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연작-1] 작명소

in kr-writing •  5 months ago

<군대 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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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명소
2 무지한 교관
3 파리대왕
4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5 선배님
6 애국과 제국
7 종교로서의 계급제도
8 정신교육의 근본문제
9 화수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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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출처 : 국방일보

작명의 개념원리

이름은 운명의 일종이다. 처음부터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선택한 사람은 없다. 순서로 보자면 오히려 이름이 인간을 선택한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변 사람들은 이름짓기에 고심한다. 사전을 펼쳐들거나 작명소를 방문해 좋은 이름을 탐색한다. 어느 과정에도 아이 그 자신의 의지는 고려되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다. 이름은 성별이나 인종, 조국, 외모처럼 운명이라 불리는 선험적 구조의 일부분으로서 부과되는 것이다.

이름의 목적은 불리기 위함이지 스스로 부르기 위함이 아니다. 아이는 특정한 언어에 반응하도록 길러지고, 어느 순간 그것이 자신을 변별하는 신호임을 깨닫는다. 사람들은 아이가 뭔가 하기를 원할 때 이름을 부른다. "철수야, 밥 먹으렴," "철수야, 가서 이것 좀 사오렴," "철수야, 숙제 했어?" 나아가 아이는 사람들이 '이름'을 물을 때 자신이 들었던 바로 그 언어신호를 되풀이하여 대답해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된다. "너 '이름'이 뭐니?" "저는 '김철수'예요."

요컨대 이름은 부름, 즉 '호명'의 도구이다. 기독교 성경의 등장인물들은 언제나 신에게 이름을 불린다. 아담아, 아브라함아, 야곱아, 모세야, 베드로야, 사울아, 등등. 호명은 용무가 있다는 뜻이다. 성경의 인물들은 호명을 통해 임무를 부여받고 이는 곧 정체성이 되어 각자를 규정한다. "내가 너를 여러 나라의 조상으로 만들었으니,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될 것이다," "네 이름은 지금부터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너는 베드로다. 내가 이 돌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다." 호명된 인물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성경의 역사를 전개시킨다.

그러므로 호명이란 단순히 소리의 물리적 울림이 아니라 부름과 그에 대한 청자의 반응, 진행되는 규정의 과정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호명은 이름을 통해 자리를 잡게 하는 일이다. 인간 개체는 특정한 개인으로 구별되는 동시에 사회의 전체 질서에 포섭된다. 호명에서 포함과 배제가 동시에 수행되는 것이다. 이것은 질서의 본질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완전히 끊어내서도 반대로 완전히 뭉뚱그려서도 질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하나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다른 모든 것들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이기도 하다. 이름들은 발음에서든 표기에서는 서로 구분되지만 또한 연결되어 있다(가령 "아빠/엄마", "papa/mama", "お父さん/お母さん", "pere/mere" ... 의 유사하지만 또한 상이한 이름의 변별화를 보라).

따라서 이름은 언어신호를 통한 질서(화)의 한 기제이다. 이름을 부여하는 일은 곧 질서화이고 질서화는 곧 이름을 부여하는 일이다. 어느 것이 우선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다음의 사실만은 명확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여기서 "꽃"이 나비도 풀잎도 모래도 아닌 그 무엇으로 독립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호명이 없다면 전경과 배경의 구분 없이 세상은 뒤섞인 한 덩어리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호명이라는 작용 또는 기능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름은 '김철수'같은 성명(姓名)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회적 포함/배제의 모든 이중적 언어신호는 호명의 도구인 '이름'으로 정의될 수 있다. 성명은 이름들 중 가장 좁은 범위에서 적용되는 일부분일 뿐이다.

모든 사회적 조직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명명한다. 이름과 호명의 상이한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이다. 조직 자신을 다른 조직들에 대해서, 집단 내의 한 그룹을 다른 그룹들에 대해서, 조직원 개인을 다른 개인들에 대해서 등 다양한 범위에서 호명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은 여러 겹으로 포함되고 배제된다. 중첩적인 명명들은 모두 한 인간 개체에 대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김철수씨는 S회사의 일원이자 개발팀 소속이고 테니스 동아리에 속해 있기도 하다. 대한민국 국민이며 서울시 주민이고 마포구에 살고 있기도 하다, 등등. 김철수씨 개인을 둘러싼 다양한 호명들은 상이한 방식의 효과를 낳으면서도 김철수씨를 통해 서로 연결되고 동시에 김철수씨를 세계에 연결한다. 포함과 배제의 이중주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다.

막사는 이름을 생산한다

군대만큼 노골적이고 효율적으로 이름을 사용하는 집단은 찾기 어렵다. 군대는 노련한 작명소이다. 군대는 자신 이외의 사회적 집단들을 '민간' 또는 '사회'라고 일컫는 것으로 명명을 시작한다. 따라서 군대에 들어오는 순간 개인은 더 이상 '민간인'이 아니게 되며, 그 말소된 정체성의 공백에 기수, 군번, 계급, 소속 소대/중대/대대 등등 온갖 이름들이 쏟아 부어진다. 부여받은 이름들로 불리고, 대답하고, 군장품에 이름을 적고(주기), 특히 편지를 주고 받는 가운데 개인은 급격하게 '군인'으로 재편성된다.

예컨대 편지봉투에 스스로를 "ㅇㅇ중대 ㅇㅇ소대 ㅇㅇ번 훈련병 ㅇㅇㅇ"라고 써야 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놀라움이 있다. '나'를 규정하는 새로운 이름들의 집합이 갑작스레 강요되는 것이다. 그러나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군대의 이름 체계를 사용하는 수 밖에 없다. 새로운 이름에 동의하든 안 하든 이미 이름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동의보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행위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뒤에서 보겠지만 이 강제성이 군대식 호명의 특수성을 구성한다.

이러한 '역성혁명'은 훈련소에서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이루어진다. 군 내 조직에서 훈련소는 가장 아래 위치한 기초양성기관이지만 작명의 관점에서라면 최상위 기관이다. 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간 이후에도 소속, 계급, 담당 등 지난한 명명의 과정들이 이어지지만, 모두 훈련소에서 부여받은 이름 체계들의 연장이자 변주일 따름이다. 따라서 입대자들이 훈련소 연병장에 모여 부모님 등 배웅나온 사람들에게 큰절을 하는 의식에는 의미심장한 구석이 있다. 당신들이 주신 이름을 버리겠노라는 일종의 하직인사인 것이다. 기존의 정체성들과의 확고한 단절("큰"절)을 도모한다는 측면만 고려해봐도 군대의 호명이 다른 사회집단과 크게 구분된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더 나아가보자. 훈련소에서 주입되는 이름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훈련병 및 간부 후보생(이하 훈련병으로 통칭) '번호'와 '소속 부대' 그리고 '기수'를 들 수 있다. 물론 유사한 장치는 다른 집단에도 존재한다. 학번, 사원번호, 입사기수처럼 말이다. 그런데 훈련소에서 이루어지는 호명에는 확실이 차별적인 측면이 있다. 주장하건대, 극대화된 이름의 물질성과 내재화의 광기 어린 속도가 그것이다.

군 훈련의 첫 번째 관심사항이자 첫 번째 표적은 결국 신체이다. 애초에 전쟁이란 원초적으로 아군의 신체활동을 통한 적 신체의 파괴인 탓이다. 신체는 외부와 격리되어 제한된 공간 내에 고정되어 극한의 상황까지 밀어붙여지며, 보행법에서 식사법까지 세세한 움직임의 방식마저 규율된다(직각보행, 수평플레이트 등). 촘촘하게 짜인 시간표에 따라 '일과'가 진행되면서 생활의 리듬도 조정된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훈련병은 자신의 신체가 자극받고 반응하는 양상에 오롯이 집중하게 된다. 고함소리, 땀, 근육통, 배고픔, 잔병치레 등 신체라는 물질의 무게감이 극대화되는 것이다. 훈련병은 자신이 얼마나 물질적인 존재였는지 뒤돌아보게 되는데, 그러한 재인식은 군에서 의도한 명명들의 삼투압과 함께 이루어진다. 신체가 존재를 침식함에 따라 김장 배추에서 물이 빠져나가듯이 기존의 이름들이 탈색되어 나가고, 숨이 죽은 신체에 이름들이 적중한다. 이제 훈련병의 모습은 마치 실에 매달린 몸뚱이가 춤을 추며 땀을 흘리는 것과도 같다.

군인정신 운운하는 '정신'의 훈련 또한 실은 신체 훈련으로 환원된다. 훈련소에서는 신체를 통해 정신을 조각하려 할 뿐 정신만을 겨냥하여 이루어지는 훈련이란 없다. 가령, '사회의 물을 빼는 일' 즉 '군인정신을 채우는 일'은 훈련병들의 몸을 혹사시킴으로써 달성된다. 교관의 고함소리에 반응해 함성을 지르고 땅바닥을 구르고 엎드리는 일은 군 질서에 대한 개인의 복종을 체화시키는 것이다. 복종에 대한 개인의 인식은 중요하지 않다. 고통스러운 자극을 피하고자 특정한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습관의 형성이 핵심이다. 게다가 훈련소에서의 자극-반응은 그 자체로 몸을 특정한 방식으로 길들일 수 있게끔 설계되어 있다. 함성을 지르게 한다든지 관등성명을 복창하게 한다든지 신속히 움직이게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정확히 그런 까닭에 훈련은 흔히 "동물적"이라고 표현되는 단계까지 인간을 해체한다. 인격은 찢겨지고 분해되었다가 다시 얼기설기 짜맞추어진다. 그러나 인간은 레고블럭보다든 훨씬 복잡잔 존재이기에 인격의 재구성은 반드시 상처를 남긴다.

강의식 교육 또한 이치는 마찬가지이다(물론 정신교육도 강의식으로 이루어진다). 지치고 피로한 신체들이 오와 열을 맞춰 강당 안에 '배치'된다. 강단은 높은 곳에 있으며, 교육은 수강자의 탐색과 의문을 배제하고 표준과 지침을 주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수강의 순간에도 신체의 흐트러짐에 대한 감시의 눈들이 산재해 있다. 사실, 피로하면서도 예민해진 채로 고정되어 있는 신체는 군 내 정신교육의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김장 배추의 숨을 죽이는 삼투압 원리는 여기서도 유효하다. 달리 말하자면, 무장해제와 거점타격의 원리이다. 따라서 정신은 조각의 대상에 불과하다. 정신은 진정 신체의 변형으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군대는 근본적으로 유물론적인 집단이다. 작명은 신체라는 물질의 극단적 움직임에 따라붙어 이루어진다. 호명은 보통 '민간 사회'에서처럼 (집단마다 속도차는 분명 존재하지만) 여러 이름들의 공존 가능한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스며듦이 아닌 급격한 주입과 강요를 특징으로 한다. 내재화의 광기 어린 질주 가운데 관념론자는 배격될 뿐이다. 관념은 반드시 물질의 회전을 늦춘다. 사실 복종보다 사고하는 군인은 전투에서 살아남기 힘들다. 그런 까닭에 교관의 요구사항은 훈련병들이 의도된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일일 뿐이다. 정신교육이란 신체 움직임의 윤활유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애초에 마음이나 정신이라는 것을 정식화하는 일에 철학적 난처함이 있기는 하다. 그렇다 해도 군대의 호명이 신체의 움직임을 위한 연료로 정신을 땔감삼아 불태우는 것은 분명하다('신분전환'을 위한 신체의 혹사가 달리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교관들은 당신을 특정한 방식으로 불러댈 것인데, 그것은 오로지 당신의 신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애초에 호명이란 수신자가 발화자의 의도를 수용할 수 있도록 요청하는 것인고, 특히 군에서는 호명의 효과가 신체의 즉각적이고 과장된 반응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훈련병." - "예, 김철수 훈련병!" - "더 크게 안 합니까." - "예, 김철수 훈련병!" - "목소리 작습니다, 엎드려, 빨리빨리 안 합니까, 시계탑까지 뛰어갔다 옵니다, 실시." 군대에서 주어진 이름들에서는 땀냄새가 난다. 이름은 신체와 떨어져서는 존재하지 않는 탓이다. 반대로 군인의 신체 또한 그러한 이름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다.

사례분석 - "동기(기수)의 이름으로.."

개인적으로 훈련소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동기'라는 기수 개념의 강박적인 강조행위였다. 여기서도 문제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이름이 주어진다는 사실에 걸려있다. 훈련소에서 동기 개념이 인상적으로 부각되는 것은 대개 단체로 훈련이나 기합을 받을 때 교관의 입을 통해서이다. "XXX기, 이것밖에 안됩니까? 동기 아닙니까?" "하나에 '동기야' 둘에 '사랑한다' 외칩니다, 실시!" 분명한 호명의 순간이다. 훈련병들은 이 부름에 신속하게 큰 소리로 응답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엎드리거나 뛰어야 한다. 즉, 여기서도 이름은 신체를 통해 강요된다는 원리를 확인알 수 있다. 그리고 훈련기간 지속되는 반복적인 부름과 응답을 통해 'XXX기'라는 이름이 규정하는 질서가 체화된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XXX기 동기'라는 이름을 통한 질서화의 목적은 명확하다. 이 개념 또한 포함과 배제의 이중적 작용을 수행한다. '우연히' 같은 시기에 입대했을 뿐인 개인들을 동질화하기, 동시에 특정 기수로 묶어냄으로써 선후 기수와 구분(이질화)하여 병력관리의 편의성을 도모하기, 또한 선후 기수 사이에 해당 개인들을 삽입함으로써 군의 전체 체계에 포섭하기. 나아가 신체를 통한 직접적 강요의 긴박함을 통해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꾸며내기. 신체를 혹사시킴으로써 동기라는 이름의 폭력성은 망각된다. 압도적인 힘 앞에서는 누구도 그 기원의 정당성을 고민하지 않는다. 공포에서 비롯되는 신체반응의 요청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면 다들 우연히 그때 거기 있었을 뿐이다. 입대시기가 어쩌다 보니 겹쳤을 따름이다. 'XXX기 동기'로 묶여 연대감을 요구할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름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던 적은 없으며, 관련하여 어떤 동의요청도 받은 바가 없다. 예컨대, 병역의 의무를 져야 했고, 여러가지로 인생의 시기를 계산한 결과 지금 가지 않으면 불리했을 뿐인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혹자는 해당 기수에 지원한 것이 어쨌든 주체적인 '선택'이었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개념 남용에 불과하다. 귀류법적으로, 그렇듯 강요된 선택에서도 동등하게 그 자발성의 가치를 인정하게 되면 윤리적 판단능력은 마비되며 또한 선택이 아닌 일이 세상에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훈련의 과정 내내 군대는 해당 무리에 하나의 이름을 부과하고는 신체를 흔들어대며 고개 끄덕이기를 요구한다. 마침내 "예!"하고 크게 외친 순간 나는 과거부터 이 이름에 동의해왔던 것이 된다. 시간을 거슬러 정당화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다. 동기나 전우라는 개념이 자아내는 무언가 신비롭고 숭고히고 벅차오르는 듯한 느낌의 정체가 이것이다. 무근거에서 비롯되는 자연스러움. 텅 빈 공간을 가림으로써 생겨나는 비밀의 환상. 우리는 동기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동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일단 교관의 부름에 대답하라, 그러면 당신은 동기가 될 것이다. 파스칼도 종교에 대해 비슷한 방식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일단 무릎을 꿇어라. 그러면 믿어질 것이다." 극적인 전도의 논리가 거기 있다. 하지만 응답함으로써 비로소 동기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동기는 원래 그렇게 완성되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개인의 인식과는 무관하다. 시간의 흐름마저 초월한 이름의 강요가 애초에 그 발생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훈련소 일지 #13 - 동기에의 강요에서 이름에 깃든 타자성의 본질이 드러난다

'XXX기 동기'라는 호명에 맞닥뜨릴 때마다 등골이 서늘했다. 뛰고 구르고 엎드려야 하는 일들은 갑작스레 하달된 기수의 이름 아래 번번히 강제되었다. 당혹감과 불쾌함의 감정에 이어 의구심이 터져나왔다. 내가 기수의 이름으로 뭉뚱그려지는 일에 동의한 적 있던가? 처음부터 나의 의사에서 벗어나 있던 병역 의무에 의해, 그리고 사정상 이 시기에 입대하게 되어, 우연히 처음 만나게 된 사람들과 갑자기 운명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단 말인가? 왜 그토록 당연한 이치에 복종하지 않느냐는 선언과 강제와 명령의 형태로? 번번히 온몸이 찢기고 다시 짜맞추어지는 악몽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끊임없이 되뇌었다. '나를 만지지 말라...'

동기라는 이름의 강요는 훈련소의 작명술, 즉 호명의 폭력성을 여실히 보여준다. 실질적으로 나는 선택이나 동의를 위한 고려와 의지를 수행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은 당연하다는 듯이 진행된다. 나는 스스로 이 시기를 골라서 입대했기 때문에 '당연히' XXX기이다. 따라서 '당연히' 동기애를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계약이행에 불성실한 것이거나 심지어는 낮은 사회생활에 부적응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실, 이런 의문을 가질 여유 따위는 없다. 언급했다시피 동기라는 이름이 강렬하게 빛나며 현현하는 것은 대부분 몸을 써야 하는 순간들이다. 속으로는 어떻게 생각하든 일단 움직일 수밖에 없다. 아니, 움직이게 된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온몸으로 동기의 이름을 받아들이는 과정으로 작용하며, 나중에는 처음부터 호명의 이 모든 작동들이 당연한 이치였던 것처럼 느껴진다.

나 역시 발부터 깊이 가라앉아 삼켜진다는 느낌 속에서도 일단 "예!"라고 외치며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주변을 보니 다들 이 모든 것이 '너만 모르는 당연한 이치'라는 듯이 이미 움직이고 있었고(다른 사람들도 무리 속의 나를 보며 같은 느낌을 받지 않았을까?), 따르지 않는다면 더 큰 곤혹 속에 빠질 신체의 모습이 저절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동기라는 언어신호에 맞추어 자동으로 움직이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기수라는 분류범주를 별 생각 없이 사용하고 있었다. "야, 우리 다음 기수는 지금 입대준비하고 있겠지?" 재차 강조하건대 놀랍게도 이 모든 일은 갑작스레 발생했지만 그럼에도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이 진행되었다. 호명의 노련한 이용을 통한 질서화로 신체도 정신도 철저하게 조각된 덕택이었다.

또 하나의 폐해가 있었다. 인간과 인간이 함께 생활하는 가운데 자연스레 생겨나는 친근함의 감각들이 있다. 그런데 이 소중한 감정들이 모조리 동기의 이름 아래 도매급으로 넘어갔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필연적으로 손실되는 부분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사실 모든 명명은 피할 수 없는 결여분의 발생을 적극 인지하는 가운데 조심스레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훈련소에서 '우리'의 감정들은 전우애나 동기애의 이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훈련소 복도 천장에는 "one for all, all for one"이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동기들과의 이토록 '자연스러운' 관계에서 위화감을 느껴 자주 멈칫거리게 되었다. 이게 진정 나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감정인지, 유도되거나 조율되어 이를 의도한 구조의 작동을 위한 연료로 바쳐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요컨대 군대에서 뼈저리게 체험한 것은 이름의 근본적인 타자성이었다. 군인이 아니었던 시절도 삶에는 무수히 많은 외부의 손길들이 개입하고 있었왔음을 새삼 돌이켜보게 되었다. 도움의 형태이든 적의의 형태이든 모두 당연하다는 듯이 내 운명을 구성하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운명이라는 것이 한낱 신화에 불과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다. 군대야말로 진정 타자의 세계였다. 혹은 인간의 삶과 운명 간의 긴밀한 관계를 여과 없이 폭로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해도 타당할 것이다.

나는 군대라는 작명소의 폭력적인 호명 행위가 단순히 그 집단이 악마적인 데서 비롯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군대도 사회 전체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질서화에서 모든 차별화, 배제, 이질화는 반드시 그 역과 동시적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름과 호명은 언제나 타자의 몫이다. 이 또한 그저 타자의 악의 때문은 아니고 그리 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기는 하다. 아이가 처음부터 자기 이름을 지니고 세상에 나오지는 않지 않은가?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이름의 이 근본적인 타자성은 인간의 존재에 내재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다. 우리가 군대의 질서에 복종하는 까닭은 그것이 타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오래 되었고 우리에 대해 훨씬 많은 정보와 가용자원을 지닌 타자이기 때문이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내 안의 타자성이란 이미 외부의 질서에 복종한 적이 있다는 흔적이자 고개 숙일 능력이 있다는 증거이기에 이는 타자와 공명하여 결정적인 순간 다시 호명에 대답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가령, 우리는 이미 가정에서는 부모님에게,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교과 시스템에 복종하는 훈련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에 군대에서도 충분히 복종을 '해낼 수' 있다. 흔히 말하는 '착한 아이 컴플렉스'란 이에 상응하는 증상이다.

군대의 폭력성은 이름의 본질적인 타자성이 극대화되고 과장되어 상연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군대는 이름의 전횡적인 성격을 조금도 숨기지 않고 그대로 무기삼아 휘두른다는 점에서 보다 특수하다. 그러나 군대의 타자성은 결코 낯선 것이 아니다. 작명가들은 탄생의 순간부터 우리를 따라다녔다. 따라서 군대는 이름의 극장이다. 배우들은 과장된 목소리와 표정으로 연기하며 현실의 핵심 지점들을 포착하고 표현해낸다. 여기서는 과장이 오히려 진실이다. 막사를 거쳐간 우리는 어디에서나 성공적으로 복종할 수 있을 것이다. 더 많은 이름들을 어깨 위에 질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타자의 세계에서 관념론자는 질색이다. 회의는 금지되어 있다. 유물론의 매트릭스에서 살아온 것을 환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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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출에 감사드립니다! 즐거운 스티밋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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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감사합니다^^

직접 지으신건가요..? 대단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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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찬이십니다..ㅋㅋ 감사합니다!

군 생활에 대한 글은 저한테는 결코 겪어볼 일이 없을 간접 경험이 될 수 있는지라 매우 흥미롭죠. 꾸준히 읽어보겠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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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미님~ 독자를 자청해주시다니 영광입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글이라도 꾸준히 완성해보겠습니다.

이런 글을 앞으로 8개나 연작해서 쓰신다는 것이지요?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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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 군대는 쓸 것이 쏟아져나오는 화수분 같은 존재인 듯 합니다... 열심히 써보겠습니다!

언어의 특성이 실재하지 않는 것을 실체화, 독립화, 배제화 하는 것이니 군대는 이를 가장 단순 무식하게 효율적으로 실행하는 사회체계이겠죠. 군대에서의 다양성이란 무질서를 의미하니까요. 우리 사회가 군발이 문화에서 빨리 벗어나야 사회적 불균형도 해소될수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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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합니다. 언어의 "실재를 살해하는" 기능은 어쩔 수 없는 것이겠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척 극단까지 몰고 가니까요. '명예', '기수', '충성', '애국' 등이 그 대표적인 오남용되는 문자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거대한 시리즈라니.. 저는 군대 가기 전, 대학에 입학하고 신입생으로서 처음 학교를 간 날부터 '동기사랑 나라사랑'을 외치며 땀을 흘렸습니다. 제가 입학 첫날에 접했던 사회는 복학생들에 의한 군대 작명소의 체인점이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