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사육 욕구

in #kr-philosophy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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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야수를 방생하기 위해 거두어 들인다면 많은 노력을 해야한다.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야성은 잃지 않으면서 사육사를 공격하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가져야 한다. 그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일이 중요하다. 아무리 생명은 모두 존엄하다 해도 동물의 야성을 지키기 위해 사육사의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다. 반대로 충분히 야성을 유지하지 못 해 준비한 방생이 실패한다면 그것도 낭비가 된다. 깊은 관심을 갖고 섬세하게 야성을 조율한 사육사의 노력, 깊은 관심을 가진 대상과의 이별을 준비하던 감정이 낭비가 된다. 이별은 사육사에게 힘든 일이지만, 야생에 적응하지 못 하여 이별에 실패하는 것도 힘든 일이다.

나는 그리 어려운 사육을 원하지 않았다. 영속적인 사육에 만족한다. 나를 새장에 가두어두고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내가 지저귀는 소리를 즐기기 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 필요한건 야생과의 단절이었다.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한 야성을 키워내는건 어렵다. 방생을 목표로 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가령 매사냥을 위한 매를 키워내는건 극도의 섬세함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주인에게 내 야성을 유지하며 섬세하게 길러줄 것은 원하지 않는다. 야성을 유지하는걸 원치 않는 수준을 넘어, 야성을 잃고 싶었다. 원한다면 내 부리와 발톱을 갈아서 절대로 무언가를 해칠 수 없도록 약하게 만들어도 좋다. 도망가지 못 하게 날개의 기능을 앗아가도 좋다. 하지만 파격적인 조건에도 사육사를 구하기는 어려웠다. 대부분의 사육사의 이해와 내 이해는 일치하지 않았다. 사육사는 내 야성을 길들이고 싶어했다. 매사냥을 하고 싶어했다. 경주마가 되길 원했다. 사육사의 필요에 따라 야성을 발산하길 원했다. 하지만 훌륭한 경주마가 되는건, 훌륭한 사냥용 매가 되는건 기질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사육사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미친 말, 미친 새일 뿐이다.

그러다 2년 전, 왕을 가지려고 했던 적 있다. 나에게 동업을 권하던 그에게, 나는 거대한 영향력을 요구하며 한가지 약속을 했다. 나를 중용한다면 당신을 왕으로 섬기는 충신이 되겠노라고. 나는 아무에게나 고개를 조아리지 않는다. 그에게는 내가 갖지 못 한게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의 동의를 얻어내고 끊임 없이 내 손에 닿는 것에 대한 영향력을 요구했다. 통제광인 나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건 모두 내가 해결하고 싶어한다. 그렇게 계속해서 내가 관여하는 분야가 늘어나던 어느 날, 그는 자신이 할 일은 무엇이냐 물었다. 왕의 업무에 대해 알았다면, 나는 왕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신하가 되길 택한 이유는, 왕의 업무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가 무엇을 해야할지 알았다면, 당신을 섬기겠냐고 답했다. 내가 모르는 모든 것이 그의 업무였다. 하지만 그는 내가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 끝까지 알아내지 못 했다. 그리고 그의 가치가 무엇인지도, 내가 그에게서 무엇을 보고 신하를 자처했는가도. 결국 그는 내 왕이 되는걸 포기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피-사육이란 하나의 사육이기도 하다. 새장의 주인은 새에 대해 알아야 한다. 내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나는 아름답게 지저귀는 대신 비명에 가깝게 지저귀다 죽어갈 것이다. 사육에는 책임이 따른다. 나는 나를 책임질 주인을 갖고 싶었다. 나는 피-사육을 통해 자유를 얻고 싶었다. 피-사육과 자유는 공존할 수 없는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피-사육을 통해 야성을 지니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는 자유, 맹목적인 복종에서 오는 안락함이 줄 정신적 자유, 주인을 통해 충족되는 욕구에 따른 육체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맹수가 남에게 피해를 입힌다면, 맹수가 아니라 맹수를 키우는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 하지만 걸핏하면 쇳소리로 울어대는 새를 돌보는 일이란 쉽지 않다. 정해진 시간에 물을 마셔야 하고 밥을 먹어야 하고 새장이 너무 크면 안 되고 새장이 너무 작아서도 안 되는 새를 돌보는건 어렵다. 나는 그래서 왕을 갖지 못 한다. 하지만 나는 영원히 왕을 찾아다닐 것이다. 기꺼이 섬길 가치가 있고, 기꺼이 나를 사육할 왕을. 그리고 세상에는 자유를 되찾아 줄 왕이 필요하다.

그의 말처럼 내가 왕이 존재하길 원하는 것이라면, 내가 왕을 자처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자유를 사랑한다. 통제광인 내가 섬김을 받는다면 그들에게 자유란 없을 것이다. 그들을 통제하는 나의 자유도 잃어버린다. 제각각 성격이 다른 새들을 섬세하게 돌보기 위해서 나는 자유를 잃는다. 내가 왕이 될 자격과 능력이 있는가는 말 할 필요도 없고.


@zzoya 님께서 글작가와 그림작가의 협업을 계획하셨기에 저도 약간 보태보았습니다. 활발한 이벤트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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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피-사육의 장점을 인지할 수 있는, 그 정도의 깊이 있는 성찰이 있는 사람들이 '좋은 사육처'와 '왕'을 찾는 경우는 많이 못 본거 같아요. 결국 그런 높은 성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왕의 무능을 견디지 못하거나 반대로 왕이 두 손 들게 되더라고요. 사실 그 피-사육의 장점을 알기에 왕이 될 '숙명'을 거부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덧, 김리님~ 이벤트 후원금과 지지 감사합니다!!!
너무 신나서 그 어렵다는 '김리님 글에 짤방 붙이기'를 감히 실행하겠습니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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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에 짤방 붙이기가 왜 어렵습니까. 자유롭게 달아서 댓글창이 길어보이게 해주세요.

본 게시물은 글/그림 콜라보 이벤트 참가작입니다.
이미 보팅된 게시물이라서 댓글에 보팅됩니다.

소요님이 전혀 의도하신게 아니라는 건 알지만 킴밀님의 저 덧글 이후에 이런 차분한 덧글이 이어지니 빵터졌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소요님 진짜 이러기에요ㅋㅋㅋㅋㅋ진지하게 말씀하셔서 더 웃겨요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씐나보여!!!!

피-사육이 정말 달콤하기는 합니다 ㅎㅎ

통제광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하네요~
쪼야님의 글작가와 그림작가의 협업 이벤트 보았습니다~~
무척 기대가 됩니다~

통제광은 손에 닿는 모든걸 통제하려고 드는 미치광이를 말합니다.

재미있는 글 잘읽었습니다 김리님. 항상 챙겨보는데 오늘 주제는 더욱더 재미있네요. 읽으면서 사마천의 전기에 나오는 장자이야기가 생각나더라구요. 여기서 장자는 소이야기를 하면서 천하와 개인을 대립시키면서 자유에 대해서 논하는데 오히려 김리님 말씀을 듣고나니 "과연 타인으로부터 완전한 자유가 가능한가? "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네요 ㅎㅎ 다음글도 기대할께요!

자유란 평등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절대로 쟁취 할 수 없는 가치입니다. 그래서 매력이 있는 것이겠지요.

제가 그래서 아이폰을 씁니다.

그건 자유가 없는 사육 아닙니까?

안드로이드가 야생의 자유라면 아이폰은 싱가폴의 자유라 할 수 있지요. 적응하면 쾌적합니다. 태형만 조심하면...

kmlee님이 쓰신 글에 제가 현재 회사에서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읽다보니 너무 공감되는 것들이 많네요.
통제 하는 사람 그 본인도 자유를 잃어 버린다라고 생각을 할까요? 갑자기 직장상사도 그렇게 생각하는건가 싶기도 하네요.

직장상사 분도 매일 투덜거리며 사실거에요.

  1. 제목만 보고 소설이 돌아온 줄 알고 기뻤음.
  2. 중간쯤에 가서야 피-사육에서의 피가 blood가 아니라는 걸 알았음.
  3. 피-사육의 자유는 달콤함.
  4. 김리님이 꼭 왕을 찾으시길!

사육도 좋은 주인을 만났다면 재밌는 소설로 살아가고 있을텐데요. 주인을 잘못 만나면 이렇게 됩니다 ㅜㅜ

와우.. 폭력의 미학에 대해 써주세오

미학까지는 모르겠고... 폭력이라 하시니 생각나는건 있는데 너무 진부한 내용일 것 같네요. 새벽에 커피 한잔 마시고 고민해보겠습니다 ㅎㅎ

퀘스트 완료했습니다. 요즘 몬스터헌터 월드를 하고 있으니 수주한 임무를 완수했다고 해야할까요.

아! 완전 좋아! 저는 광기가 너무 좋습니다. 광기! 야성!

특히 자기가 모든걸 통제 하려하는 통제광을 좋아하는데ㅋㅋㅋ

그래서 kmlee님이 좋나 봅니다 ㅋㅋㅋㅋ

제가 통제광적인 충동을 친구들과 게임할 때 풀고 있습니다. 어떤 게임을 해도 무조건 다 내가 하고 싶은대로 해야해요. 배율은 다 내꺼!

kmlee님의 글 매우 재밌게 읽었습니다! 자유의 의미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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