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별을 본다. 외롭지 않으려고. / 038

in #kr-pen3 years ago

별을본다_02.jpg
ⓒzzoya





  띠띠- 띠띠-
  눈을 떴을 때 낯선 천장에 잠시 혼란을 느꼈다. 소파의 감촉과 격자무늬 유리창이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나는 그제야 그녀가 내 곁에 없음을 깨달았다. 기대했던 밤이 낮에 이어지는 온정은 온데간데없이 그녀는 커피 테이블 위에 큼지막한 메모 하나만 남겨두고 부재중이었다. 메모는 아침 겸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 놨으니 꼭 먹으라는 것과 볼일이 있어서 나간다는 것이었다. 호밀빵 사이에 살라미, 치즈, 양상추, 토마토를 채운 샌드위치가 냉장고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립 포트에 식어 있는 커피와 함께 그녀의 지시대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간밤에 을씨년스러운 풍경만이 걸려 있던 유리창은 투명한 햇빛을 투과시켜 내가 일으킨 먼지를 반짝이는 부유물로 만들었다.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화로운 낮은 심지어 시간이 정지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어쩐지 나를 둘러싼 공간, 냄새, 느낌이 묘하게 낯익었다. 인간은 참으로 적응력이 빠른 동물이군. 그때 불현듯 잊고 있던 게 떠오르는 바람에 나는 바 테이블에서 벌떡 일어나 소파 밑으로 머리를 처박아야 했다.

  문제의 물건을 신중히 꺼내 한동안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차갑고 묵직한 폴리머 재질의 권총이 내 손바닥 위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말코비치의 지문이 어느 정도나 남아있을까.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지금은 내 지문이 주인의 것보다 선명하리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과감히 탄창을 뽑았다. 거기에는 말코비치의 위협을 단순하게만 볼 수 없는 증거들이 단단히 재어져 있었다. 최소한 여긴 놈의 지문이 더 많겠지. 라텍스 장갑이라도 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렇게 생각하며 묵직한 검은 관을 도로 밀어 넣었다. 볼일이 무엇이길래 간밤의 일을 상의할 겨를도 없이 나갔을까. 지미를 만나러 갔을 거라는 생각이 금방 떠올랐고 기정사실처럼 굳어졌다. 복도에 서서 그녀가 놓고 간 열쇠로 문을 잠그고 있을 때 멀찍이 떨어진 다른 방에서 누군가 나왔다. 나는 그쪽을 무심히 한 번 흘끔거렸고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문득 서로의 존재를 알아채고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가지런히 기른 붉은 끼 도는 콧수염이 나를 향해 움직였다.

  “잭?”

  저 인간의 이름이 뭐더라. 아마…….
  “릭.”

  남자는 두 개의 문을 더 지나쳐 나와의 간격을 좁혔다. 놀란 기색을 감출 것도 없이 남자가 물었다.
  “당신이 왜 거기서 나와요?”
  “그쪽은요?”
  답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물었다.
  “그야 여기 사니까요. 하지만 당신은……. 거긴 클레어 방이잖아요.”
  예의라고 생각했는지 남자 역시 뻔한 걸 모르는 척 던졌다. 그래 놓고는 뒤늦게 남의 사생활에 참견하지 않는 쿨한 이웃 행세를 하며 덧붙였다.
  “뭐, 제가 참견할 일은 아니죠.”
  “맞아요.”
  나는 심드렁한 대꾸로 받아쳤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던 시선이 불쾌해지려는 찰나에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얘기 들었어요. 수지 큐랑 헤어졌다고……. 미안해요. 혹시 내가 그날 밤 취해서 떠들어댄 말 때문에 그렇게 된 거라면…….”
  “그거랑은 상관없습니다만.”

  능구렁이 같은 놈. 수지 큐와 나 사이를 이간질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런 말을 하다니. 내가 놈에게 주먹을 날리지 않은 이유는 수지 큐와 헤어진 데 놈의 간계가 1g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순전히 내 문제였을 뿐. 놈이 순순히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랬군요…….”
  무엇을 납득했는지 놈은 눈을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그동안 적잖이 죄책감에 시달렸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말 때문에 두 사람이 헤어진 게 아닌가 싶어서요.”
  “그날 밤 무슨 말 했는지 기억 안 난다고 하지 않았어요?”
  놈은 의표를 찔린 사람답게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어, 제가 그랬던가요? 아, 예, 분명 그랬을 겁니다.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조금씩 떠오르는 게 있긴 하더군요. 정확한 기억인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요. 아시다시피 제가 그날 많이 취해서요…….”

  더 집요하게 따져 볼까. 놈이 여기서 더 당황하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날의 일을 들추는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수지 큐와 나는 헤어졌고, 그 일은 아무 상관도 없으며, 지나간 일을 따지는 건 남자가 할 짓이 아니니까.

  “신경 쓸 거 없습니다. 다 끝난 일이니.”
  내 말에 놈이 곧장 화색을 띠었다.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당신은 정말 보기 드문 남자군요.”
  마음에도 없는 칭찬은 웃기지도 않았으나 놈의 노력이 가상해서 나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놈은 그걸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였는지 한 발 더 나갔다.
  “그럼 우리 사이에 이제 빚은 없는 거죠? 당신과 나 사이에요.”
  “좋으실 대로.”
  “좋아요, 좋아. 오늘은 진짜 멋진 주말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다 당신 덕분이에요.”
  “다행이군요.”
  “전 나가는 길이었어요. 운동하러요. 주말마다 운동하는 게 이제는 어느덧 고정적인 일과가 되어 버렸죠.”
  반바지와 운동화 차림에 방수 재질의 운동용 가방을 들어 누구나 유추할 수 있는 모습으로 놈은 떠들어댔다.
  “당신도 나가는 길이었죠?”

  나는 놈과 엘리베이터에서 로비까지 불편한 동행을 한 끝에 현관 앞에 이를 수 있었다. 놈은 악수를 청하며 끝까지 태연하게 속내를 감추고 연기를 이어갔다.
  “아, 제가 혹시 도울 일이 있다면 뭐든 얘기하세요. 우린 이제 친구잖아요. 그렇죠?”
  보기 드물게 진정으로 뻔뻔한 인간이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놈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럼 전화 한 통만 쓸게요.”
  놈은 좀전의 호언과는 다르게 그리 흔쾌하지 않은 몸짓으로 전화를 건넸다.
  “편하게 써요. 저는 그동안 차 좀 빼 올게요.”

  놈의 앞뒤가 다른 태도 따위는 개의치 않고 번호를 입력했다. 다행히 그녀의 번호는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행여 실수로라도 누를 새라 재빨리 그 번호를 지우고 다른 번호를 눌렀다. 낯익은 이름이 금방 목록에 떴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신호음이 길게 이어지다가 재수 없는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청신경에 불쾌감을 주었다.

  “릭?”
  “아니, 나야.”
  “잭? 네가 왜?”
  “똑똑한 머리로 맞춰 보시지, 닥터.”
  스피커 너머로 지미의 작은 한숨이 똑똑히 들려 왔다.
  “어찌 된 건진 모르겠다만 아무튼 잘됐다. 지금 이쪽으로 올래? 연구소로 말이야.”
  “왜?”
  “왜긴, 중요하게 할 말이 있으니 그러지.”
  “내가 먼저 전화했다는 걸 그새 잊었나 보군. 클레어, 거기 있지?”
  “아니.”

  지미는 자신의 순간적인 부정에 스스로 놀란 듯 곧바로 진실을 털어놓았다.
  “아, 그래. 네 말이 맞아. 어젯밤에 애덤스 씨를 만났다며.”
  “만났다고? 그걸 만났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거야, 지금?”
  나는 순간 욱해서 언성을 높였다. 길가로 빼낸 차 안에서 릭이란 놈이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진정해. 무슨 일이 있는진 알아. 그 얘기도 들을 겸해서 보자는 거야. 올 거지?”
  지미가 또다시 어른스러운 태도로 나를 자극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도 성숙한 어른의 인내를 발휘해 녀석의 도발에 휘말리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내가 갈 때까지 잘 붙잡아 놔. 클레어의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음, 알았어.”
  용무가 끝난 전화를 돌려받은 릭은 잠시 화면을 보다가 짐짓 걱정되는 척 물었다.
  “문제없는 거죠?”
  “그럼요.”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햇빛을 받아 환하게 빛나고 있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어제 위협을 받은 건 대체로 나였지 그녀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목숨을 언급했다. 나는 어느덧 내가 아닌 그녀가 위험에 빠졌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유는 나도 몰랐다. 단순히 그녀를 나보다 더 아끼게 되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하나는 분명했다. 나는 비틀거리면서도 우주적 사건의 중심으로 정확하게 들어가는 중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힘이 그녀의 등 뒤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악의없는 교묘한 미소를 짓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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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감상&잡담

오지랖 넓은 릭을 다시 만났네요.
그것도 클레어의 집 옆에 산다니...
왜 기분 나쁜게 엮인 사람은 더 인연이 질긴 것처럼 느껴질까요.
살다보면 그런 경우가 꽤 있는 것 같아요.

탄탄한 구성에 점점더 흥미진진해 집니다 ㅎㅎ 쿨한 잭의 성격에 작가님을 떠올리게 되는건 그가 화자이기 때문이겠죠?ㅎ

잭처럼 쿨했으면 하는 바람이 투영된 결과 아닐까 싶습니다.

어!! 저도 뭔가 잭의 성격을 계속 작가님으로 투영시켜서 읽고 있었어요!!


Without you by Oh Wonder

오랜만에 음악도 놓고 갑니다.

제사 즐겨듣는 오원더를 소개해주시니 괜히 뿌듯하네요 ㅎㅎ cigarettes after sex도 좋습니다 (오해하실까봐 밝히지만 가수 이름입니다ㅎㅎ)

미네르바님도 즐겨 들으시는군요. 말씀하신 그룹은 전에 어떤 이웃분이 소개해 주셔서 들어 본 기억이 납니다. 보컬의 미성에 여자인 줄 착각해서 댓글로 물어 보기도 했었죠.

저도 목소리 듣고 감동받아서 동영상 찾아봤다가 멘탈이 산산조각난 기억이 있습니다 ㅋㅋ

저만 그런 게 아니라 다행입니다 ㅋㅋ

잭 진짜 반가운데 오원더가 더 반갑...

추측하기를 멈추고 그냥 읽었어요
릭의 재등장...뭔가 의미가 있는지..
아!! 추측하지 말아야지..^-^;

홀, 오피스... 멋진 덧글 인터페이스 입니다. 조용히리스팀 합니다.

홀, 오피스... 멋진 덧글 인터페이스 입니다. 조용히 리스팀합니다.

거대한 음모가 있을 거 같은데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네요.. 혹시 스릴러?

오늘도 감사합니다. 사건이 점점 흥미진진해지네요 :)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네요...

슬슬 꽁냥질에서 벗어나 다행입니다.

꽁냥질도 좋아요 ^^

제가 싫어서요 ㅋㅋ


잭을 기다렸습니다. 어...갑판이 아니구나.

장르가 서서히 스릴러로 바뀌어가는 것 같네요. 교묘한 미소의 실체가 있는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릭은 또 어떤 소식을 전할까 궁금하네요?
지미는 크레어에 대해서 솔직 하지 않고 무언가 숨기는것 같아요.
다음편이 궁금하네요 ^^

릭에게 킥을 먹여주고 싶네요. 물로 지미한테도 ㅎㅎㅎㅎ

도대체 무슨일이 일어나고 있나요... 이런 글을 쓰시는 김작가님 애정해요... 지방선거 때문에 너무 늦게 왔지만... 잭이 궁금하고 클레어가 궁금하고... 수지큐가 궁금해요... ㅠㅠ

얼른 새벽 기도를...!

잭은 참 머리도 똑똑하고, 별걸 다 기억하고 있고, 센스도 있고, 말도 잘하고.
근데 뭔가가 묘하게 불안해요. 흠, 뭘까..

잭에게 다시 중요한 임무가 생겼군요. 잭, 어서 클레어를 찾아!!ㅎ

역시 그날 파티 때 릭이 보여줬던 찌질함이 일시적인 게 아니었군요 ...

잭의 귀환을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놈에 대해 좀더 흥미가 생길거 같아요. 행복은 언제나 제가 찾는 것이란 걸 느끼네요. 하나 추가해 갑니다~

거의 일주일만에 연재하셨네용!
잘보고 갑니다!

또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질것 같네요^^

별은본다 외롭지 않을려고
좋은문구입니당
누구나 외롭고 기대고
싶은데 쉽지않은일이죠

그녀의 직업의식? 프로의식?은 대단하군요. 애덤스를 찾아갔다면 정말,,대단한 여자군요. 총을 보고 환자를 걱정한다면,,,신념또한 대단하리라,,,기대됩니다. 앞으로의 만남이 어찌 이어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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