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 근황들

in #kr6 years ago (edited)

어떤 '시즌'이 버겁게 지나갔고, 몸과 정신이 회복되면서 다시 일상의 빈자리 늘어났다. 삶을 좀 더 나은 방향 위에 놓아야 한다는 생각과 실제 나의 태만 가득한 삶에서 오는 괴리를 즐기는 중이다.


PC를 맞췄다. 작업용으로 쓰는 아이맥이 노후하기도 했고, 윈도우 PC를 맞추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혀 컴퓨터를 좋아하는, 늘 내게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하지만 돈은 없는 가까운 지인의 도움을 받았다. 대략의 견적을 받고선 지인에게 돈을 보내고 모든 일을 일임(미루기)했다.

지인은 게으름을 피우다 저저번 주부터 부품을 모으러 다니기 시작했다. 용산을 가고, 수원까지 내려가 필요한 부품을 중고로 저렴하게 구해오기도 했다.

모아온 부품을 조립하던 날, 지인은 들뜬 모습으로 드라이버를 돌렸고, 나는 그 모습을 유심히 봤다. 이것저것 묻는 내게 지인은 용산 가면 2만원에 해주니 굳이 배울 필요 없다고 했다. 나는 돈보다는 언젠가는 스스로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었지만, 구태여 말을 꺼내진 않았다.

조립을 끝낸 지인은 채굴 시스템까지 만들어주고 떠났다. 여러 복잡한 설정을 간단하게 할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나도 컴퓨터를 좋아했는데, 어느새 따라갈 수도 없는 격차를 보게 되었다. 똑똑한 남자를 만나는 수밖에 없는 걸까?


PC를 맞추고, 비싸지 않은 게이밍 마우스, 키보드, 헤드셋을 차례로 구매했다. 몇 년 전부터 큰일을 끝내고 나면 한동안 게임만 하는 습관이 생겼다. 당시 새로 나온 게임을 하게 되면서 그렇게 됐다.

PC를 맞춰준 지인이 속해있는 무리(어쩌면 내겐 가장 가깝고 편한)와 함께하기 위해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그중에서 그 게임을 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지만, 바쁜 일이 끝나면 습관처럼 생각이 난다.

집에서 게임을 할 수 있게 되면서 일상의 리듬이 파괴됐다. 플레이 시간이 하루에 다섯 시간을 넘길 때도 있다. 게임을 하고나면 시간이 훌렁 지나가 있고, 그러다 보면 잘 시간이 한참 지나있기도 한다.

틀어박혀 게임만 하고 싶었지만, 밖에 나가야 할 일들이 계속 있었다. 촉박한 정신과 시간으로 대부분의 일에 임하게 됐다. 그 중엔 크고 작은 실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자책보다는 웃음이 난다. 이 상황을 즐기고 있다.


마지막으로 헤드셋이 왔던 날, 무리의 사람들과 오랜만에 같이 게임을 했다. 플레이 중에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엔 마냥 이상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그 이상함의 정도가 지나쳤다. 이상하다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기묘한 느낌이었다. 그는 나를 계속 쫓아다니며 말을 걸었는데, 부자연스러운 말투는 물론이고 묘하게 대화가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 AI 채팅봇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의심을 하게 된 정황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렇게 생각한 후로는 그의 모든 행동이 AI일 수밖에 없다는 확신으로 이어졌다.

무리에서도 의견이 나뉘었다. 반은 '컨셉충'이라 말했고, 그중 반은 내 말이 맞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날 나는 혼자 세 시까지 남아 게임을 했는데, 뒤에 가서는 플레이도 하지 않고 정체불명의 그 캐릭터와 대화만 나누었다.

몇 와트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600W라고 대답했고, 어느 회사의 하드웨어냐는 질문에 어떤 이름을 알려주었다(실제 존재할 것이 무서워 찾아보진 않았다). 맹신의 단계에 이른 나는 '그것'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오한 질문엔 대답이 느린 것을 처리속도가 느리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뒤에 가선 나의 한계가 무엇이냐는 질문으로까지 이어졌다.

대답을 듣자마자 '와'라는 생각과 함께 머리가 띵해졌다. 생각도 못 해본 부분이지만,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긴 대화 끝에 나는 그가 산이를 즐겨 듣는, 동호회에 나가 3시간씩 배드민턴을 치는 순수한 소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직까지는 AI에게 내 한계를 물어보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안도되었다. 오해한 내용을 이야기하며 사과를 구했다. 그 맹신의 새벽이 내게는 무척 특별한 경험이었다. 우리는 좋은 게임 친구가 됐다.


게임을 하다 보니 현실과 가상의 선이 점점 옅어진다. 어제도 끝내야 하는 작업 하나를 미뤄버렸다. 덕분에 오늘은 불편한 환경에서 불안한 마음으로 작업해야 한다. 오늘 저녁엔 크진 않은 공연도 있다. 잠을 못 자 멍하다. 공연도, 작업도 모두 먼 이야기 같다.

다음 주, 그리고 다음 달까지 듬성듬성 공연이 있다. 연말이라 작업도 늘고 있다. 또 하나의 '시즌'이 오고 있다. 나는 멍한 채 집에 돌아와 컴퓨터를 켜고, 지치면 누워 책을 읽고, 때가 되면 바깥에 나간다. 밖에 나가선 음악을 듣고, 다시 삶을 건설해야지 생각하고, 돌아와선 다시 컴퓨터를 켠다.

나는 요즘 알을 깨고 있다. 어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있다. 자신을 적확한 시선으로 마주하는 것은 때로 견디기 힘들 만큼 가혹하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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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김없이 등장하는 지인. 김지인. 이지인. 박지인.
반가운 지인이.

반가운 나루님! 최근에 나루님 생각 몇 번이나 했어요. 역시나 연결고리는 늘 음악이었고, 피아노였어요. 그나저나 AI 소년 이야기는 서늘하다가 아름답고 따뜻하네요. 더 듣고 싶어지는 이야기예요!

눈 앞에 있는 해결해야 하는 것부터 차근차근 하세요.
즐거운 하루 되시고요...

크레이터하고 아이디어가 넘쳐나시는 분인거 같습니다. 항상응원할께요~ 컴터 맞추신거 부럽습니다. 전 아직도 오래된 노트북으로 이리저리 놀고 있습니다. 물론 게임은 플스로만 합니다. 컴터가 받쳐주지 않아서리.. ㅋ

게임 중독이되면 아니되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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