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서독

in #kr3 years ago (edited)

대낮의 열기와는 전혀 다르다. 새벽 공기란

내가 어느 시절을 살고 있는지 헷갈릴 때가 많다. 여전히 한 두 사람, 많으면 대여섯을 떠올리며 일상을 지낸다. 닭갈비집 간판을 보면 떠오르는 아이, 아메리카노를 보면 생각나는 아이, 모텔 건물을 보면 기억나는 아이, 영화관에 앉으면 옆에 있는듯한 아이 전부 같은 날도 있고 각기 다른 날도 있다. 연애를 많이 했음이 자랑일 나이는 아주 오래 전에 지났다. 10년쯤 지났을까? 아니면 15년? 나는 정상이 아니다. 티를 내지 않지만 숨을 한 번 내쉴 때마다 한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누군가를 떠올린다. 광기나 집착이라면 내 속에서는 그 것이 맞다. 하지만 나는 그 누구에게도 이별 후에 다가서는 적이 없다. 사실 그런 나의 행동이 멋있다고 생각하여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절제의 극치로 이별을 완벽한 갈라짐과 떨어짐으로 유지하는 것이다.

그 사이 대여섯 중 한둘은 결혼을 하고 나는 그 아이들을 제외시키고 다시 대여섯을 채운다. 기간이 길거나 짧기는 했지만 모두 그 당시에는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내 마음에 비집고 들어올 아이는 꽤나 여유가 있게 많다. 그래도 두 자리가 훌쩍 넘지는 않는다. 연애를 많이 했다고 했지 가볍게 했다고 한 적은 없다. 내가 인간에게 싫어하는 측면 중 하나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사람의 경중조차 쉬이 판단하는 그 시선이다. 술집에서 술을 따르는 여자의 마음은 쉽게 가질 수 있을 듯 한가? 줘도 안 먹는다는 천박한 말을 내뱉으며 줄 사람의 의사는 전혀 반영하지 않은 일방적이고 우스운 거절의사 표시는 웃기지도 않다. 너는 그 어떤 허름한 술집에 매일 출석도장을 찍고 모든 열성을 기울여도 작부를 꼬실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사람의 진심은 똑같이 무겁다. 1년에 한 사람을 사귀는 사람의 진심은 무겁고 1년에 열 사람을 만나는 사람의 진심은 가벼워 보이겠지만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개중에 정말 가벼운 이도 있겠지만 나는 가볍지 않고 가벼운 사람을 만난 적도 없다.

이터널 선샤인을 마음에 품지만 사랑 영화는 역시 클로져라고 생각한다. 화양연화나 동사서독이 마음에 들지만 사랑의 민낯은 패왕별희에 나온다고 여긴다. 현실은 사랑에게 장해(障害)일 뿐이다.

동사서독

구양봉은 살인청부 중개인이다. 사막 한 가운데 그의 거처가 있다. (왠지 바그다드 카페가 생각난다) 그는 천하제일검객이 되려고 집을 떠났지만 돌아와보니 사랑하던 이가 형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타산을 떠나 사막에 정착했다.

황약사는 구양봉이 사랑하던 여자를 짝사랑한다. 동시에 절친한 친구의 부인과 정을 통하기도 했다. 모용연에게는 술김에 결혼을 약속하기도 한다. 취생몽사라는 술을 마시며 그 것이 기억을 모두 지워준다고 이야기 한다. 인간에게 번뇌가 많은 까닭은 기억력 때문이다.

홍칠은 구양봉과 다른 선택을 하고 사는 인물이다. 그래서 구양봉은 홍칠이 싫다. 구양봉은 몇 달을 거절하며 돈을 가져오라고 내쫓았지만 홍칠은 계란 하나에 한 여자의 복수를 이루어 준다. 홍칠은 그 대가로 손가락을 하나 잃었지만 개의치 않고 자신의 원래 모습을 찾았다고 만족해 한다. 구양봉은 그런 홍칠이 싫고 부럽다.

맹무살수의 아내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를 사랑한다. 그 둘이 정을 통했다는 사실을 알게된 날 맹무살수는 고향을 떠났다. 그는 서른이 되면 눈이 머는 병에 걸렸다. 올해 그는 서른이다. 고향에 피는 복사꽃을 보러 가야 하는데 노잣돈이 없어 마적단을 상대하는 일을 맡았다. 햇빛이 강렬해야만 시야가 열리는데 비가 오는 바람에 싸우다 죽고 말았다. 사실 그의 고향엔 복사꽃이 하나도 피지 않는다. 도화는 아내의 이름이다. 그녀가 날 위해 울어줄까? 도화는 맹무살수가 떠난 다음 날부터 매일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서 그만을 기다렸다.

기억은 잊으려 할수록 선명해진다. 사막에 살지만 사막 너머가 궁금하지 않았다. 사랑을 버렸다고 생각했지만 모두 사랑만 하며 살아간다. 사막 너머가 궁금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 있든 똑같아서이다. 사랑에 서툴어 잃고 나서도 사랑 외에는 그 무엇에서도 의미를 찾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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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이 빠르면 핏소리가 맑다더니 그 소리를 내 몸에서 듣게 될 줄이야......
명작이죠 동사서독!! 다시보고 싶네요
뭔가 좀 몽환적이고 짠한 영화였죠

역시 아시는군요..! 참 거듭 볼수록 느낌이 깊어지는 영화들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저는 김용의 무협지들도 매우 좋아해서..동사서독에 더 애착이 갑니다! ㅋㅋ)

아... 건조했던 가슴에 단비가 내려 젖어들어가는 느낌의 글 잘 읽었습니다.

억..저와 감성을 공유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제가 글을 쓸 수 있는 크나큰 동기입니다 ^^

김용의 우수함은 아마 인간 감정의 불완전성을 '무협'지에 녹여낸 로맨티스트 여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그의 소설은 무협지로서도 재미있지만, 인간사를 담고 있어 더 재미있었던 것 같네요 ㅎ

맞습니다! 요즘 신조협려를 다시 보고 있습니다. 저는 영웅문 3부작 중 신조협려가 제일 재미 없었는데 많은 김용 매니아들이 3부작 중 신조협려를 가장 최고로 치는 이유가 궁금해서..다시 읽고 있습니다. 늘 진심으로 소통하시는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

신조협려 명작이죠 ^^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이 세편의 연작을 완성하고 나서 마치 비긴스 처럼 동사서독 즉 무림오절의 이야기를 썼다고 하던데, 동사서독의 이야기를 이미 알고 보면 신조협려가 좀 달라 보이게 될지도 모르죠 ㅎ

동사서독은 못봤어요. 이터널 선샤인을 가슴에 품으신다니, 역시 제가 애정하는 이웃입니다. ㅎㅎ 연애를 많이 해보신 분들은 저에게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연애를 1도 제대로 못해보고 결혼하고 애낳고 ㅎㅎ 가든님의 글을 읽을 때마다 저의 어린시절이 떠오릅니다. 동사서독을 볼까.. 이밤에 고민합니다. 흑흑. 왕가위와 장국영, 임청하,양조위의 조합이라니... 장만옥도 있네요.. 마지막 사진에서 양조위를보네요. 고마워요 정원씨 ㅎㅎ

누님, 요즘 잘 지내고 계십니까! 제가 예전처럼 댓글을 신나게 달지 않으면서..가장 마음에 남는 사람은 누님입니다. 저는 늘 누님의 안부를 살핍니다. 한 1-2주 전보다 지금은 기분이 더 나아 보이십니다. 제가 좋아하는 모든 영화는 누님도 좋아하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반대로 누님이 즐겨 읽으시는 작가와 책은 모두 읽어보려고 사 두었습니다. 누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저도 좋아하게 될 것 같아서요!

동사서독은 언제라도 꼭 보셔요. 저는 스팀잇에 쪽지 기능이 있으면 어떨까 싶은데 블록체인의 투명성에 위배되는 기능일까요? 댓글로만 소통하는 것이 좋은 일인지 어느 순간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하하

ㅎㅎ 웃음이 나는 댓글입니다. 항상 고마워요 가든님. 스팀잇 하며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진심으로

마음의 경중

그것에 대해 오만하게 심판한 적이 있지 않았나 돌아봅니다.
동사서독, 다시 봐야겠군요.
어릴 적 본 것과 다른 것이 보이겠죠.

동사서독은 확실히 그 때와 다른 것을 보여줄 듯 합니다. 영화 자체의 구성이 복잡하거나 복선이 많아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에 따라서 다르게 보이는 영화인 듯 하여.. 그렇습니다.

보셔도 좋고..보지 않으셔도..아주아주 나중에 보셔도 좋습니다. 다 좋습니다. 제 글을 연달아 읽어주신 듯 하여 너무 기쁩니다! ^^

동사서독... 여러번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기억이 잘 나질 않습니다.
그냥 막연히...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사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는지가 생각이 나내요. 난 사랑 앞에 저러지 말아야지 했었던... 기억뿐인데... 그 때 그 저러지 말아야지 했던게 무엇인지 기억이 안나내요.

제가 취생몽사를 마신건지...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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