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짐으로 여기지 말기

in #kr6 years ago

나는 예전부터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싶으세요?'와 같은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나는 돌아가고 싶은 때가 없고, 그렇기에 돌아갈 수 있다 하더라도 어느 때로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돌아간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을뿐더러, 나는 지금이 가장 좋다)

그래서인지, 이상하리만큼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다. 가끔 떠오르는 사람과 아름다운 추억 몇 개를 가지곤 있지만, 특정 시기를 돌아보거나, 그때 내 모습을 떠올리며 자책하는 경우, 혹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그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어땠을까'와 같은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과거를 떠올리지 않는 것은 현재를 사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모든 과거를 접어둔 채, 앞으로만 나가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타인에게 받은 편지를 스캔해 편지 폴더에 넣어둔 후 진짜 편지는 버리기 시작했다. 편지 폴더를 열어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내가 편지를 스캔하는 것은 보관의 이유보다는, '타인의 마음을 버리는' 죄책감을 덜어주는 행위에 더 가까웠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번 영화제에서도 팜플렛 조차 펴보지 않았다. 어차피 홈페이지에 다 나와 있다는 게 이유였다. 영화제 티켓은 버리고 오려 했지만, 바로 버려지진 않았다. 아마도 몇 달 후 우연히 발견하고, 잠깐의 망설임 후 버리게 됐을 것이다. 그런 삶을 살았기에 '추억상자'를 열어 볼 일이 없었다.


대대적으로 짐을 줄이고 있다. 짐을 줄이기로 다짐한 순간부터, 최소한의 것으로만 생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의 해묵은 '추억상자'를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가지고 있던 물건을 꽤 많이 버린 후, 그 상자가 생각났다. 책상 아래 있는 상자를 꺼내 먼지를 털고, 몇 년 만에 열어보았다.


상자를 열어보니 상상하지도 못했던 오만가지 물건이 가득했다. 다 쓴 일기장, 기억도 나지 않는 누군가의 싸인, 가위로 잘린 페스티벌 팔찌들, 영화제 티켓과 팜플렛, 수많은 편지가 있었다. 그 안에서 낡은 연애편지 한 통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편지는 받았을 당시에도, 받은 후에도 몇 번씩 떠오르곤 했다. 하지만 그 존재를 서서히 잊어 가던 중이었는데, 낡은 종이 위에 볼펜으로 꾹꾹 눌러 적은 글을 마주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 편지가 문제였다. 그 편지만큼은 스캔할 수 없었다. 스캔을 해야겠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버려야 하는가?', '그대로 두어야 하는가?' 오로지 그 고민뿐이었다. 그 편지를 버리면 진정한 미니멀 라이프의 시작이고, 버리지 못하면 앞으로도 추억을 주렁주렁 달고 여기저기 떠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자를 종일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조금 전 고민 끝에 원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이런 상자 하나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꽉 차서, 손때가 묻어 여기저기 찢어진 상자를 보면서, 좀 더 튼튼한 상자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또 버리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짐을 줄여야 한다고 해도, '추억상자'를 버리는 일만큼은, 받은 편지를 스캔하는 짓만큼은 하지 말아야겠다. 새로운 상자를 사면, 아직 유효기간이 남아 버리지 못했던 편지들을 제일 먼저 넣어두어야겠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에서 찾은 연애편지


주변에 나를 가두거나, 제한하거나, 귀속시키거나, 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숫자로 대변할 수 있고, 문자로 표기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완벽하고, 절대적으로 보이지만 실은 상대적이고, 답이 없습니다.
엄밀히, 답을 내릴 수 없는 녀석들입니다.
나는 그리하여 글 쓰는 것을 멈추었습니다.
글은 그저 도구로써 사용될 뿐이었죠.

중요한 것은, 우리는 어떤 비슷한 물질로 이루어진 ‘생명체’,
‘생명체’라고 불리우는 존재이며, 엄청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공통점을 찾게 될 때 문자는 그것을 사랑이라 표기하기도 합니다.

나는 나의 생각을 언제나 완벽히 신뢰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완벽하게, 무엇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매우 잘하고 있습니다.
저는 상당히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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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잔뜩 놔두고 온 것들이 생각났어요. 그것들은, 물건이 아니라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실체화된 시간들.

물건에 담긴 시간들. 그것을 마주하려면 현재의 시간과 여유가 필요하더라고요. 지금을 내어 과거를 돌아보고, 그것을 쓰다듬는, 가끔은 그런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지금 채린님은 계신 곳에서 새로운 '실체화된 시간들'을 쌓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과거를 쓰다듬기 위해서 현재를 멈출 수 있는 여유, 정말 중요한 것 같아요ㅎㅎㅎㅎ 가끔 너무나 '실체화'되어서 무섭기도 하답니다ㅋㅋㅋ!!! :)
행복한 금요일 보내셔요 나루님 ㅎㅎㅎㅎ

너무 잘읽었습니다. 팔로우 하고가요 @ab7b13님 자주소통해요~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자주 봬요:) 반갑습니다.

과거의 추억은 누군가의 흔적이어서가 아니라, 나의 시간들이어서 쉽게 버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

앗! 듣고 보니 정말 맞는 말씀이에요. 저를 위주로 기억하게 되지요. 결국은 추억도 내가 지나온 시간들일 뿐이군요.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려 애써도, 결국 과거에 온통 매여있는 삶이네요.

저는 의식적으로 과거를 안 돌아보려 노력합니다. ㅜㅜ

이 글을 쓰면서 어쩌면 저도 의식적으로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난 과오를 돌이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요. 이제는 조금씩 돌아보면서 과거도 쓰다듬어주는 시간을 갖고 싶네요.

십수년 전에 남편이랑 주고받았던 연애편지가 아직도 집안 어딘가에 있어요. 진짜 가끔씩 제가 쓴 편지를 꺼내보게 되더라고요. 보낼땐 편지였는데 어차피 저에게 있으니 일기처럼 되어서 신기해요.

우왓 십수 년 전! 세월이 쌓여 더욱 단단해진 편지들이겠네요. 연인과 결혼하게 되면! 내가 쓴 편지도 꺼내 볼 수 있게 되는군요. 제가 썼던 편지를 다시 읽어 본 기억은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다시 보게 된다면 부끄러워서 몸을 베베 꼬게 될 것 같아요!

공감이 되는 좋은 글이네요.

누구에게나 '추억상자' 하나쯤은 있겠지요? 스미골님의 추억상자도 문득 궁금해집니다.

마지막 연애편지 맞나요?? 원래 연애편지라는게 이렇게 어려운건가요??
너무 철학적이셔요...
by효밥

그러게요. 너무 철학적인진 모르겠지만, 저는 받자마자 무척 감동했어요. 몇 번 꺼내 읽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도 좋네요. 막상 연애편지를 받아본 기억은 거의 없는데, 하나라도 남아있어 다행입니다.

어떤 추억은 버려질 때 더욱 깊은 추억이 되고,
또 어떤 추억은 간직할수록 빛이 발하기도 하죠 ^^
굳이 모든 추억을 버리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힘만 들 뿐이니까요 ^^

'버려질 때 더욱 깊은 추억'이 된다는 것은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어요. 버림으로 더 깊어지는 추억은 어떤 것일까요. 그런 추억 몇 개도 함께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모든 추억은 간직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마지막 부분,

연애편지라 하기에는 철학적인 분같습니다. 이런분들은 어쩌면 수행을 하시는게 맞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연애를 하더라도 뭔가 걸리거나 구애받는 삶을 피하려고 하지요. 그렇지 않다면 연애가 목적이 아니라 연애를 그저 경험하려는 분 같기도 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어디서 배낀 것이구요. 그런데 베낀 것이라고 하기에는 사심이 없어 보이내요. 어떤 분이었는지 참 궁금하군요.

아무튼 글이 참 좋네요.

비슷한 이유로 과거를 상자속에 담아두고 미니멀을 외치면서도. 미니멀을 실행하지 못하는 1인 입니다
제 속마음을 그대로 적어놓으셔서. 깜짝 놀랐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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