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m TV #2. 한겨울 밤의 노래

in #kr-movie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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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90년대 미국의 LMN(Lifetime Movie Network)은 실제 범죄를 영화화해서 방영하는 채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정도로 유명한 범죄자의 이야기들은 물론, 미국 각 지역에서 일어난 갖가지 드라마틱한 범죄에 살을 붙인 영화들을 만들었다. 개중에서 그럴듯하게 만든 것들, 특히 유명한 사건을 토대로 만든 것들은 재방영도 자주 하는 편이고, 유투브 등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이 채널은 현재도 비슷한 영화들을 제작해서 방영하지만, 더 이상 실제 범죄 이야기들을 다룬다고 보기 힘들다.) 영화적으로 훌륭해서 보는 영화와는 아예 다른 장르이지만, 실제 범죄에 관심이 있다면 나름대로 흥미로운 영화들이 꽤 있다. 물론 미스테리적 요소라곤 없고 누가 범인인지 애초부터 명확하기 때문에 가장 단순한 시청자들까지 포섭할 수 있는 류의 영화들로, 배우의 연기력으로 끌고 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1993년 자신의 22살짜리 애인을 총으로 쏘아 죽인 것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한 경찰의 이야기가 1996년, LMN 영화로 만들어졌다. 제임스 컬비키(James Kulbicki)라는 미국 메릴랜드 주의 경찰관은 막 성년이 된 편의점 직원 지나 뉴슬린(Gina Neuslein)과 내연 관계가 되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당시에 뉴슬린은 미성년자였고, 그녀가 성인이 되기까지는 연인 관계가 아니었다고 알려져 있다. 만일 그렇다면 원래는 상당히 순수하게 알고 지내는 동네 인연이었을 수 있다. 자라나는 사춘기 소녀 입장에서 크게 동경할 상대가 없는, 그런 작은 마을이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둘은 내연 관계가 되었고 그 결과 뉴슬린은 컬비키의 아이를 낳게 되는데, 그에게 양육비를 청구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벌어질 대로 벌어진 사이였지만 컬비키는 뉴슬린이 다른 경찰관들을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고도 한다. 결국 1993년에 뉴슬린은 사체로 발견이 되고, 처음부터 유력한 용의자로 꼽힌 컬비키가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따라서 컬비키와 뉴슬린의 사이가 나빠진 정확한 계기나 양육비에 얽힌 문제, 다른 연인들의 문제 등은 주로 컬비키를 기소한 검사 측의 논리에 맞게 알려져 있다. 따라서 얼마나 실제에 부합하는지는 장담할 수 없는데, 일단 이 둘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는 그 논리를 철저히 따르고 있다.

그 누가 봐도 전혀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이나, 관계 인물들의 이름을 바꾸어 만든 영화에서 여주인공 '줄리아'는 정말 답이 없을 정도로 순진한 인물로 그려진다. 어떻게 보면 백치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 감정 밖에 모르면서도, 모든 걸 좋게만 보려고 하기에 연민이 느껴지는 소녀 캐릭터이다. 한 10년쯤 전 젊은 나이에 사망한 배우 브리트니 머피(Brittany Murphy)가 줄리아로 열연했는데, 그녀의 첫 작품은 아니지만 아마도 처음으로 맡은 어두운 배역이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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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역할의 브리트니 머피

이 영화에서는 평이하면서 늘어지는 연출, 누가 찍었건 간에 별 의미가 없을만한 장면들에도 불구하고 두 주연의 강한 연기력이 일을 다 한다. 그 중에서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줄리아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한 노래를 따라하는 장면인데, 애니 레녹스와 데이빗 스튜어트로 이루어진 듀오 유리드믹스(Eurythmics)의 유명한 1985년 곡, There must be an angel(playing with my heart)이다.

유리드믹스의 There must be an angel(분명히 천사가 있어)

뮤직 비디오는 현란하지만, 줄리아는 깜깜한 밤에 차를 세워둔 허허벌판에서 이 노래를 따라 부른다. 한 겨울에 허름한, 패딩이라고도 할 수 없는 '돕바'를 입은 줄리아의 입에서는 허연 김이 연신 뿜어져 나오는데, 연인 '조'와 싸우다가 갑자기 "이 노래 너무 좋아"라며 춤까지 추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순간은 조가 그녀에게 낙태를 종용하는 도중에 찾아온 것으로, 줄리아가 얼마나 현실 감각이 없는지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조 역시 어이가 없어서 쳐다볼 뿐인데, 이내 줄리아가 원래 그런 캐릭터라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그만 설득을 포기하고 만다.

'내연녀'이기 떄문에 줄리아가 조와 똑같이 평가절하 당해야 마땅하다고 느낄 시청자들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렇게 멍청할 정도로 순진한 아이야말로 자신이 노래하는 가사의 '천사'가 아닐까 착각까지 들게 하는 장면이다. 연기자 본연의 힘인지, 노래의 힘인지 모르겠지만 (또는 두 번째로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영화 전체에 의미를 불어넣어주는 씬이다. 나중에 어린 엄마가 되어서도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 조를 끝까지 믿는 줄리아의 바보 같은 모습은 이 노래하는 장면으로 인해 납득이 가능해진다.

이 영화를 찍을 당시에 브리트니 머피는 스무 살이 채 안 된 나이였다. 서른 전후의 배우들도 10대 연기를 종종 하는 현상이 잦은 것을 고려하면 줄리아 역은 실제 나이에 맞는 역할인데, 사실상 나이보다 훨씬 성숙한 연기를 요하는 역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브리트니 머피는 보통 관객에게 금발의 모습으로 기억이 되는 듯 하는데 이 영화에서는 검은 머리에 창백한 피부, 아마도 가난한 이민자 출신 가정이 아닐까 생각하게 하는 차림새를 하고 있다. 뛰어난 연출은 없지만 희생자에게 연민이 가도록 하는 장치들이 많다.

물론 현실의 줄리아, 아니 지나는 순진한 '천사'와는 거리가 멀었을 것이다. 반면 조 캐릭터는 영화에서는 아예 사이코패스 급의 악인으로 나온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오히려 그런 인물은 아닐 거라고 생각이 들게 한다. 올해 초에는 조, 아니 이제는 60세가 다 된 현실 속의 제임스 컬비키가 새로 재판을 받을 길을 모색하고 있다는 뉴스가 있었다. 줄리아, 아니 지나 뉴슬린을 죽인 총알을 분석한 전문가 증인의 학력과 자격증 위조와 잇다른 자살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인된 자격이 없는 증인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20년간 감옥에 갇힌 것인지, 그 때문에 재판 결과가 뒤집어질지는 아직 두고봐야 할 일이다. (그리고 전문가 증인의 자격 위조는 컬비키의 새 변호사가 알아낸 사실로, 만일 판결이 뒤집힌다면 그 자체로 새로운 TV 영화감이 될 것이다.)

영화 자체가 수작이라거나 한 것이 아니라서인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져서, 이제서야 밝힌다. 이 영화의 제목은 이중 위험(Double Jeopardy)이고, 감독은 데보라 달튼(Deborah Dalton)이다.

Double Jeopardy란 구체적으로는 한 사람이 같은 사건으로 두 번의 재판을 받는 경우를 가리키는 용어이지만, 이중 재판/처벌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 도입된 일사부재리 원칙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는 표현이기 때문에 '일사부재리'로 이해하는 게 정확하다. (이 흔한 용어를 제목으로 하는 영화는 아마 더 있을 것이다.) 경찰관 '조'가 주변인의 거짓 증언을 사주하여 일단 첫 재판의 고비를 어떻게든 넘기고, '일사부재리' 원칙을 이유로 재판을 다시 받을 가능성을 없애려고 하기 때문에 붙은 제목이다.

만일 지난 20년간 옥살이를 해온 컬비키가 실제 범인이 아니라면, 영화의 줄거리상 교활하고 치밀한 인물로 그려졌다는 점이 그에 대한 편견에 일조했을 것이기 때문에 굉장히 유감스러운 것으로 드러날 가능성도 있다.

Double Jeopardy란 언뜻 들으면 그 유명한 빌리 와일더(Billy Wilder) 감독의 이중 배상(Double Indemnity)과 흡사한 제목인데, 작품성으로나 뭐로나 비교할 수 없는 저예산 TV 영화이다. 흔한 표현, 흔한 제목이라서인지 Victim of the Night(밤의 희생자)이라는 다른 제목도 하나 더 붙었는데 더더욱 저렴한 제목이다.

희생자들은 미화되게 마련이고, 현실에서는 크게 동정의 여지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영화를 통해서는 승화된다. 영화 속 인물에게 느끼는 연민이 실제 인물과 전혀 상관이 없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어쨌든, 한겨울에 하얀 김을 내뿜으며 자기 인생이 나락으로 떨어지는지도 모르고 연신 노래하던 한 소녀의 모습이 가끔은 생각난다. 현실에서는 그런 바보들이 또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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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미님 글에서 돕바 라는 말을 오랜만에 보네요.
요즘 이 단어를 아는 분들이 많지 않을텐데...

사건은 흥미롭네요.

엄마가 가끔 쓰시던데 검색해보니 패딩 광고에도 나오더군요. ㅎㅎ

근데요 태그 마나마인??? 이건 모에요?

오치님하고 몇 분이 만드신 컨텐츠 사이트인데 아직 비즈니스 모델은 아직 준비중이고...필진 글을 스팀잇에서는 태그로 모아두거든요.

아!!! 이런일도 있었군요!! 신기하네요ㅋㅋ
알려주셔서 감사해요ㅎㅎ

우리나라에도 사랑과 전쟁이라는 훌륭한 3류재연물이 있죠ㅋㅋ
사랑과 전쟁을 영화화시키면 이런 느낌이겠군요ㅋㅋ

본 적은 없는데 가끔 언급되는 걸로 생각해보면...그 정도는 아닙니다.ㅋㅋㅋ

역시 풀어서 나열하는 능력이 좋으심

음 그런건가요. ㅎㅎ

한국판으로는 나름 사랑과전쟁 같은 느낌이네요

제목만 알아요. ㅎㅎ 이런 영화들도 유투브로 알았는데 이런 류는 실화로만 만들었음 좋겠어요.

기분탓인가..? 이런 비슷한 내용을 영화 등등 몇번 본거 같네요. ㄷㄷㄷㄷ

아마 많이 일어나는 일이라서 그런듯요!

제이미님 덕분에 영화 한 편 본 것 같습니다.
브리트니 머피.. 너무 젊은 나이에 떠났어요~

그러게요. 서른 조금 넘었었다고 본 것 같아요.

경찰청 사람들 미국판? ㅎㅎ
범죄물은 피해자에게 이입하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내용인데 묘하게 보게 됩니다

사실 경찰청 사람들을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ㅎㅎ 이 채널은 그냥 다 개별적 영화들을 만드는데 저는 다 유튜브에서 알았죠!

영화니까 화려하지 현실에서 줄리아는 죽느냐 사느냐 기로에 있었을것 같아요.
아이에 아버지가 아이을 외면하면 엄마는 아마 용사가 되었을 거애요.
아무리 철이없다고 해도 엄마는 엄마니까요. ㅎㅎ

사실 영화에서도 화려하진 않았지만, 현실에 비하면 그렇게 나온 거겠죠?!
그 아이는 이제 성인이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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