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개인의 삶과 음악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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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껏 비워놓은 일정이 무색해졌다. 예매했던 다섯 편의 영화를 다 보고선 남은 일정을 모두 취소했다.

몇 년 전 전주 국제 영화제에서 우연히 보게 된 피아니스트 세이무어의 뉴욕 소네트는 내 인생을 바꿔 놓았다. 그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삶과 음악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됐고, 오랫동안 그 둘을 통합시키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 영화를 계기로 거장들의 삶에 관심이 커졌다. 하루하고 반나절 동안 다섯 편의 영화를 보았다. 모두 거장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영화를 몰아봤다는 생각보다는 그들에게 단기간 특훈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만큼은 영화제가 아니라 음악 캠프에 온 기분이었다.

그들의 삶과 메세지를 다룬 영화를 통해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그들이 어떻게 거장이 되었는가였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어떻게 그들이 연습을 그렇게까지 많이 할 수 있었는지, 죽을 때까지 안주하지 않을 수 있었는지, 어떻게 수많은 유혹을 떨칠 수 있었는지였다.

나는 주변에서 뛰어난 연주자를 정말 많이 보았고, 그들 중엔 인격적으론 터무니없이 부족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인생은 엉망인데 연주를 어떻게 그렇게 잘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웠다. 나는 잘살고 싶었고, 그래서 어느 정도는 잘살아지고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음악을 못 했기 때문에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의문도 함께 들었다.

세이무어 번스타인을 알게 된 후로, 나는 음악보다는 삶에 더 방점을 두게 되었다. 그가 말했던 것은 그 둘의 적절한 조화,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일체감이었는데, 나는 내가 듣고 싶은 대로만 듣고, 생각하고 싶은 대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삶의 의미를 여러 곳에서 찾으려 했다. 일을 그만두고 책에 매달린 것도, 책 속엔 내가 원하는 답이 있지 않을까 하는 답답함 때문이었다. 이틀간 다섯 편의 영화를 보면서, 그 답은 스스로 피아노를 통해 찾아야 한다는 확신이 생겼다. 내 삶 저변에 깊게 남아있는 나쁜 습관들을 생각이 아닌 음악을 통해 바꿔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마지막 영화가 반쯤 남았을 때 말로 형용하기 힘든 여러 생각들이 하나로 몰려왔고, 나는 그 순간 영화관을 뛰쳐나가 당장 피아노를 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영화가 끝나자마자 예약해둔 숙소를 취소하고, 터미널로 와 가장 빠른 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고 있다.

어떻게든 오랜만에 찾아온 강렬한 열망을 놓치고 싶지 않아 애쓰는 걸 보면서 무사태평한 태도를 취했지만, 실은 절박했다는 걸 알게 됐다. 머리는 맑아지고, 기대로 마음은 두근거린다. 글을 쓰는 동안은 이제 다시 각성할 때라고 생각했지만, 글을 마칠 때가 되니 각성이 아닌 일생을 두고 즐길 수 있는 놀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글은 스스로 까먹지 않게 종이에 적어 매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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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일에 최선을 다해야겠죠...

최선을 다하는 게 가능한 건지 궁금합니다. 최선을 다했다고 느끼는 순간에도, 돌아보면 그래도 '할 만큼은 했다'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쩌면 그게 최선을 다한 걸지도 모르겠지만요.

응원합니다. 화이팅!!

ㅎㅎ 도리안님 오랜만에 뵈어요. 글로 소식 잘 접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얼마나 자극을 받으신건지 눈에 선하네요!! 그렇게 필 받은 상태로 또 어떤 곡을 만들어내셨을지도 기대돼요.
가끔 피아노 치고 싶을 때가 있는데, 밴드하면서 전자피아노를 팔고 66키보드로 바꾸는 바람에.. 클래식 곡을 칠 수가 없어요. 이제와서 다시 전자피아노로 바꾸자니 눈치가 보이고.. 😑

곡에 대한 영감이라기보다는 연습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느꼈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아요. 감정적으로 곡을 쓰게 될 때는 또 다른 느낌이 들거든요.

밴드에서 키보디스트로 활동중이시군요+_+ 가끔은 66건반이 좁게 느껴질 때가 더러 있지요! (과감하게 업라이트를 지르심은 어떨까요?)

친구들과 하던 직장인 밴드 그만둔지도 꽤 됐어요 :) 저도 가끔씩 막 연습하고 싶은 욕구가 생길때가 있는데 그 가끔을 위해 피아노를 사기에는 아무래도 눈치가 보여요. 게다가 언제일지 모르지만 이 불어난 짐을 싸서 한국으로 들어가야 할테니까요.

열망에 휩싸인 연주가 어떠셨을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연주후에 굉장히 시원하셨을거 같아요.~

돌아가서는 오랫동안 손을 풀고 연습하던 곡을 연습했습니다. 열망에 휩싸여서 후루룩~~ 연주가 되진 않고, 후루룩 연주하기 위해 열심히 정진하는 날을 보내고 있어요!

몰입의 삶과 균형있는 삶은 달라요. 흔히들 천재라고 부르는데 삶이 방탕하다거나 비도덕적인 사람들은 몰입에 있어서 큰 선물을 받은 사람이죠. 그렇지만 그런사람보다는 眞善美가 균형잡힌 사람이 더 아름답습니다. 갑자기 아마데우스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살리에르의모짜르트와의 추억과 회상, 중3때 이 영화 아주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납니다.

끊임없이 정진하는 것도 수련의 일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은 너무 부족한 게 많네요.

저도 중2 때 이 영화를 봤는데, 지금 다시 보게 된다면 그때와는 마음이 많이 다를 것 같네요. 왠지 살리에르조차 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헉 바로 올라오셔서 피아노를 치시다니...열정이..넘 부러워요..ㅎㅎ
정말 질릴 때까지 피아노 치시고...생각의 정리도 되셨길 바래요~~ ^^
뭔가 정말 하고 싶을 때가 있다는 것도 참 좋은 일인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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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영감을 가득 받은 나루님의 기운이 여기까지도 전해집니다..! 부산의 고은사진미술관에 산책을 갈 때면 항상 고무된 상태가 되어 집에 도착할 때까지 카메라를 내려 놓지 않았거든요 ㅎㅎㅎㅎㅎ

피아노도 카메라처럼 가지고 다닐 수 있을만큼 휴대 가능하다면, 나루님께 그런 영감이 온몸에 박힐 때마다 꺼내서 재빨리 칠 수 있을 텐데요!! ㅎㅎㅎ 그러나 피아노의 또 다른 매력은 인간의 존재를 다 덮을 만한 무게감에도 있을 것 같아요. :))

멋진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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