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LSIK / ⟪금강경⟫ 이야기 #5 "보이지도 않는 복덕을 어디서" - 공덕 따위는 없다

in #kr7 years ago
지난번에 주요한 사구게는 모두 다 나왔다. 이제 뼈는 다 추렸으니까 나머지 디테일만 챙기면 된다. 지난번 까지의 내용이 그만큼 중심적인 내용이다.

“공덕에 대해 완전히 잊으면 진짜 공덕이고, 그래서 복을 받는다”

라고 분명히 해놓고 부처님은 이제

"공덕을 받지 않는다"

고 ‘도리도리’다. 이건 마치 “내가 언제 몇시 몇분에 그랬지?” 하는 격이다. 매번 딴소리다. 이런 대목에서 독자가 눈치채야 하는부분은 당신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계속 말을 번복하는 부처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충 끄덕이며 “그렇군”이란 자세가 아니라 약간은 눈쌀을 찌푸리며 의심스런 자세로 읽어나가야 당하지 않는다.

주어진 문장을 순종적 으로 해석하는 태도는 겸손하고 점잖을 수는 있어도 ⟪금강경⟫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자세는 아니다.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의심할 수 있기 때문에 생각과 지식정보들을 마치 혐오라도 하듯 했던 선종의 선사들 조차 이 ⟪금강경⟫을 중시했 고, 그것이 오늘날 한국의 불교도들에게 ⟪금강경⟫이 이토록 익숙하게 된 원인이기도 하다. 그러니 인상을 바짝 쓰고 의심스런 눈초리로 따져보자.

若菩薩 以滿恒河沙等 世界 七寶 布施
만약 보살이 갠지스강의 모래만큼이나 많은 세상에 그득한 일곱가지 보석으 로 보시하였다면?

그 공덕을 강조하기 위해 가정하여 들어가는 보시물품이 일단 천문학적이다. 역사적 사실은 고사하고 실제 이만큼 재물자체가 존재하기는, 아니 상상이라도 했던 사람들이 있었을까. ⟪금강경⟫은 이 엄청난 보석을 상정하면서 인도의 실질적인 장소 갠지스강의 모래를 비유로 든다.

갠지스는 인도 말로는 강가Gaṅga인데 서구식 표기로 갠지스Ganges가 익숙해졌다. 인도식 강가를 한자로 음차하면 항하恒河이다. 여기는 강이지만 모래사장이 있는데, 경전에 많이 나오는 구절이라서 대단히 친근감이 든다. 스님들은 인도순례를 가면 필름통에 모래를 담아와서 작은 청심환통에 나눠서 지인들에게 선물하고는 했는데, 그걸 받아 본 적이 있다. 잿빛에 밀가루만큼이나고운입자. 그러니 항하 모래수라면, 우리가 상상하는 모래알보다 그 수가 분명 더 많을 것이다.

보시의 양과 공덕의 양의 비교가 아니라 보시자의 마음자세가 역시 주제이다.

“이만큼 베풀었으니 그래도 최소한 이만 큼의 공덕이 있겠지”

란 상상은 ⟪금강경⟫에서는 취급되지 않는다. 그야말로

‘주고 욕먹는’

상황이다. 이렇게 엄청난 가정에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이보다 더 쎈 ‘진짜가 나타났다.’


若復有人 知一切法無我 得成於 忍 此菩薩 勝前菩薩 所得功德
"'모든 것에는 영원히 변치않는 어떤 실체가 없다는 진리’를 알게되고 그 경지에 간 사람이 있다면, 이 보살은 항하 모래수만큼의 세계에 그득한 일곱가지 보석으로 보시한 앞 사람의 공덕보다 더 훌륭합니다."


불교는 모든 것에 어떤 실체도 없다는 것을 체득하여 그 존재나 소유로부터 오는 괴로움을 내려놓는 것을 진리의 척도로 삼는다. 그것이 말하자면

‘영원히 항상 불변하는 것이 없음/시간적인 - 무상'
'현상의 모습 배후에 어떤 보이지 않는 실체가 없음/공간적인 물질, 생각 - 무아'

의 진리라고 하는데 이를 완전히 체득한 경지를 '무생법인'이라 고 한다. 여기서 ‘忍’은 ‘깨달은 이의 경지’를 의미한다.


비록 경전에 나오는, 책에 나오는 좋은 귀절에 불과한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에서 어느 순간 치닫는 욕심을 스스로 발견하고 어떤 부분을 딱! 내려놓았을 때 그 홀가분함과 자유로움을 느껴본 적이 있을것이다.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때 마음이 주는 그 역설적인 충만함이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다. 인생에서 그만큼의 체험보다 더 큰공덕이 사실 어디에 있겠는가.
만일 내려놓음으로서 충만해지는 그 순간을 느껴 본적이 없다면, 아직 제대로 된 복덕을 받아보지 못한 것이 맞다. 대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면서 성취감에서 기쁨을 누리지만 때로는 있는 것들 중에서 불필요한 ‘마음씀이’를 내다 버리면서 얻는 기쁨도 있다.

하긴 뼈와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도 다이어트를 해야하고 시켜야 하는 현대의 문화를 보면, 이미 내다버리면서 얻는 기쁨에 대해 현대인들은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대개는 '살을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이 없는 상태를 얻기 위한 것'임을 생각해보면, 그건 관계없는 것인지도.


以諸菩薩 不受福德故
이 모든 보살들은 복을 받지 않기 때문이오.

世尊 云 何菩薩 不受福德
세존이여, 왜 보살은 복을 받지 않는 것입니까

須菩提 菩薩 所作福德 不應貪著 是故 說 不受福德
수보리여, 보살은 복을 지으면서 [그 복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복을 받지 않는다고 한 것이오.


이제 '받는다/안 받는다'의 문제가 아니라 ‘공덕’이란 생각 자체를 내려놓아야 할 시점이다. 보살은 ‘공덕 따위’ 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다.그것이 보살의 복짓는 방식이다. 그래서 이렇게 통큰 스타일의 보살들을 마하살 mahasatta, 한문으로는 대사(大士, 위대한 사람)라고 번역한다.


좀 다른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보살은 원칙적(?)으로 복을 짓고 그 보상으로 내게 돌아온 공덕을 다시 중생에게 주게 되어있다. 거기까지 해야 그것이 복을 짓는 한 세트가 완전히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을 돌려보낸다' 하여 보살의 마지막 복짓기를 회향(回向)이라고 부른다. 모든 불교식 의례나 행사의 종료를 그렇게 부르는 것이 바로 그 이유다.

무엇인가 선행을 하거나 무엇인가를 베풀 때 우리는 막연한 기대감을 갖는다. 그것까지 갖지말라는 것은 좀 혹독해 보이지만, 누군가를 향한 선행의 리액션이 없을 때 우리가 그것에 대해 '서운'해 하고 '은혜나 감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 대상을 비난하는데까지 이르게되는것을 보면, 선행이나 베풂이 반드시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불자의 베풂의 방식은 그 마지막의 공덕까지도 포기해야 이루어진다고 지적한다. 보살은 물질적 베풂이나 선행조차도 결국 실질적인 어떤 것이 아니며 베풀고 나면 완전히 그 베풂에 대해서 잊어야 완성이란 것이니 이 이치를 분명히 깨달은 보살에게 더이상 공덕이란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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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ce_ [불식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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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bulsik님 안녕하세요! 개사원 입니다. 알흠다운 @sleepcat님 소개로 왔어요. 칭찬이 아주 자자 하시더라구요!! 짱재밌는 글 올려주신것 너무 감사해요. 작은 선물로 0.6 STEEM를 보내드립니다 ^^

항상 잘 읽고 있습니다
@칭찬해

이 귀한 스팀을... 감사드립니다. @sleepcat님^^

구독료 대신이라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bulsik님 공덕을 바라는게 문제가ㅜ아닐까 합니다.

^^ ㅎㅎ 저는 조금 먼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사실은 주위에 선행을 베풀만큼 시간이나 재화나 우리에게 여유가 많이 없는게 현실이니까요. 하지만 누군가가 선행을 베풀고 그것 때문에 갈등이 생긴다면, 문제가 맞습니다. @himapan님 구독에 감사드립니다.^^

@bulsik님 참! 부끄럽습니다! 참회합니다’

새해복많이주세요. ㅎ
제가 안받은것처럼생각할께요.
스팀으로부자되세요~~^

이미 드린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이미 받은 것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bulsik 님!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하수들은 머리로는 그렇지 않겠다고 생각만하고 막상은 기껏 얼마 내면서 아니면 기껏 조그마한 일 하면서
스멀 스멀 올라오는 뭔가를 바라는 이 마음은 어떻게 금강경에서 설하는것 처럼 바라지 않는 마음이 진정으로 생길까요? 아니면 그러한 마음은 중생의 자연적인 마음이라면 무슨 뜻으로 저렇게 설하셨을까요? 난 바라는게 없다라고 억지로 스스로 세뇌하면 없어지는 걸까요?

금강경이 말하는 철학은 철학이고, 우리 삶은 삶이니까요.^^ 그냥 금강경의 내용이 그렇단거지요. 원하고 바래도 경찰출동 안합니다. @gaeteul님 불식을 구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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