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뻘] 비자발적 자선사업의 역사
술 처먹고 잃어버린 자산이 억만금이다. 나는 술에 취해 휴대폰, 목도리 등을 거리에 흘렸고 술집에 두고 왔다. 누군가는 그것을 득해 유용하게 쓰고 있을 것이다. 가히 비자발적 자선사업가라 할 만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가장 최근에 분실한 걸출한 물건은 아이폰X다. 국내 발매 당일 구입했고, 구입한 지 35일 만에 잃어버렸다. 대한민국에서 아이폰X 분실 순서로는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자부한다.
아이폰X 분실은 커다란 손실이었지만, 가장 큰 손실은 아니었다. 때는 2011년 8월 무더운 저녁이었다. 퇴근 무렵 스팀잇으로 치면 사내에서 플랑크톤급 존재였던 나(지금은 피라미급은 된다)를 고래께서 호출하신다.
고래는 물으셨다. “야 너 저녁 약속 있냐.”
그때 나는 패기만만한 청춘이었다. “없습니다!”
약속이 있었어도 깼겠지만, 진짜로 없기도 했다.
“오늘 술상무 해라.”
“네”라고 대답하면서 모든 것이 잘못됐다.
고래는 내게 들고 가라며 술 한 병을 건넸다. 죠니워커 블루라벨이었다. 고래는 나를 한우집으로 인도하셨다. 쟈니블루와 한우라니. 주여.
속으로 “오 역시 비싼 건 좋군”이라면서 따라주는 대로 스트레이트 잔을 통째로 삼키거나, 위스키가 담긴 스트레이트 잔을 맥주가 찰랑거리는 잔에 퐁당 빠뜨려 꿀꺽꿀꺽 마셨다.
우리 측은 고래와 나 둘이었고, 상대측 역시 둘이었다. 넷이서 술을 부어라 마셨다. 쟈니블루는 금세 동이 난 것 같다. 왜 ‘같다’고 썼냐면, 기억이 안 나니까.
한참 술과 소고기를 먹는데 픽, 암전됐다.
팡, 잠깐 불이 켜졌다. 노래방이었다. 덩실덩실. 또 픽, 암전.
팡, 다시 불이 켜졌다. 회사 뒤 벤치였다. 나 홀로 앉아 있었다. 시계를 봤다. 새벽 3시였다.
그런데, 몸만 있었다. 가방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지갑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다. 몸만 있었다. 아 손목에 시계는 그대로 있었다.
내 가방은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불란서 A사의 한정판 토트백이었다. 거기에는 같은 브랜드의 지갑, 다이어리가 들어있었다. 내 전화기도 거기에 있었고, 미국 B사의 선글라스도 있었다. 순식간에 억만금이 없어진 것이다.
이튿날 가까스로 기억을 복기해 우리가 갔던 음식점과 노래방을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 짐작건대 벤치에 앉아 조는 내가 발 옆에 내려놓은 토트백을 누군가가 들고 사라졌을 것이다.
그것들은 더는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깨달았다. 이 세상에 내 것은 없다는 것을. 사람은 무엇인가를 완전하게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후로 술을 끊... 지는 못 했다. 사람은 안 변한다.
이 분실 사건을 계기로 나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게 됐다. 자세한 얘기는 생략한다...
사족
지금은 저렇게 폭음 안 합니다.(궁색)
훔.. 이름만 대면 알만하다는 것을 하나도 알 것 같지 않군요.
별 세계에 사시는 분들 같네요..
쟈니 블루는 알겠네요..
잃어버리는걸 극도로 싫어해서... 잃어버리면 한달은 잠을 못 자는 성격이에요. 제 물건 중 최고가는 스마트폰. ㅎㅎㅎ 그래서 폰은 24시간 몸에 지니고 다니죠. 아내분을 만난 뭔가를 제공한 분실사건이군요. ^^
옙 언젠가 이 사건을 계기로 어떻게 아내와 결혼하게 됐는지도 써보겠습니다. 스마트폰 잃어버리면 정말 황망하죠. 저도 그때...
ㅋㅋㅋㅋㅋ자세한얘기가듣고싶네요.ㅋㅋ
쉬잇 비밀입니다 ㅋㅋ
아니, 한참 재밌게 읽었는데 갑자기 생략이라뇨. ㅠㅠ 주말 드라마입니까아ㅡ 후속 기사를 강력히 요청드림다 -.- 그리고 "암전"을 사용한 센스는 정말 훔치고 싶네요. ㅎㅎㅎ 굿굿굿.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가 늘어지기 전에 맺는 것 또한 미덕이 아니겠사옵니까...
역시... 인생의 오판을 이렇게 공개적으로 반추하는 것은 힘겨운 일이실 터... 제 생각이 짧았사옵니다. 그냥 넣어두시옵소서. ㅠㅠ 행복하시길!!
그래서 저는 이제 거의 맥주 위주로만 마십니다. ㅎㅎ....
아아 아니됩니다. 맥주라고 방심하고 한 5000쯤 마셨다가는...
흠흠...
슬슬 자세한 이야기를 따로 풀어주시나요??
흐흐 음... 그것은 또한 너무 신변잡기스러운 얘기가 아닌가 싶기도 하면서 그렇다면 이 글 또한 신변잡기가 아니냐고 하시면 할 말은 없는데 또 영구박제되는 블록체인의 특성을 감한하면 아내와의 얘기를 아내의 동의 없이 푸는 게 괜찮은가 싶기도 하고 또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면서 혼란합니다.
ㅋㅋㅋ 저도 고민고민하다 쓰고 동의받았습니다. ㅎㅎㅎ
요즘 글을 쓰니 예전 감정도 새록새록 나고 좋더라구요.
영구 박제만 아니면 참 부담감이 좀 덜할텐데 말입니다.
저는 좀 병적으로 물건을 챙기는 편이라 뭔가 잃어버리는 일이 드문데 그럼에도 가끔 뭔가를 잃을때면 진짜 짜증짜증 이더라구요 ㅎㅎ 전문적인 비자발적 자선사업가의 포스는 뭔가 남다르네요 ㅎㅎ 다음 얘기도 넘 궁금합니다. 이런 지점에서 끊으시다니 ㄷㄷ
역시 최고는 휴대폰 분실인 듯 합니다. 스마트폰은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전문적 비자발적 자선사업가를 바란 적은 없으나 이렇게 돼 버렸습니다. 잠정 은퇴 했었는데 최근 아이폰 사태로 재등판...
끊을 때를 아는 모습 또한 아름답지 않습니까 ㅋㅋ
역시...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계시는군요 ㅋㅋㅋ 분실 사건을 계기로 결혼을 하셨다니!?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지마시고 다음 편으로 부탁드립니다! 얼른!
생략해버리고야 말겠습니다!(단호)
닉네임과 행동이 일치하시는군요 ㅋㅋㅋ 날카로운 단호함 무엇...
크크크 아닙니다. 이래놓고 또 어영부영 썰을 풀어놓을지도. 커밍쑨!
가방을 잃고 아내를 얻으셨으면 크게 얻으신 거 아닙니까.. 아닌가요.. ㅎㅎ
유구무언이자 노토멘트 하겠습니다...가 아니라 저는 행복합니다!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술 드시러 가실때는 중요한 물건은 집에 두시고 티셔츠 하나만 입고 가셔야 할듯요ㅋㅋㅋ 그리고 생략한 이야기는 유부남으로서 대충 어떤 이야기일지 그림이 그려집니다.. (으.. 오염된 내머리 ㅠㅠ)
한동안 안 잃어버렸는데 아이폰X 분실은 스스로도 너무 충격적이고 실망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늘 삼가고 조심해야겠습니다.
짧게 말씀드리면
당시 휴대폰을 분실하고 새 폰을 구입해 복원하면서, 끊겼던 아내와의 연락이 다시 닿았습니다. 그래서 결혼까지 하게 됐어요^^ 언제 기회가 되면 자세히 함 써보겠습니다.
엇 다른 썰이 있었군요. 머리속의 음란마귀를 지우겠습니다. 음화화. 다음편도 기대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