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 훅 들어온 시절 이야기

in #kr6 years ago (edited)

보이스톡이 왔다. 한국 방문 중인 지인으로부터이다. 받지 않았다. 밀린 잠을 막 자려던 참이었기 때문이었다. 연이어 바로 톡이 왔다.

"000 알아요?"

그 이름을 듣자마자 나는 바로 보이스톡을 해보았다. 어디에서 들어본 이름이다 싶기도 하고, 연상되는 모습이 너무 어렴풋해서 확인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언니, 000 알아요?"

재차 물어오는 지인에게 글쎄, 음, 알것 같은데 확실치 않다라는 대답을 했다. 그녀는 000에게 내 이름을 이야기했고, 바로 '아무개 누나'라는 답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내 지인의 베프의 남편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의 대학 같은 학과 2년 후배이다. 세상 참 좁다.

겨우 사진을 얻어 보게 된 이후로 물밀듯이 밀려드는 추억속 장면들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 어쩜 좋아!

그 아이는, 아니 내 지인의 베프의 남편은 내가 1년의 휴학생활을 정리하고 돌아간 시절의 신입생이었다. 엊그제 이야기한 그 똑똑한 카사노바 친구와의 추억을 회상한지 24시간도 안되어 같은 시기의 사람이 오늘의 나의 현실로 훅 들어왔다. 벌써 20년은 족히 된 이야기이다.

momory.jpg

후배는 늘 백팩을 메고 다녔고, 웃을 때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아주 통통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잘 웃기도 하였지만, 애교가 넘치던 친구였다. 너무 귀여워서 내가 볼따구를 자주 잡아당겼던 것 같다. 으이구 귀여워 이러면서. 그 귀여웠던 친구는 오늘의 사진속에도 웃고 있었고, 보조개가 들어갔고, 여전히 귀여웠다. 그리고 배가 볼록한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신입생 시절 이후에 기억이 없는 걸 보면 1학년 마치고 군대를 갔던 모양이다. 그 친구가 다시 복학했을 때에도 내가 학교에 남아 있는 걸 보며 엄청 반가워 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나는 군대를 다녀온 내 동기들과 같은 해에 졸업을 했기 때문에 내 기억속에는 너무나 많은 신입,복학생들이 있다. 위아래로 12년정도의 터울이 나는 동문들과 같이 학교를 다닌듯 하다.

내가 밥을 많이 사줬다고 했다고 한다. 내가 그럴 돈이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내가 늘 남자들하고만 다녔다고 한다. 과에 여학생이 별로 없는데다가 남자가 편했으니까. 내가 순수한 선배였다고 한다. 그 나이엔 누구나 다 순수하지 않았을까.

그 시절, 나는 내 모습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앨범에 꽂혀 있는 사진 몇장으로 추측해보건데, 조금은 화장을 하고 있었고 선머슴처럼 옷을 대충 입고 다녔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그 시절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난다. 그도 그럴것이 생활적으로 사상적으로 가장 고민이 컸던 시절이었기 때문이고, 평생 해야 할 고민중 절반은 그 시기에 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 학교로 돌아온 나는, 내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이미 이름 석자로 유명해져 있어서 말과 행동, 생활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과 뿐만 아니라, 내가 활동하던 동아리나 단체에서는 학교로 돌아온 나를 환영하는 몸짓을 서슴치 않았다. 여기저기 불려다니면서 나는 점점 말수를 줄여갔다. 결국 나는 도서관과, 군대를 면제받은 동기 몇몇과, 과학생회를 선택했다. 소수에 속하기 위해 사람들 만나는걸 조심스러워 했고, 술도 전혀 안 마셨고, 김광석 노래를 듣기 위해 혼자 어둑한 까페를 찾아가는 걸 좋아했고, 그리고 생애 첫 짝사랑을 시작했다.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힘들고 처참한 시절이었고, 의연하려 노력해도 부끄러웠던 시절이었다. 가까이 하면 비극이지만 돌아서서 보면 삶 자체는 여러 편의 희극이듯이 그저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었던 이쁜 추억들만큼은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한다. 물론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그들이 기억하는 나의 모습은 다르다는 것도 안다. 때론 그것을 확인하는 과정이 지금에 와서 힘들게 만들기도 한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오랜 해외생활로 옛인연들과 모두 연락이 닿지 않음을 감사하며 인연을 좇으려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오늘처럼 이렇게 갑자기 훅 들어온 경우에 당황스러움은 잠시 미뤄두고, 대범하고 자연스럽게 옛추억에 빠져보는 것도 좋은 것 같다.

그나저나 지금에라도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지금의 내 모습도 언젠간 추억이 될테니까. 언제 어디에서 툭 튀어나올지 모르는 인연이 될수도 있으니 지금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도 잘해줘야겠다. 스팀잇 이웃 중에서도 과거의 인연이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이것만큼은 혼자만의 착각이었으면 좋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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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참 좁기도 하다죠~
저도 어딘가에서 제 얘기를 알고 있고 하고 있을 사람이 있겠죠..?
그 누군가에겐 제가 좋은 인연이길 바라봅니다..

참 좁아요. 그래서 늘 행동을 조심해야 하나봐요. ㅋㅋㅋ

인연은 생각지고 않은 곳에서 훅치고 들어오더군료.
친구 결혼 후 집들이 갔다가 만난 신부 이모같은 여자가 집 사람 고등학교 때 선생님이었고 그 사람이 친구의 아내였다는 것...
부산에서 먼 삼천포 장례식장에 같은 초상집에서 만난 직장 동료가 사돈 사이였었다는 것...
저도 스팀잇에서 최대한 저를 숨기려 하지만 누군가는 나를 너무 잘 아는 지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답니다.

오호~ 저도 그런 경험 많아요. 초 4때 담임이 오빠 친구, 중 3때 담임이 오빠 친구 와이프, 직장 부장님이 오빠 친구 ㅋㅋ 조그만 동네도 아닌 서울에서 말이죠. ㅋㅋㅋㅋ

낭만 시리즈 해도 되겠네요.
재미난 글 잘 읽었습니다.ㅎㅎ

늘 재밌게 읽어줘서 감사합니다 ㅎㅎ

인연은 참 신비로운 것 같아요~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떻게 마주하게 될지
아무도 모르지요^^

그럼요~ 그래서 평소에 자기관리를 잘 해야하나봐요 ㅎㅎ

어디서 치고??들어올지 모르니
잘 살아야 겠다는 생각은 항상 하고 사는거 같아요..ㅎㅎㅎㅎㅎ

네. 맞아요! 언제 어떤 인연으로 또 만나게 될지 ㅎㅎ

세상은 참 좁고, 어디가서 죄 짓지 말고 살아야 합니다.
저도 얼마전 집 정리 중에 우연히 옛날 사진을 발견하곤 한동안 추억에 잠겨 있었네요.
그 시절 에빵이님의 모습은 어떠셨을지 참 궁금합니다 ^^

그 시절 갈매기 눈썹요 ㅋㅋㅋ 옆머리는 노랗게 하고, 숏팬츠를 입고 다닌적도 있어요. 우리 과가 보수적이라서 도저히 있을수 없다고 복학생들이 절 거부한적도 있답니다. ㅋㅋㅋㅋ

정말 어디서 어떻게 인연이 연결될지 모르겠습니다. 스팀잇에서도 어쩌면..

스팀잇에도 알고보면 초등 동창, 친구 남편 있을 것 같아요 ㅎㅎㅎ

지나가면 추억이 되지만 추억은 좋지않은 추억과 좋은추억, 그리고 다시는 하지말아야 할 추억이 있지요.

전 지나고 나면 다 아름다워지는 경향이... 물론 슬픈것도 후회되는 일도 있지만요 ㅋ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훅 들어오는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ㅋㅋ 언제 또 훅 들어올지 기대가 되네요 ㅋ

여섯 단계만 거치면 다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다면 저는 에빵님과는 아주 오래 전부터 잘 아는 사이?

그럴지도요! 호구조사 해볼까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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