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日期)
일기 (日期)
밤새 비행을 마치고 아침 8시 30분, 한국에 도착했다.
도착해서 유심을 바꾸려는데, 아뿔싸. 전날 갔던 카페에 유심을 두고 온 것 같다. 일단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두 정거장 전에 내려 유심을 새로 구매했다. 10일간 유예된 문자가 쏟아졌다. 심각하지 않은 일 두엇 정도가 기분 좋게 밀려있었다.
집에 가는 길엔 익숙한 동네가 눈에 들어왔다. 고작 10일인데. 그간 봤던 동네 중 가장 아름다웠다. 날씨가 생각보다 선선하고 햇볕도 예뻤다.
집에 도착했더니, 택배가 8개나 와있다. 뭘 이렇게 많이 시켰지? 힘들어서 뜯어 보진 못했다. 주섬주섬 방으로 들여놓는다. 며칠이나 이렇게 방치돼있었을까, 같은 건물에 사는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집에 들어오니 낯선 냄새가 난다. 타인의 방에 들어온 기분. 좋지도 싫지도 않은 냄새를 맡으며 컴퓨터를 켜고, 보일러를 튼다. 음악을 틀고, 10분 정도 가볍게 그 곡을 따라쳤다.
반가운 이 몇 명과 밀린 전화를 하고, 그대로 잠들었다. 한 세 시간 잤나? 사포 같은 발의 감촉에 놀라 잠에서 깼다.
일어나 조금 움직였더니 허기가 져 좋아하는 동네 중국집에서 짬뽕 한 그릇을 시켜 먹고, 드립백 커피를 대충 내려 마셨다.
인도네시아에서 시계를 볼 때마다 두 개의 시간을 함께 계산했다. "지금 한국 시각은 8시고, 여기 시간으론 6시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동생과 엄마는 여기만 생각하라고 타박했다. 엄마와 동생은 물건을 살 때마다 그 값을 한국 돈으로 바꿔 계산했고, 나는 그것과 나의 시간 계산이 같은 선 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인도네시아에서 한국 시간으로 살았다. 매번 새벽 4시에 눈을 떴지만, 한국 시각으론 6시였기 때문에 더 자지 않았다. 내가 일어나는 시간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좀 더 피곤하더라도 몸의 기억을, 일상의 루틴을 잃고 싶지 않았다.
돌아올 땐 말레이시아를 경유했다. 비행기 연착으로 환승 시간이 촉박했고, 핸드폰은 시간을 잘 못잡았다. 나는 인도네시아 시간, 말레이시아 시간, 한국 시간을 계산하며 비행기를 겨우 탔고, 지쳐 잠들었다.
6시간 30분의 긴 비행을 하면서 자다 깨기를 반복했다. 내 핸드폰은 여전히 인도네시아 시간에 맞춰져 있었고, 엄마 핸드폰은 말레이시아 시간에 맞춰져 있었다. 절대적 시간 기준이 되던 엄마의 손목 시계는 자동시계였고, 엄마는 시계를 풀어 놓았기 때문에 시간이 멈춰 있었다. 내가 잠든 사이에 핸드폰 시간이 바뀐 건 아닌지, 어떤 시간을 믿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나는 잠 때문에 정신이 몽롱했다. '언젠간 도착하겠지'. 결국 시간을 내려놓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롯이 인도네시아 시간에 몸을 맡겨볼 걸 그랬다. 익숙한 감각을 잃는 게 두려워 내려놓지 못했던 것을, 이렇게나 쉽고 간단하게 포기해버리다니. 왠지 허망한 마음이 일었다. 또 돌아와 세 시간이나 잤으니, 오늘 언제 잠들 수 있을지도 잘 모르겠다.
지금은 인도네시아 시각으로 오후 세시. 이미 내 몸의 시간 감각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지만 그쪽에 맞추는 편이 더 나을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여기도, 저기도 아닌 시간 언저리를 방황하면서 묵은 짐을 정리하고, 밀린 택배를 확인하고, 다시 일을 시작한다.
긴 여행을 하고 오셨군요. 택배는 제가 풀어보도 싶은 심정이네요. 집에 오자마자 음악을 틀고 같이 연주하시는 모습을 상상하니 멋있습니다^^
실제론 멋있지 않고 껄렁껄렁 건성건성 대충대충입니다. 손 버릇 같달까요. 내일부턴 다시 연습하겠다고 마음 먹었지요! 택배 좀 대신 풀어주세요.. 넘 귀찮아요...
꾸욱 들렸다가요
매번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몸에 각인된 질서를 벗어나는 일은 참어려운 거 같아요. 습관이란 말도 그렇구요. ^^
(매번 느끼는 거지만, 나루님의 글은 잔잔하면서도 많은 생각을 보여주셔서 읽고나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되는 거 같아요.ㅎㅎ )
아직도 시간이 몇 시인지 몸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런 걸 보면서 몸에 각인된 질서를 벗어나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함께 하고 있어요. 저는 격정적인 사람이라, 글만이라도 담담하게 써보고 싶습니다:) 늘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로그 어딘가 연주하신 음악 포스팅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글을 읽다가 직접 연주하시는 감성도 글의 감성과 맞닿아 있을지 문득 궁금해지네요.^^
저는 이 댓글을 보고 식은땀이 났답니다. 진심으로 무서워졌어요. 제 음악의 감성도 글의 감성과 맞닿아 있을까요? 저는 아닌 것 같은데, 판단은 제가 하는 게 아니니 비워둬야겠지요. 자신있게 내놓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이 아쉽습니다:)
아 제가 부담을 드렸나요?ㅎㅎ 종종 전공자 분들이 연주 포스팅하시는 걸 본 적이 있어서 여쭤봤습니다.
저는 나루님 글에서 느껴지는 조금은 무미건조한 감성이 참 좋거든요.^^
아뇨아뇨. 전혀 아닙니다. 저도 뜬금없이 한 번씩 올리곤 합니다. 다만 제 작품에 스스로 자신이 없어서 지레 겁먹은 것이지요. 외려 안좋은 이미지를 남길까하고요. 저도 제 글이 왜 무미건조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고보면 저는 무미건조한 사람인걸까요?ㅎㅎ 세심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미건조한 글에서 무미건조함만 읽을 수 있다면 제가 좋아하긴 힘들거에요.ㅎㅎ
'군더더기 없는 진심' 정도로 조금 다르게 표현해본다면 어떨까요?^^
좋은 글 늘 감사합니다:)
돌아오셨군요! 회복하는데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가끔은 여행에서 새로운 루틴을 만들어보는 것도 또 다른 경험이 되는 것 같아요.
그러게요. 다음 여행을 가게 된다면 그 때는 온전히 다른 시각에 몸을 맡기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돌아올 수 있으니 여행이 즐거운 것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