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인듯 아닌듯

in #kr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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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하늘을 보면 아득합니다. 이런 좋은 계절에 하늘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 다행입니다.

바쁘다고 투덜댔지만, 막상 이곳에 오니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습니다. 하루종일 놀고먹다가 때 되면 공연하고, 공연 끝나고는 쉬거나 여럿이 모여 실없이 대화를 나눕니다.

이곳에선 밤이 금방 찾아옵니다. 이미 한 시간 전부터 어둑어둑해져 소리 하나 나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이 찾아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벌써 잠들었거나, 침실로 올라갔습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남아 컴퓨터를 켰다가, 짧게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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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묵는 숙소에는 키보드가 한 대 있습니다. 가와이의 옛날 모델인데, 적어도 20년은 지난 것 같은 오래된 키보드입니다. 스피커가 없어 소리는 나지 않는, 이제는 외형만 남아있는 키보드입니다.

오늘은 공연을 앞두고 이른 아침 공연 레파토리를 치며 손을 풀었습니다. 소리가 나지 않는 피아노를 연주한 것은 처음인데, 마치 소리가 나는 듯 익숙한 기분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래 연습한 곡들이라 손이, 혹은 귀가 외우고 있어 그랬겠지요.


무용 공연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무용 공연은 언제나 즉흥 연주로 첫 틀을 정하게 됩니다. 제가 정한 음악적 모티브만 생각하고,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며 연주를 구상합니다.

일반적이지 않은 연주가 나올 때도 있고, 진부하거나 아름다운 선율이 나올 때도 있습니다. 즉흥으로 나오는 연주, 곡의 느낌이 좋아 매일 조금씩 즉흥 연습을 따로 하고 있습니다(재즈에서 말하는 즉흥 연주Solo와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오늘 소리 없이 연주해보니, 즉흥 연주를 소리 없이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리가 없으면 더욱 연주에 집중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음을 마음의 귀로 더듬으며 진중하게 손을 옮기는... 생각보다 값진 작업이 될 것 같습니다.

풀잎을 보며 건반을 만지고, 그렇게 여는 아침이 소중했습니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올 수 있는 곳인데, 시간을 내기 힘들어 일 년 만에 찾게 되었습니다. 해에 한 번씩 오는 저를 기억하고 반갑게 맞아주는, 여전히 친절한 사람들을 보면 적어도 열흘 정도 시간을 내 이곳에서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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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야말로 '나무와 풀의 기운'을 받기에 적합한 곳입니다. 누군가에게 주고 온, 아니면 내게도 필요할 나무와 풀의 기운을 열심히 충전하고 있습니다. 부러 나가 숨을 쉬거나, 숙소의 창문을 살짝 열어두고 있습니다. 서울과는 정말로 공기부터 다릅니다.

수많은 나무가 있는데, 어떤 건 푸르고, 어떤 건 노랗고, 어떤 건 붉습니다. 나무들끼리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다정해집니다. 한참 가을을 즐겼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파란 잎들을 보면 완연한 가을은 오지 않은 것도 같아요.

고요하게 가라앉은 숲속에 있다 보면, 마음이 끝없이 차분해집니다. 여러 생각이 교차하고, 그러다 보면 돌아가서의 일들이 괜스레 걱정되기도 합니다.


어느 순간부터 작업 일지를, 몇 개의 태그를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가끔 생각나는 몇몇 이들이 있습니다. 또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 다정한 이웃들이 떠오를 때도 있습니다. 모두 저마다의 가을을 나고 있으리라 생각해보는, 누군가가 머무는 곳보다는 조금 이른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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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있으면 붉게 변하겠지요.

좋은 글 읽고 갑니다. 팔로우 하겠습니다~~

음악과 예술과 함께 하시는 가을이군요.
그냥 모든 것이 아름답습니다, 가을은....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춘 이웃들...ㅋㅋ 날씨 때문일까 저도 생각이 나네요 ㅋㅋ 얼굴 한 번 못뵈었지만

소리없는 연주에 무용을 해도 좋을 것 같은 느낌이네요. 그러면 관객들은 어떤 음악을 각기 떠올릴까요~

그 더운 오룸이 가고 어느덧 가을이군요.

주황색 단풍잎이 붙어있는 손편지를 받은 것 같네요.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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