 길지도 모르지만, 가능한 군더더기는 생략하고 핵심적인 것만 얘기할게. 거기 앉아라."

형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나는 형이 가리키는 낡은 나무의자에 가서 앉았다. 의자에는 뿌옇게 먼지가 묻어 있었지만, 나는 먼지를 털어내지 않고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차가운 감촉이 엉덩이로부터 시작되어 전신으로 퍼져갔고, 나는 싸늘한 전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광태는 문 쪽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캔 맥주를 홀짝였고, 꽉 막힌 지하실을 뚫고 어디선가 차가운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그 바람을 기다렸다는 듯이 형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형의 음성이 나지막이 떨렸다.

어디서부터 시작을 할까? 내가 처음 아버지의 친구들, 아니, 아버지의 패거리들을 만나던 그때부터 시작을 하자. 네가 오기를 기다리며 많은 생각을 했지만, 생각만큼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아서 말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더라도 알아서 새겨듣기 바란다.

일곱 살 때쯤에 처음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그들의 술자리에 동석을 했지. 그들은 호기만만 했어. 그들이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어린 내게는 장밋빛 꿈이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벼락부자가 될 것처럼 떠들어 댔고, 하나 같이 잘 차려입은 그들을 보면서, 나는 동경심마저 느꼈었다. 게다가 나 보고 잘 생겼다느니, 똑똑해 보인다느니,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추켜세워 줄 때면, 나는 한껏 기분이 고조되곤 했었다.

그들은 어린 내게 있어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어. 내가 보는 앞에서 몇 다발씩 돈뭉치를 주고받을 때면, 특히 그 중 몇 장을 대수롭지 않게 집어 내 손에 쥐어 줄 때면, 그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했어.

“호구 하나 물었어.”

“내가 노리고 있었는데, 그 멍청이가 벌써 당했다네.”

“멍청하니까, 그렇지!”

뺏기기 전에 먼저 빼앗아야 돼. 아버지는 늘 내게 그렇게 되뇌곤 하셨지. 그래서 나는 장난처럼 친구 녀석들을 속여먹기 시작했고, 내 계획대로 들어맞을 때면 쾌재를 부르며 녀석들을 한껏 조롱했어. 그래. 그렇게 나의 일탈이 시작되었던 거야.

바늘도둑이 소도둑이 된다고 하던가? 나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했고, 남을 속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 다 내가 똑똑해서 그런 줄 알았지. 흰 천에 떨어진 먹물이 비비면 비빌수록 더욱 검게 번져나듯, 나 자신을 자꾸만 어둠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줄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거야.

어느 날인가, 네가 옆방에 세를 든 누나와 나의 관계를 알게 된 것을 눈치 챘어. 나중에는 어머니도 눈치를 채셨지만. 지금에야 하는 말이지만, 그 누나는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순결하거나 정숙하지 않았어. 술집에 나가는 여자들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나를 먼저 유혹한 것도 그 누나였다. 누나는 우리 집에서 쫓겨 난 뒤에도 내가 있던 독서실로 찾아와 나를 불러내기까지 했어.

너의 환상이 깨지는 것은 정말 안 된 일이지만 사실은 사실대로 알아야 하니까. 그때만 해도 나는 혈기왕성한 청년이었고, 새벽마다 불끈불끈 일어나는 성욕 때문에 견디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너라도 그런 경우라면 어쩔 수 없었을 거야. 하긴 이렇게 얘기하니, 구차한 변명처럼 들린다.

이제 정말 힘든 이야기를 해야겠군. 지금도 이름을 잊을 수가 없어. 준석이와 준희라고 했지? 지금도 나는 자주 그때의 꿈을 꾸곤 해. 억수같이 쏟아지는 장대비와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그리고 살 속까지 파고드는 매서운 추위. 준석이 발을 헛디뎌 실족을 하고...

그래. 준석이는 내가 갔을 때까지 살아 있었어. 하지만 곧 죽을 것 같았어. 머리는 깨져 있었고, 그 깨진 머리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왔어. 맥박도 아주 가늘게 뛰고, 심장은 멎어버린 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어. 숨도 쉬지 않는 것 같았어. 사방은 컴컴하고, 비가 얼마나 거세게 쏟아지던지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었어. 춥기는 어찌나 춥던지. 나는 그저 살고 싶었어. 준석이 그때까지 살아있었다고 해도 우리로서는 어쩔 수가 없었을 거야. 나는 정말 겁이 났어. 나중에 준석이를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다면 살 수도 있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정말 미칠 것 같더라.

준희의 경우는 내가 생각해 봐도 제 정신이 아니었어. 그때까지 나는 줄곧 내가 버린 준석에 대한 두려움에 젖어 있었던 거야. 물은 자꾸 불어나 높이 차오르고, 줄을 풀어버리지 않는다면 바위 위로 오를 수가 없을 만큼 급박한 상황이었어. 더 이상 견디기 어렵게 되자, 나도 겁에 질리기 시작했어. 준희는 결국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았지. 너희들이 급류에 휩쓸려 내려가자, 나도 뒤따라 뛰었어. 더 이상 뒤따를 수가 없게 되자, 마을로 달려가 도움을 청하고, 나는 기절했어.

정신을 차려보니, 너희들은 구조되어 병원으로 실려 갔더라. 병원에 허겁지겁 달려가 보니, 너는 무사하고 준희는 혼수상태였어. 준석이도 마을청년이 갔을 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내가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욕하고 질타할 것만 같더라. 그 길로 나는 학교와 집을 버리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어둠의 길로 다시 뛰어들었어.

하지만 마음속에는 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밤마다 가위에 눌려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나곤 했어. 그것을 잊기 위해 술과 노름과 여자에 빠져들었어. 그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도 많이 필요했지. 아는 게 도둑질이라고 사기를 치기 시작했고, 뱀의 혀로 계집애들을 유혹하고, 결국 그 여자들의 돈까지 갈취했어.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지.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식이었고, 아무런 희망도 없었고, 아무런 재미도 없었지. 차라리 교도소 안이 더 편안했어. 세상과 단절되는 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고, 또 어느 정도 죗값을 더는 느낌도 주었고.

그러면서 나는 내 자신을 합리화하며 스스로 운명론자가 되어 갔지. 이 모든 것들은 내 의지가 아니라, 내 의지도 통제할 수 없는 운명의 몫이다. 그러므로 나는 부끄러워하거나 자책할 필요가 없다. 그렇게 죽어야 하는 것도 준석의 운명이고, 평생을 정신병자로 살아야 하는 것도 준희의 타고난 팔자다. 나는 그렇게 내 스스로를 달래곤 했지. 나는 가혹한 운명의 희생자일 뿐이라고. 나는 모든 것에서부터 자유로워져야 하고, 그 어떤 것에도 억매일 필요가 없다고. 그렇지만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여전히 폭풍우가 치고, 너를 덮친 물살이 나를 삼켜버릴 듯이 넘실대고 있었어.

죄를 짓고 도주하고, 체포되어 교도소로 가는 그러한 나날이 계속되었지. 그러던 어느 산사에서 재우를 만났어. 너와 대학교도 같고 나이도 비슷해서 네 얘기를 했더니, 마침 너를 잘 알고 있더라. 한때 같은 서클에 있었다고 말하더군. 재우와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것을 배우기 시작했지. 그때부터 운명론자인 내가 서서히 개혁론자가 되어 갔어. 그것은 일생일대 변혁이었고, 내가 처음 맛본 희열의 극치였어.

그리고 재우가 나에게 노법사를 만나게 해 주었지. 노법사는 정말 아는 게 많은 사람이었어. 그가 내게 인식론이며, 불가지론, 유물론, 변증법, 범신론 등 다양한 지식을 알려줬어. 물론 그 엄청난 것을 일시에 다 습득하기에는 무리였지. 하지만 그의 이야기가 가리키는 구심점은 알 수가 있었지. 그가 말했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지금까지 소외되고 억눌린 자들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자고 했어. 그러면서 그가 나에게 준 임무는 부랑인과 불구자들, 그리고 사회빈민 계층을 모아 하나의 공동체를 만들라는 것이었어. 그래서 나는 그들 부랑자들과 가족들을 모아 합숙하게 하고, 그들이 모아들인 돈을 모두 저축했어. 회원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돈은 불어났고, 나는 그들이 벌어들인 돈과 전세나 월세 보증금을 뺀 돈, 포장마차 처분비 등을 모아 강원도 오지에 농장을 마련했어. 농장을 마련하던 날, 너무 기뻐서 우리는 한 덩어리로 엉켜 밤새도록 울었단다.

노법사와는 철저히 개인적인 대면을 피하며 인터넷 이메일을 통해서 연락을 취했다. 나는 그가 써주는 그대로 책을 만들고 설교를 하고 회원 수를 늘려갔지. 그런 일들은 아주 조용히 그리고 서서히 끈기 있게 진행시켰어. 나는 회원들이 깡패들에게 시달리지 않도록 주먹 쓰는 애들을 고용했고, 그들이 농장을 살 수 있는 돈을 저축한 거야. 이제 그들도 남들에게 질시나 손가락질을 받지 않고 스스로 일하며 먹고 살 수 있게 된 거야. 같이 일하고, 같이 먹고, 같이 자고, 농장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회원 수를 늘리고 농장을 키워 나가다 보면, 대단위 농장의 꿈을 이룰 수 있었는데...

그러나 사건의 발단은 역시 돈이었지. 저 지광태 씨의 여자가 해바라기 모임의 경리를 보았는데 조금씩 돈을 빼돌린 거야. 처음에는 쉽게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작은 액수였는데, 들키지 않자, 점점 큰돈을 빼내기 시작했어. 꼬리가 길면 밟히게 마련이지. 성급한 애들이 여자를 잡아 족쳤나 봐. 그 돈이 어떤 돈이야? 그건 우리의 목숨과도 다름없는 돈이었어. 증거가 명확한데도 여자가 계속 시치미를 떼며 도리어 날뛰었나 봐. 주먹 쓰는 애들은 정말 단순하거든. 고문을 한 거지. 그러면 다 불게 될 줄 믿었나 봐. 죽인다고 목에 줄을 걸고 위협해도 눈을 부릅뜨고 할퀴고 물어뜯더래. 그래서 목에 감은 줄을 힘껏 더 조였더니, 그만 죽고 만 거야. 나는 그들에게 자수할 것을 권했지. 잘못 하다가는 우리 모임이 위태롭게 될 수도 있었거든. 하지만 그들은 전과가 많아 형량이 가중될 것이 두려웠고, 내 말을 듣지 않고 그냥 뺑소니를 친 거야. 난들 어쩔 수 있나? 꼭꼭 숨어버린 놈들을 어디서 찾아? 어쨌든 내가 염려하던 대로 그것이 빌미가 되어 우리 해바라기 모임이 수사대상이 된 거야.

문제는 내가 노법사의 얼굴을 알고 있다는 점이야. 그는 외출하거나 사람을 만날 때도 변장을 해서 그의 실제 얼굴을 본 사람은 거의 없어. 나만이 그와 같이 숙식을 하며 학습을 받다보니, 우연히 노법사의 변장하지 않은 얼굴을 보게 된 거야. 내가 만약에 경찰에 출두하거나 잡히면 정보부로 넘겨질 것이고, 만약에 고문이라도 당한다면 노법사에 대해 다 실토하게 될지도 몰라. 그래서 농장에서 떨어진 곳에 숨어 지내고 있었던 거야.

물론 네 말뜻을 모르는 것은 아냐. 세상일이 늘 그렇듯, 내가 아무리 진실을 말하려고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의 의도에 따라 때로는 진실이 왜곡되기도 하잖아. 하지만 지금은 내 한 몸 보전을 위해서가 아니야. 만약 노법사가 체포되기라도 한다면 이제 서서히 갖추어지기 시작하는 조직이 와해되어 버리는 거야. 그건 많은 시간과 많은 노력을 들여 이루어놓은 공든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을 의미해.

이제 마지막으로 정말 하기 힘든 이야기를 해야겠구나.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필 네게 해야 한다는 게 정말 괴롭다. 하지만 이제는 해야 되겠지. 난숙에 대한 이야기를. 난숙이 나를 따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어쩌면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예감을 살짝 느꼈었다. 난숙은 너무도 매력적인 아가씨였고, 사실 나도 마음이 끌렸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너와 그런 사이였는지 몰랐다 하더라도, 나는 넘지 않아야 될 선을 넘고 말았다. 하지만 난숙은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다만 호기심 때문에 나를 가까이 해 본 것뿐이었다. 난숙이 사랑한 사람은 너였다. 너만이 그녀의 가슴속에 들어 있었어.

아무리 사과한다고 해도 결코 용서될 수 없는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네가 더 크게 가슴을 열어 그녀를 받아주길 바란다는 한 마디뿐이다. 너에게 죽어도 씻지 못할 잘못만 남기는 내 자신이 정말 한심스럽다. 이것으로 충분한 해명이나 변명이 되지 않겠지만, 난숙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접고 싶다.

그리고 너는 자꾸 왕국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왕국과는 달라. 하지만 네 말을 전적으로 틀리다고 반박할 수만은 없다. 어쩌면 소외된 자들의 왕국이라 불러도 괜찮겠지. 그러고 보니, 왕국이라는 말이 그리 거부감을 주는 것도 아니군. 그동안 너에게 못할 짓도 많이 하고, 제대로 형 노릇 한 번 못 해본 것 같다. 돌아가신 어머니께 효도 한 번 못했고. 지광태 씨한테 납치당하는 바람에 어머니 장례식에 참석도 못했지만, 내가 뜻을 이루는 것만이 불효를 씻는 길이라 믿는다. 어쨌든 우리 열심히 살아가자. 다시 만날 때까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 하며 살자.

Sort:  

Congratulations @hyenahamin! You have completed the following achievement on the Steem blockchain and have been rewarded with new badge(s) :

You received more than 500 upvotes. Your next target is to reach 1000 upvotes.

Click here to view your Board of Honor
If you no longer want to receive notifications, reply to this comment with the word STOP

Do not miss the last post from @steemitboard:

Meet the Steemians Contest - The results, the winners and the prizes
Meet the Steemians Contest - Special attendees revealed
Meet the Steemians Contest - Intermediate results

Support SteemitBoard's project! Vote for its witness and get one more award!

Coin Marketplace

STEEM 0.18
TRX 0.15
JST 0.031
BTC 60970.88
ETH 2634.17
USDT 1.00
SBD 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