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 마무리

in #kr6 years ago (edited)

1

틈 없이 음식을 먹었다. 배가 불러 커피도 다 남겼다. 엄마와 아빠는 일찍 내려갔고, 내일 연습 때문에 나는 동생집으로 돌아왔다.

2

역시나, 이삿짐을 싸면서는 엄마에게 잔소리를 한 바가지 들었다. 골자는 왜 이렇게 사냐는 것이었는데, 당장 다음 주에 다시 올라올 기세라 겨우 동생이 나서서 말렸다. "엄마. 내가 이삿날 올게." 다행히 동생의 한 마디로 상황이 끝났다.

살림은 엉망이지만 짐은 많지 않아 정리가 금방 끝났다. 떠날 생각을 하니 괜히 마음이 시큰하다. 이곳이 살기는 참 좋았는데...

3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은 교통편이 좋기 때문이다. 체력이 없는 내게 '역세권'은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다. 지금 사는 곳은 걸어서 갈 수 있는 역이 두 개라 무척 편했다. 집이 역과 가깝다 보니 언제나 갈 수 있는 카페도 있었고, 뒤에는 산 같은 공원이 있어 산책도 곧잘 다닐 수 있었다.

4

새로 가는 집의 장점은 단 하나. 교통이 좋다는 것. 교통이 좋은 지금 집보다 더 교통이 좋다.

더 넓고, 월세가 싸고, 해가 잘 드는 집을 두고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그 집은 다 좋았지만, 역에서 20분 정도 걸어가야 했다. 역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도 없었다.

엄두가 나질 않았는데, 이사를 앞두곤 그 집이 자꾸 맴돈다. 그냥 운동을 시작하면 됐잖아?

5

침대를 버릴지 가져갈지를 아직 정하지 못했다. 새 집에 사일런트 업라이트 피아노를 하나 들일 생각이다. 그럼 책상 하나를 없애거나 침대를 없애야 할 것 같은데, 하는 건 없어도 책상이 두 개인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6

교통이 좋은 이 집을 계약하면서, 정말 열심히 살아(교통의 혜택을 최대한 누리면서) 다음 계약 땐 강원도 어드메로 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내가 열심히 살면 살수록 서울을 벗어나긴 힘들어지겠지.

7

요즘은 장소와 상관없이 돈을 벌 수 있는 사업을 구상 중이다. 말은 거창한데, 그냥 집에서 작업하는데 돈도 벌고 싶다는 이야기. 많이는 못 벌겠지만, 많이 벌어 많이 쓰느니 조금 벌고 조금 쓰면서 조용히 살고 싶은 생각이다.

8

불과 몇 주 전까지만 해도 내 삶에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이사였다. 이사를 마치면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기겠다는 생각에 '망해서 행복한 사람들'을 보러 가기로 미리 약속 해두었다.

10월까지 공연이 꽉 차게 되면서, 그 일정이 굉장한 무리가 돼버렸다. 이제 와 약속을 무를 수도 없고, 나도 좀 쉬고 싶기도 하고... 바쁜 시기에 무리해서 가는 여행은 부담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쉽게 포기가 안 된다. 무엇보다 나는 그들이 좀 보고 싶다.

9

_SAM9597.jpg

며칠 전부터 재작년 가을 사진을 꺼내 본다. 그때 아키타로 공연을 갔었다. 그때 찍은 사진을 보고 있으면, 아키타의 찬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오는 기분이다. 그때 함께 갔던 연주자들은 공연 다음 날 내려왔고, 나는 여유가 있어 며칠 더 머물다 왔다.

우연히 아키타 현립 미술관을 가게 됐고, 건축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됐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자연스레 건축가를 찾게 되었고, 그때부터 안도 다다오를 쫓아다니게 되었다.

일행을 떠나보낸 날 온종일 미술관에 앉아 바깥을 쳐다봤다. 아키타를 떠올리면 그때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조용하고 여유롭던 공간. 물에 닿자마자 사라지던 눈. 이유 없이 터진 울음.

시간을 내 같은 계절에 가고 싶지만, 선뜻 결정을 내릴 수 없다. 곧 '망해서 행복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가야 하고, 공연을 핑계 삼은 여행 일정도 몇 있다. 아키타행은 역시 사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거길 가서 딱히 뭘 할 것도 아니고... 물론 뭘 하기 위해 여행을 간 적은 없지만...

10

휴일을 마무리하면서, 다음 휴일을 구상한다. 이리저리 도망만 다니다 생을 마치는 건 아니겠지?

Sort:  

이렇게 여기저기 삶의 추억이 남겨지고, 고민하던 날들과 크고 작은 도전들이 쌓여가는. 그런 일기를 하나씩 여기 채우다보면 어느날 그리고 바라던 나날을 맞이하실거라 생각합니다. 항상 그런식이죠. 응원하고 싶어지는 캐릭터예요. 가자. 재즈마스터. ^^

이리저리 도망만 다니다 생을 마치는 건 아니겠지?

맞서지 못하고 도망가는게 무조건적으로 나쁘다고는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하나의 수단으로 활용할수 있다면 얼마든지 활용해야죠
단 그것이 목적이 되면 어떻까 싶기는 합니다.;;;

Coin Marketplace

STEEM 0.19
TRX 0.15
JST 0.029
BTC 62904.22
ETH 2571.38
USDT 1.00
SBD 2.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