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m TV #5. 호구 게임

in #kr-movie6 years ago (edited)

A short summary in English is to be found at the end of this 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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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40년 전의 영화, 그것도 상당히 유명한 작품에 대해 스포일러라는 것이 가능할까. 처음으로 볼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는 당연히 가능하다고 해야 마땅할 것이다.

하지만 보디 히트(Body Heat, 1981)는 시작하는 순간부터 자체 스포일러로 기능한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테마 음악은 뭔가 불길한 사건을 암시한다. 전형적인 느와르 배경 음악의 베이스를 살짝 늦추고, (영화의 제목과 더불어) 극중 두 주연의 에로틱한 관계를 암시하는 멜로디로 약간의 분산을 시도할 뿐.

존 배리(John Barry)가 작곡한 영화 보디 히트 의 테마 음악

시대를 가리지 않는 영화 애호가라면, 이 영화가 빌리 와일더(Billy Wilder) 감독의 이중 배상(Double Indemnity)의 리메이크나 다름 없음을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에는 구체적인 줄거리까지도 알고 들어갈 것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영화의 장르와 그에 따른 대략적인 전개들은 모든 이가 어느 정도는 예상하는 것들이다. 제 아무리 신작이라 하더라도, 마케팅이란 것을 하는 영화인 이상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관객이 영화를 보기도 전부터 미리 기대하는 것들이 있다는 점 말이다.

그러나 보디 히트는 그런 기본적인 정도의 스포일러보다 더욱 구체적으로 전개에 대한 뚜렷한 암시를 많이 하는데, 이 영화에 대한 리뷰에서 흔히 보이는 지적이 바로 이 부분이다. 주인공이 '호구 잡히는' 내용인 것을 너무 반복적으로, 너무 뻔하게 계속 알려준다는 것.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되려면, 반전적인 요소가 모자란다는 불만이 전제가 되지 않을까 한다. 너무 많은 힌트를 주는 바람에, 놀랄 만한 요소가 없다는 이야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이 글의 시작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영화는 그 시작부터, 자체적으로 하나의 거대한 스포일러이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가 그런 뻔함을 의도했다고 생각한다. 반전이나 우연적 요소들, 두뇌 싸움이 아니라, 위험을 알면서도 수렁에 끌려들어가는 인간상을 그저 대놓고 그린 영화라는 이야기이다.

주인공 네드의 특징은 영화 시작부터 뚜렷하게 제시된다. 변호사이지만 상당히 허술하다는 점, 그리고 여자를 많이 밝힌다는 점.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매디를 만난다.

촬영 당시에는 실제로 굉장히 추웠다지만, 땀이 계속 흐를 정도의 무더운 플로리다의 여름 밤이 영화의 배경이다. 빅밴드가 잔잔히 연주하고 있고, 아이스크림 등을 사먹으며 노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 인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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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빅밴드가 연주하는 것은 쳇 베이커(Chet Baker)의 버젼으로 유명한, That Old Feeling 이다. 해리 제임스의 트럼펫 밴드가 연주한 버젼을 사용했다. 가사는 이미 헤어진 옛 연인을 다시 만난 내용이지만, 익숙한 어떤 느낌, 주로 슬프거나 불길한 예감을 은근히 남기기에 좋은 곡이기도 하다. (이 장면에서 네드는 매디를 처음 만났지만, 매디가 이미 네드에 대한 사전 조사를 마친 상태였다는 것이 후반부에 드러나게 되기도 한다.)

I saw you last night and got that old feeling
간밤에 널 봤는데, 예전의 그 느낌이 왔어
When you came in sight, I got that old feeling
네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 예전의 그 느낌이 들었지
The moment that you danced by, I felt a thrill
네가 춤추며 지나갈 때, 마음이 설레였어
And when you caught my eye, my heart stood still
네가 내 눈에 띄었을 때, 심장이 멎어버렸어
Once again I seemed to feel that old yearning
다시금 예전의 그 느낌을 받는 것 같았고
And I knew the spark of love was still burning
사랑의 불꽃이 아직도 타오르고 있음을 알았어
There'll be no new romance for me, it's foolish to start
이제 새로운 로맨스란 없어. 시작한다면 바보지
For that old feeling is still in my heart
예전의 그 느낌이 아직도 마음 속에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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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드(윌리엄 허트)와 매디(캐슬린 터너)

첫 만남에서 매디는 강한 인상만을 남기고 사라져 버린다. 이 시점에서, 네드가 '호구 잡히게 될 것'을 시각적으로 암시하는 장면이 한 번 등장하기도 한다. 눈치가 빠른 관객은 이미 매디가 네드에게 나쁜 의도로 접근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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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매디가 남긴 힌트로, 네드는 그녀가 사는 동네의 바를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거기서 마주치는 두 사람. 매디는 처음부터 남편이 있음을 밝혔고, 바에서 "우연히" 만난 후에도 네드를 밀어내는 발언들을 한다.

이 만남이 매디 입장에서도 로맨스였다면 그녀의 행동들이 일종의 '비싼 척'일 수도 있었겠지만, 이것은 그런 상황이 아니다. 매디는 네드가 자의로 덫에 끌려들어올 것인지 테스트하는 것이다. 정말로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해서 상대방을 끌어들여야 하는 매디는 네드가 자신을 얼마나 원하는지 보기 위해, 계속해서 말과 행동으로 그를 시험한다. 한 시점에서 네드는 이런 발언까지 한다.

"난 그렇게까지 간절하지 않아요."

이미 반 이상은 "쿨한 척"하기 위한 발언이지만, 매디는 네드로부터 이런 식의 표현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상황을 몰아간다.

영화를 보면서 두 사람이 언제 관계를 갖는지보다는, 매디가 그전까지 얼마나 많은 귀찮은 행동들을 네드로부터 요구하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더 재미가 있다. 두 사람 간의 긴장감을 섹슈얼한 것으로 해석하기 쉽지만, 매디가 하는 것은 섹스 자체를 위한 유희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네드가 순간적인 모멸감 또는 귀찮음을 감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매디는 다른 희생자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녀는 그에게 계속해서 도망갈 기회를 주었다.

결국 매디가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 네드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게 된다. 영화 보디 히트는 네드가 여러 번 빠져나올 수 있었음에도 계속해서 수렁에 빠지는 것은 물론, 자신의 한계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매디가 말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결정적인 순간을 겪으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느낌을 갖고 계속 끌려가는 것을 그리고 있다. 매디가 원하는 범죄를 저지르기 전부터도, 네드에게서는 일종의 무력감과 체념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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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드를 한심하다는 듯이 바라보는 방화범/의뢰인(미키 루크)

네드와 매디를 제외한 대부분의 다른 인물들은 딱히 의도치 않고도 네드에게 경고하거나, 걱정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 등장한다.

게다가 영화는 매디가 네드에게 모자를 선물하는 것, 물 위에 떠 있는 오리 인형, 광대가 차를 몰고 지나가는 모습을 네드가 뚫어지게 보는 장면 등을 계속 보여준다. 이는 모두 네드가 "호구 잡히게 될 것"을 언어적, 혹은 문화적으로 암시하는 장면들이다. 가령,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음을 뜻하는 sitting duck이라는 표현이 있다. 또한 네드는 온갖 골칫거리에 직면하는 경우를 비유적으로 '모자를 써야 할 것 같은 순간'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고 매디가 사라졌을 때, 네드는 화장실에서 벌 서듯이 서 있는 (성매매를 암시하는) 소년과 마주치기도 한다.

최소한 영어권의 관객은 이러한 암시들이 과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을 계속 주입하는 기분이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예기치 못한 반전을 의도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 속의 지나치게 더운 날씨 역시 범죄하기 좋은 환경이라고, 명시적으로 표현도 된다. (까뮈의 이방인에서는 주인공이 총을 거듭 쏘게 된 경위에 햇빛이 지나치게 강하게 얼굴에 내리쬐었다는 이유도 포함이 되는데, 이처럼 신경을 긁는 환경 역시 인간의 과격한 행동을 부를 수 있음은 당연하다.) 영화의 제목은 격정뿐 아니라 무더운 날씨에 의한 것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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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장면의 매디

큰 반전도, 악역의 불투명함이나 교체도 없는 영화가 꾸준히 거론되고 수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범죄를 저지르는, 그것도 타인의 의도에 따라서 범죄하는 '호구'가 느와르 영화, 또는 범죄 스릴러의 하위 장르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략 50년 대까지의 영화에 범죄하고도 검거되지 않는 결말이 나면 안 된다는 명시적인 검열 기준이 적용되었다면, 그 중에서도 이중 배상을 위시한 영화들은 이러한 '호구가 범죄하는' 장르를 개척하였다. 그것이 80년대 초의 보디 히트등에 의해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보디 히트의 지속되는 명성에서는 영화 장르를 넘는 요소도 찾아볼 수 있다. 인간 본연의 어리석음, 그리고 지속되는 불길한 예감을 무시하고 당장의 달콤함을 위해 앞만 보고 전진하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그 모습을, 이 영화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 회차 보기

쟈칼의 날
더블 제퍼디: 브리트니 머피의 초기작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 죠지 스마일리
7~80년대의 두 영화


For @sndbox

In this post I take a look at the 1981 movie Body Heat. I find it to be an interesting depiction of a man falling deeper and deeper into trouble despite all the warning signs he himself is capable of fee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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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네드의 특징은 영화 시작부터 뚜렷하게 제시된다. 변호사이지만 상당히 허술하다는 점, 그리고 여자를 많이 밝힌다는 점.

내 이야기인가 ㄷㄷ

하 미키 루크의 꼬꼬마 시절 모습이라니 ㅋㅋ

아하하 무슨 그런 자학 개그를 하시죠?

미키 루크는 저때도 충분히 아재 같네요. ㅎㅎㅎ

저거보다 좀 지난 시점이 리즈 아닌가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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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고하고 개방적이며 두려움 없는 시선이었다

바람의 그림자에 나오는 문구인데 ㅋㅋ 이 문구에 미키 루크보다 더 어울리는 배우를 본 적이 없음

저거는 상당수의 변호사/전문직에 해당하지 않을까요...

불현듯 "여행 첫날 현지 여자들한테 호구 털린 이야기"가 떠오르는군요ㅋㅋㅋ

ㅋㅋㅋㅋㅋㅋ 여기서도 기억해주시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제미누나~~~~

아무리 애기 그림 프사라지만 누나라니 징그러워욥ㅋㅋ

아따 여주 엄청 이쁘네여

저게 데뷔작인가 그랬을건데 요즘도 가끔은 나오시더라구요. ㅋㅋ

한번도 못본 영화들인데 시도해 보고 싶네요 ㅎㅎ

사실 80년대 영화라 해도 90~00년대 TV 영화보다 위화감이 적을 수 있죠. 게다가 느와르 장르 특성상 더 빈티지한 배경이라 사실상 시대가 무의미.

아.. 미키루크.... 그놈의 복싱만 아니었더라도..

ㅎㅎ항상 느끼는건데 저 분은 남자분들이 더 좋아해요.

'할리와 말보로맨' 이라는 영화가 있었죠.
제목에서 느껴지시지 않나요? 진한 페로몬의 향기가! -.-+
주연이 미키루크와 돈존슨이었는데 B급 액션이 참 가관이었습니다.
이때 미키루크 참 멋졌어요. 중2병들의 아이콘!!!!! +.+

캐릭터 이름이 할리 데이빗슨이군요. ㅋㅋ 부치와 선댄스 키드 생각이 났는데 안 그래도 비슷한 듀오 액션인 듯. 한번 봐야겠네요. 요즘은 그런 남성향 영화가 잘 안 나오죠.

엇? 이런 영화도 보시나요?
시민케인 같은 부류(?)의 영화만 보시는 줄 알았는데. +.+
스펙트럼이 상당하시군요!

넵, 흥미가 가는 점이 있으면 시시껄렁한 옛날 TV영화도 보고...딱히 가리진 않죠. 영화관에서 봐도 참을 수 없을만큼 싫은 영화가 있는 반면, 우연히 유툽에서 봤는데 의외의 매력이 있는 작품도 많으니깐요.

아 그러시군요. ^0^
저도 케이블 티비에서 방영하는 올드무비 참 재밌게 봅니다. ^.^
얼마전에는 '전선 위의 참새'를 하더라고요. 어렸을때 '골디 혼'을 맘조리며 연모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ㅎㅎ
올드무비 보면 그리운 얼굴들의 한창일 때를 볼 수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아요. ^.^

아하 저는 90년대 영화는 제일 적게 본 편이긴 한데 그래도 가끔 아는 것들 올리게 될 것 같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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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드라는 이름이 생각보다 흔한가 보네요~ ㅎㅎ

에드워드를 줄이는 방법 중 하나죠. ㅋㅋ 아, 에드워드뿐 아니라 뭐 에드거, 에드먼드 다 해당...

에드라고 안하고 네드라고 하나요>??
Ed 라고 줄이는 줄 알았는데... 몰랐네요 ㅋ

에드나 에디가 더 흔하죠. 네드도 있지만 애칭은 본인의 선호도에 따르는 거니까요.

저 영화를 봤는지 안 봤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포스트를 보고 "상당히 야한 영화 같은데" 라고 했던 것 같습니다.

생각보다 치밀한 묘사가 있는 영화였나 보네요.

네, 그냥 그런 씬들을 위해 줄거리가 돕는...그런 수준은 아닙니다. ㅋㅋ 저 개인적으론 그다지 야하다고도 못 느꼈고, 범죄 후에 발각이 시작되는 부분부터가 재미있었다는...주연 말고도 괜찮은 배우들이 나오기도 하고요.

Sounds cool I ll have to check it out :)

I'd say Billy Wilder's Double Indemnity is a more intelligent movie and is more, er...poignant. But Body Heat has its own charms. I especially like the 'getting caught' sequences. :)

재미있게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수선화님.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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