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 가는 길

in #kr6 years ago

자고 일어났더니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 URL만 있어 스팸인 줄 알았는데, 지인에게서 온 문자였다. 곡이 좋다거나, 안부를 묻는 말도 없이, 몇 주 만에 덜렁 유튜브 링크만 보내 보낸 그 마음이 궁금했다.

전송 시간이 새벽이던데 술을 먹고 보낸 걸까? 노래는 너무 좋지도 않고, 너무 나쁘지도 않았다. 가을에 듣기엔 적당히 좋은 것 같았다. 이런 것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문자를 보고 잠깐 설렜고, 아침 내내 기분이 좋았다.


나를 전부터 봐왔던 이웃이라면, 내가 너절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도 함께 알고 있을 텐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사랑을 느끼는 지점이 남들과는 다른 것 같다.

작은 키, 구멍 난 양말, 촌스러운 셔츠, 닳아빠진 신발, 가벼운 지갑, 커다란 상처

가만 보면 나는 '결핍'된 남자를 좋아하는 것 같다. 몇 개의 결핍은 그 결핍이 이유가 돼 싫어지지만, 만 개의 결핍을 가진 사람은, 혹은 너무 큰 하나의 결핍을 가진 사람은 그 결핍이 사랑의 계기가 된다(그래서 충족을 내세우는 이보다는, 결핍을 내보이는 사람에게 더 마음이 간다).

그런 탓에 나는 가끔 옆에 있는 너절한 남자를 보고 있으면 이게 연민인지 사랑인지 구분되지 않을 때도 많다. (연민과 사랑은 같은 선이려나)


오늘은 내내 그가 보낸 음악을 들을 생각이었는데, 한 곡만 듣다 보니 질린다. 오후엔 레슨을 받아야 하고, 그래서 레슨곡을 듣기 시작했다.

주말에 바빠서 연습을 못 했다. 레슨 때까지 벼락치기를 해야 한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반복해 듣던 그 곡을 바꾸기 싫었는데, 막상 레슨곡을 듣다 보니 그것도 그것대로 좋아 빨리 피아노를 치고 싶어진다.

연습실로 가는 버스 안에서, 음악도, 내가 좋아하는 남자들도 모두 오래오래 함께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일단 오늘 저녁까진 Autumn Leaves를 듣고, 집에 돌아갈 땐 이 곡을 다시 꺼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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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누구에게나 응당 있어야 할 부족함이 자기에겐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무언가 결핍된 사람에게 끌리는 건 아닐까요. 일기에도 공감이 가고 곡에도 공감이 가네요.

심쿵. 하셨군요☺️

이런 것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문자를 보고 잠깐 설렜고, 아침 내내 기분이 좋았다.

기분 좋아겠다. 부럽다. 이런 생각이 드네요. ㅋㅋ 이성과 감성이 충돌하였으나? 기분은 좋았다. 뭔가 해피앤딩인듯.

남자들도 그렇습니다.
연민인지 사랑인지 구분이 잘 안 가죠. ^^

  1. 고도의 심리전이면 어쩌죠 ㅋㅋㅋㅋ 너절한 게 아니라 실은 의도된 ㅋㅋㅋ 하긴 어느 쪽이든 심쿵했다는 게 중요할듯

  2. ab7b13님 글을 다 읽은 건 아니지만 어쩐지 너절한 남자에게 매력을 느낄 것 같다는 생각은 늘 들었었어요 너절하면서도 좋은 남자가 이 가을에 함께하셨으면

연습 끝나고 돌아가시는 길에 갑자기 또 연락이 온다면!

나루님은 사랑꾼이시군요^^

너절한 남자에 대한 애착.. 너무도 공감됩니다.....

저도 그런 감정을 느꼈습니다만 결혼은 현실이죠~
부디 결혼상대로는 그 것과 반대인 사람을 고르시길 바래요^^

너절한 남자에게, 아낌없이 주는 연애를 하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ㅎㅎ 제 지갑도 매우 가벼운데^^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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