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로맨틱의 수기

in #kr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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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눈치 채셨겠지만, 제이미(@jamieinthedark)님의 시리즈 글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제목을 빌려왔습니다.

* 제이미님은 당사자의 현재 주변인이 보는게 민폐라고 하셨는데, 저는 당사자가 보는 것이 민폐라고 생각하기에 반은 사실이고 반은 거짓입니다(모두 사실일수도).


어제 연습했던 Breakin' Away의 첫 코드는 EbM7/F다. 흔하다면 흔하고 흔치 않다면 흔하지 않은 코드인데, 이 코드로 시작되는 또 다른 곡이 있다. 그 곡이 시작이었다.


< 권순관 - 우연일까요 >

사랑은 늘 그랬죠
바람과 같아서
물결 이는 대로
난 휩쓸리는 배와 같아

우연과는 좀 다르죠
이 넓은 바다에
두 사람이 만나
마음껏 마주 보기 쉬운가요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건
눈빛의 말을 이해하는 건
같은 노랠 좋아하는 건
우연일까요

춤추는 파도 위에
누굴 만날지는
아무도 모르죠
우주의 섭리 같은걸요

Ooh come together
Ooh give thanks to god
Ah so tomorrow

어떤 말로도 다 할 수 없어요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건
눈빛의 말을 이해하는 건
같은 노랠 좋아하는 건
우연일까요

우연일까요 그댈 만난 게
수많은 사람 그 사람들 중에
우연일까요
그 사람들 중에
어떤 말로도 다 할 수 없어요

같은 하늘을 바라보는 건
눈빛의 말을 이해하는 건
같은 노랠 좋아하는 건
우연일까요

작은 농담에도 잘 웃는 것
오래된 영화가 더 좋은 것
처음 그렇게 널 만난 건
우연일까요

Now I understand I was seeking
This was meant to be, it's showing
Whole signs guide us, as we're flowing
For this ties


몇 년 전 이 무렵, 하루에도 수십 번 이 곡을 들으면서 설렌 마음을 달랬던 적이 있다. 유독 깊게 와닿았던 가사가 있는데, 같은 노랠 좋아하는 건인지, 오래된 영화가 더 좋은 것인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사람을 처음 알게 된 건 어떤 정기적인 모임에서였다. 주에 한두 번 정도 만나곤 했는데 나는 그의 존재와 이름만 알고 있었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날 때까지 교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임과 관련된 자료를 받을 일이 있었다. 번호를 교환하고, 메일 주소를 알려줬다. 그게 첫 대화였다.

며칠 뒤 메일을 확인해보니 그가 보낸 메일이 와있었다. 평소 받던 사무적인 메일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자료 밑에 달린 추신에 눈길이 갔다. 유명 뮤지션의 신보 소식을 알리는 짧은 문장이었다. 그 아래엔 유튜브 링크도 있었다.

그 당시는 음악을 듣지 않았기에 그 소식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걸 왜 보냈을까?' 하는 호기심과 앨범에 대한 궁금함으로 링크를 열었다. 그리고 앉은 자리에서 그 앨범을 다 들었다.

지난 이야기지만, 그때 그 앨범이 별로였다면 어땠을지 생각해보게 된다. 아마도 짧게 '감사합니다.' 정도의 답장을 보냈을 것 같다. 그가 보낸 앨범은 정말 좋았고, 그래서 긴 답장을 쓰게 되었다. 몇 번 트랙이 좋았고, 그게 왜 좋았는지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그 메일을 시작으로 우리는 긴 몇 통의 메일을 주고받았다. 메일을 주고받는 동안 우리는 모임에서 계속 마주쳤지만 간단한 인사만 하고,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이미 스마트폰을 쓰던 때지만, 메일로 주고받는 필담이 낭만적이었다. 그 당시 나는 영화를 많이 봤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영화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대부분 오래된 영화였는데, 나말고도 그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는 나보다 많은 영화를 보았고,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점점 관심이 생겼다.

기묘한 메일을 계속 주고받던 때였다. 평소와 같이 모임 후 집에 가는데 그 사람에게서 카톡이 왔다. 다른 말은 없었고, 재개봉 소식을 알리는 짧은 링크가 전부였다. 그때 그가 보낸 영화는 루이스 부뉴엘의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이었다.

그 카톡을 받고선 여러 생각이 들었다. 나와 영화를 보자는 건지, 아니면 영화를 좋아하는 내게 소식을 알려주는 건지 알기 힘들었다. 보고 싶던 영화지만 영화를 상영하는 날엔 뺄 수 없는 일정이 있었고, 아마도 카톡으로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긴 메일 대신 짧은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점차 그가 좋아졌고, 그때부터는 모임을 나가는 것 자체가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주는 아니지만 끊이지 않게 연락을 이어나갔고, 나는 가끔씩 짧은 글에 담긴 그 사람의 마음을 가늠해보곤 했다.

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땐 이미 모임이 끝자락을 향하고 있었다. 누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는진 모르겠지만, 낙원 상가에 있는 오래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영화를 좋아하면서도 독립 영화관에 가본 건 처음이었는데, 음습하고 낡은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그때 우리가 봤던 영화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였다. 처음엔 그 사람과 함께 영화를 본다는 사실에 긴장했지만, 막상 영화가 시작되니 영화가 너무 좋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오즈 야스지로를 더 좋아했고, 난 오즈 야스지로보다 구로사와 아키라를 더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선 근처에 있는 어느 허름한 전집에 가서 저녁을 먹었다. 전과 함께 막걸리를 마셨는지 소주를 마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흐릿하다. 다만 전집엔 사람이 무척 많았다는 것. 사람이 많아 큰 소리로 이야기해야 했다는 것. 그리고 나는 그 상황이 무척 좋았다는 것 정도만 기억난다.

나는 그 날 친구 집에서 자기로 했는데, 전집을 나와 자연스레 그 사람과 걷게 되었다. 우리는 걸으면서 책이나 영화, 음악 같은 이야기를 쉼 없이 나눴다. 그러다 편의점이 보이면 맥주 한 캔을 사서 바깥에 앉아 또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가 무르익으면 핸드폰에 있는 싸구려 스피커에 귀를 기울이고, 서로가 들려주는 음악을 쫑긋 듣곤 했다.

친구 집은 종로에서 무척 가까웠는데, 우리는 그 가까운 길을 멀고 멀게 돌아갔다. 우리는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다시 새로운 편의점에 앉아 맥주를 마시고, 또 걷다가, 맥주를 마시다가. 그러다 조금 취할 때면 꽤나 진지하게 서로의 예술에 대해 얘기했다. 그렇게 친구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동이 트고 있었다.


다시 되돌아봐도 완벽한 하루였다. 그 날 이후 맹렬한 사랑에 빠졌다. 그러던 중 모임은 끝났고, 나는 이 열렬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 없어 하루에도 몇 시간씩 걷고 또 걸었다.

우리는 그 날 이후 수많은 날의 날씨를 이야기하고, 궁금하지도 않은 서로의 식사 여부와 의미없는 안부를 물었다. 그를 향한 마음은 더 커졌지만,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귀찮게 느껴졌다. 그리고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우리는 같은 세계에 속하면서도 먼 곳에 있었기에 그 후로 만날 순 없었다. 나는 이따금 그를 생각하곤 했다. 그 소란한 밤을 함께 걸었던 그를. 내겐 그날의 기억도, 그 사람도, 그 밤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만 같다. 어떤 코드 하나에, 몇 개의 음들로 그를 떠올리게 되었지만 어쩌면 그를 떠올리게 된 건 늦은 저녁 불어오는 훈풍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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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트리거란, 삶의 곳곳에 존재하네요.
두두랑 제대로 만나보기로 한 바로 그 날,
점심 때부터 새벽 2시까지, 헤어지기 아쉬워 끝없이 걸었던
경성대와 해운대가 생각이 납니다 ㅎㅎㅎㅎㅎ

오쟁님 말씀처럼 정말 비포선라이즈네요.
혹- 후속편이 꽤 오랜 시간 이후에 나올지도.?
:-)

후후 이런 시간에 딱 봤다는 얘기....!

저도 어릴 때 낙원상가 극장 자주 갔었는데요, 브뉴엘 회고전을 한번 했을거에요. 아마 얘기하신 때가 그때인지는 모르지만....암튼 나루님도 옛날 영화 좋아하시는군요!

오즈 아니면 구로사와죠, 개인적으로 둘 다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선택하라면 둘 중 하나로 나뉘죠. 언제나. ㅎㅎㅎ

낙원상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비포선라이즈.. 읽는 제가 다 설레네요

동이 틀때까지의 종로거리를 걷는 모습이 쏜살같이 지나가네요.
문득 누군가가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아련한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계절의 변화마다 문득 생각나는, 훈풍에 떠오르는 사람이 남아있군요. 비긴 어게인이나 비포 선라이즈처럼 비현실적이기도 하고. 자연스레 멀어졌다는 부분이 너무 현실적이기도 하고.. 잘 읽었습니다.

아니 근데 술 완전 잘 드시는거 아닙니까?ㅋㅋㅋ

당시에는 두 분 다 표현하는게 서툴렀던 나이셨을라나요?
그에 더해서 몸도 멀어지고 하니 mm..

저는 한결같이 화르륵~ 스타일을 고수해온 사람이라 이야기 전부를 공감할 수는 없지만ㅋ자연스럽게 멀어지게 되었다는 부분에서는 많이 이입이 되네요.아침에 이런 글 보니까 또 오묘하네요 기분이.

어라 보팅도 하고 리스팀도 했던거 같은데 왜 안돼있을까요ㅠㅠㅠㅠ 갬성 참 좋았었는데ㅠㅠ

아 안타깝네요 뭔가 안타깝습니다.
늘 잘 되어서 연결되고 만나고 사귀고 할 필요는 없지만... 혼자 속으로 응원하고 있었나봐요, 하하...

@Peterchung님 글에서 넘어와서 읽어봤네요. 좋은 하루 되세용!

피터님 글을 통해 오셨다니 더욱 반가운 기분입니다. 피터님께 좋은 이웃을 소개받은 기분이랄까요?

실은 가끔 돌아봐도 좀 안타깝고 아쉬울 때가 있어요. 근데 아쉬워서 더 좋은 기억이 된 것 같기도 하고요.

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가올 한 주도 힘차고 즐거운 날들이 되었으면 해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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