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무덤가에서
할머니 산소에서
좀 오래된 어느 날, 일본이 조선을 쥐락펴락 하던 어느날의 일이다. 조선에 대한 일본의 통치방법이 문화통치에서 민족말살책으로 변할 무렵, 경상도 북쪽의 이름없는 시골에 살던 10대 후반의 소녀는 중매로 양반집 후손과 결혼했다. 당시 그 시골에는 주변 도시에 흔하던 일본인 순사도 없었다. 정복자의 입장에서도 뜯어먹을 것 없는 가난한 시골이었으리라.
남들과 똑같이 없는 살림에 소녀의 부모는 민며느리로 넘기다시피 '딸을 처분'했고, 상대방이 양반의 후손이라는 말에 소녀 역시 은연중에 '좀 더 잘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을리라. 막상 시집에 왔을 땐 듣던 것과는 달리 허울만 양반이었을 뿐, 글 모르는 남편과 모진 시어머니와 배고픈 살림살이들이 새색시를 반기어주었다고 한다.
처음 본 신랑과 합방하는 날, 그 집에는 새로 들어온 며느리의 손에 쥐어줄 수저도 없었다고 한다. 신혼의 단꿈은 애초에 없었고 신혼 첫날 밤에 뒷산 나뭇가지를 둘 꺾어 한참을 손바닥에 쥐고 비빈 다음에야 초라한 식사를 하고선 민며느리의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사흘 밤낮으로 설명해도 다 못할 고난이 끝나고 새색시는 여든이 되었고 슬하에 아들 셋, 딸 하나를 두었다. 자식들의 사연들에서 그 고난들의 일부를 엿볼 수 있다.
- 막내아들, 크게 자랑스러울 것도 없고 못난 것도 없는 무난한 막내 아들은 무뚝뚝한 말로 자주 주인공을 찾아뵈며 무미건조한 관계를 이어나갔다. 막내가 취직하던 날, 집안 모두가 각자의 밥그릇을 챙기게 된 걸 기뻐했다고 한다.
- 고명딸, 학교보낼 돈이 아까워(여자가 무슨 공부를한다고!) 철이 들 때까지 산에서 풀이나 베어오고 읍내에서 막걸리나 받아오던 딸은 부모의 무관심과 방치에도 불구하고 공장 여공으로 자신의 삶을 시작하였고 무슨 재주가 있었던지 성실한 남편을 만나 대기업 임원 부인이 되었다.
- 셋째, 태어난지 얼마 안 되어 갑자기 열에 시달렸다. 기껏 열병에 의사를 찾아가기엔 돈이 아까웠던 부모와 이웃사람들은 한참 뒤에야 '소아마비'라는 단어와 의미를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단어는 셋째를 담당했던 의사의 입에서 나온 것이었다.
- 한국전쟁 직후 태어난 둘째 아들. 오전에는 '재건학교'라고 부르던 천막아래 선교사의 수업을 열심히 들었고 오후에는 소를 끌고 산을 두어 개 넘어가서 풀을 먹였다고 한다. 그가 가장 부러워하던 것은 해질녘 소를 다시 불러 집에 가던 길에 가끔 마주쳤던 친구들의 중학교 교복이었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중학과정을 재건학교에서 마친 뒤 부모 몰래 그 동네 명문고 진학시험을 치르고 고학으로 공무원이 되었고, 그 덕에 시골 이웃집에서 가장 부러워하는 집이 되었다.
- 맏아들, 시골 정서에 맞게 집안의 모든 돈은 맏아들에게 투자되었다. 온 집안의 역량을 쏟아 고등학교도 보냈으나 학업은 변변찮았다. 졸업 후 맏아들의 바램대로 논밭을 팔아 이웃 대도시에 콩나물공장도 세워주었건만 얼마 가지 않았다. 그 공장은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고 덤으로 빚을 남겼다. 그 후 그는 알콜에 의지하다가 오토바이 사고로 후손 없이, 그의 어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먼저 떠났다.
항상 겸손했고 슬펐고 부족하게 살았던 그 노인은 작년 여름 세상을 떠났다. 손자로서, 어릴 때 할머니께 한글을 가르쳐드렸고 성년이 되어서는 시골의 이웃이 부러워할만한 학교에 합격하여 자랑거리가 되어드렸고 청년이 되어서는 나쁘지 않은 월급으로 기분좋게 용돈을 드릴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둘째 아들의 맏이가, 서툰 낫질로 찾아 뵌 후.
Cheer Up!
Thank you.
댓글을 썼다 지웠다 몇 번을 반복하다가 때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닫고 포기했습니다. 리스팀으로 제 마음을 대신합니다.
감사합니다. 어릴 때 할머니와 함께 지낸 기간이 많아서 구구절절 할 얘기가 더 많은데 끊어낸 이야기가 더 많았습니다. '말 못할 그 느낌'이라는 말이 큰 칭찬으로 다가옵니다. 다시 한 번 리스팀 감사드립니다.
아 먹먹해지네요..ㅠ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반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림 보러 자주 들르겠습니다.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오는 글입니다. 할머니의 일생이, 그 서글픔과 애락이 이 짧은 글에 오롯이 담겨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제가 미욱한 눈이지만,, 좋은 문장을 지니셨네요! 건필하시고, 앞으로 자주 뵈어요^^
감사합니다. 어딘가 미리 끄적였던 글입니다. 다시 봐도 그 때의 제 마음이 잘 보이네요.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어느새 그리움은 희미해져가네요.
정말 @daegu님 글 볼 때마다 많은 생각과 감상에 빠집니다. 그리움이 매우 잘 느껴지는 글이네요 ^^
고맙습니다. 왕성한 활동 잘 보고 있습니다. 따뜻한 글 많이 써 주세요.
굴곡 많은 삶으로
자손들의 앞길을 닦으시는 동안
사진속의 강아지풀처럼 여무는 꿈을
노을 속에 감추고 사시던 분들
자주 기억해 드리고
한 번이라도 더 찾아 뵈면 기쁘다 하시겠지요.
감사합니다.
당시에 순탄한 삶을 살던 분이 얼마나 계실까요. 할머니가 주신 무형의 재산 덕분에 부족하지 않게 살고 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환갑 넘어 처음 바다구경을 하시고, 그해 처음 온천 목욕탕을 가시고는 이게 운동장인지 목욕탕인지 모르겠더라 하시던 장면도 떠오르네요. 댓글
감사합니다.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무슨 이야기를 드릴 수 있을까요. 고마워 하실 거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날은 첫 벌초였습니다.
사라지고 나서야 보이는걸까요? 저는 참 아직 멀었나봅니다.
잠시나마 먹먹한 마음으로 부모님을 떠올려 봤네요.
자주 뵐게요
큰 사건이나 계기가 없이는 주변 사람이나 일상에 대해서 다른 눈으로 보기 힘들더라고요. 할머니 관련해서는 돌아가시기 한 달 전에 '시골 한 번 다녀가거라'는 말씀을 하셨을 때 귀찮아 하면서도 뵈러 갔었다는 거. 참 다행이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