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 현대사" 5 - 제3장 (1/3) 한강의 기적

in #kr-history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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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

여가가 없는 시민들에게 자유와 민주주의는 아무 의미가 없다. 90퍼센트 사람들은 항상 일만 하고 여가가 없는 반면, 10퍼센트 사람들은 늘 놀면서 전혀 또는 거의 일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허깨비에 지나지 않는다. 마그나카르타, 권리장전, 미국 헌법, 자유와 평등이라는 프랑스의 모토는 한갓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 버나드 쇼, "쇼에게 세상을 묻다."

제3장 경제발전의 빛과 그늘: 절대빈곤, 고도성장, 양극화

한강의 기적, 이륙에서 대중소비사회로, 경제개발 5개년계획
한국형 경제성장의 비결, 외환위기 원인과 결과, 양극화의 시대
이렇게 총 6개의 절로 이루어져 있다.

오늘은 3장의 첫번째 시간으로 '한강의 기적'
'이륙에서 대중소비사회로' 이렇게 2개의 절을 살펴본다.

한강의 기적

물질적 풍요에 대한 열망은 인간의 모든 욕망 중에서 단연 강력하다. 대한민국이 정통성 있는 민주공화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 가운데 하나가 바로 경제발전이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하며, 박정희 대통령을 무에서 유를 창조한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위대한 지도자라고 칭송한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민생이 파탄에 빠지고 국민경제가 성장 동력을 잃었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한국 경제를 불평등과 반칙이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자본주의라고 비판하며 그 책임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묻는다. 한국 사회의 부정적 현상이 모두 박정희 독재에서 시작되어 신자유주의에 굴복한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본격화했다고 지적한다. 어느 쪽이 맞을까? 나는 둘 모두 옳고, 또 둘 다 옳지 않다고 판단한다.

유시민의 의견처럼 둘 모두 옳고, 또 둘 다 옳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결국 '방향'이다.

좋은 것은 별로 신경쓸 필요가 없다.
좋지 않은 것을 바꾸고 개선시키고 진보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한국 경제를 불평등과 반칙이 난무하는 약육강식의 정글자본주의라고 비판하며 그 책임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묻는다"

당연히 이렇게 판단하고 가르쳐야 한다.
역사의 평가란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다.
둘다 옳고 둘다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비겁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그 시대를 지나왔고 다시는 그러한 시대로 되돌아 가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부끄러운 부분은 어떤 것인지 더 치열하게 찾아내고 알려야 한다.
다시는 그 부끄러운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말이다.

한강의 기적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D%95%9C%EA%B0%95%EC%9D%98%20%EA%B8%B0%EC%A0%81

한강의 기적이란 경제제일주의를 내세운 장면 내각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서독이 선진국으로 빠르게 도약한 것'을 라인강의 기적이라 부른 것에 빗대어 6.25 전쟁을 치르고 국토와 인력이 넝마가 되어버린 대한민국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장면이나 5.16 이후의 김유택, 송요찬 등 여러 관료, 경제인의 입에 오르내렸다. 오늘날에는, 1950년 6.25 전쟁이후 1997년 구제금융이 있기까지의 대한민국 경제 초고속 성장을 상징하는 말로 두루 쓰이고 있으며 1990년대부터는 이를 외국에서 '아시아의 네 마리 용' 국가와 함께 동아시아의 기적(The East Asian Miracle)이라 부르고 있다.

난 나무위키를 매우 사랑한다.
위키라는 것이 처음 생겨나서 그 힘이 미약할때는 참 별볼일 없었고
사실 그 내용이란 것도 틀리는 것이 너무 많아서 정보라고 이름붙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의 위키 내용은 왠만한 역사서를 읽는 것보다
오히려 균형잡힌 시각을 갖게 해주는데 이보다 더 좋은 자료를 찾기 어렵다.

다음 포스팅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이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의 최초 근원이 '장면 내각'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박정희가 아니었으면 대한민국의 매래도 없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그 짧았던 장면 내각에서
먼저 시작했던 것이라는 것을 애써 부인한다.

1950-2010.jpg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주는 사진이다.
아마도 유럽이나 미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라에서
1950년대 2020년대를 각각 사진으로 비료하면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전에 식민지 수탈을 당했고, 전쟁을 치루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한민국의 선진국으로의 도약은 사실
'기적'이라는 말 외에 설명할 방법은 별로 없어 보인다.

"정말 우리는 선택받은 민족이 아닐까?"

아시아의 네 마리 용
https://namu.wiki/w/%EC%95%84%EC%8B%9C%EC%95%84%EC%9D%98%20%EB%84%A4%20%EB%A7%88%EB%A6%AC%20%EC%9A%A9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아시아에서 일본의 뒤를 잇는 급속한 경제 성장을 이룬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네 국가/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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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리의 용 중에서 한국을 제외한 나머지 3 국가를 합친 부분과
대한민국을 비교하면 우리의 성장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이제는 어느 한 곳과만 비교할 수 없다.
나머지 3개를 모두 합해야 대한민국과 비교가 가능한 상태인 것이다.

만약 여기에 '통일된 한국'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
통일 후 한 10년쯤 발전한다면, 그 이후는 어떤 모습일까?

G7인지 G8인지 특정한 나라들의 친목질 모임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친목질이 아닌 진정한 세계 강대국 Top 5
우리나라가 당당히 그 이름을 올려야 할지 모른다.

역사는 두 길을 가지 않는다. 민주화를 이루었지만 낡은 경제구조를 혁신하지 못했으며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과거와는 양상이 다른 정글법칙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10년의 진보정부는 역사적 경로의존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역사에는 연습이나 실험이 없으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는 바꿀 수 없다. 한국 경제는 1970년대에 이륙離陸, take-off했다. 이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저 사실일 뿐이다.

"역사는 두 길을 가지 않는다."
이것은 인생에도 적용되는 참 멋진 말이다.
내가 살아온 길은 반드시 그 길 하나일 것이다.
아마도 다시 그 길을 걸어도 또 똑같은 길을 걸을 것이다.

"10년의 진보정부는 역사적 경로의존성을 극복하지 못했다."
너무나도 뼈아픈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
우리는 더 깨어야 하고, 강한 개인들이 모여 이 경로를 바꾸어야 한다.

“산업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독재를 해야 했다”,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은 동시에 이룰 수 없다”, “독재를 해서 경제를 발전시켰기 때문에 민주화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떤 '말도 안되는 말'을 하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다 자신의 어떤 부분을 감추고 싶기 때문이던가
혹은 숨겨진 의도가 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멍청하거나...

"민주주의는 훌륭하고 항상 올바르다"라는 말처럼 어리석은 것도 없을 것이다.
만약 일반 기업체의 회사 직원이 한 10명쯤 되는 초초초 소기업일때
회사의 업무처리를 민주적으로 하면 그 회사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독재가 경제를 발전시켰다는 말은 오직 독재를 정당화 하기 위한 괘변일 뿐이다.
대한민국에는 아직도 박정희의 전두환의 독재가 정당화되어야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1970년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다. 대한민국이 13억 달러를 수출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1976년 1월, 현대자동차가 대한민국 최초의 브랜드 승용차 '포니'를 출시했다. 그해 여름방학 때 사업을 하는 이종사촌 형님이 빨간색 포니를 몰고 시골 외가에 왔다. 쏟아지는 비를 뚫고 흙탕물을 가르며 농로를 달려오던 포니의 모습은 감동적이었다.

약간 생뚱맞지만 유시민 작가는 국내 최초의 TV, 금성 VD-191의 사진을 올려놓았다.

국내 최초의 TV, 금성 VD-191.jpg
<사진 출처: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

WIKITREE | 국내 최초의 TV 'VD-191'의 모든 것
http://www.wikitree.co.kr/main/news_view.php?id=174810

위 사이트에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다.
그런데 왠지 사신이 컬러로 되어있으면 그 맛이 잘 살아나지 않는 듯 하다.

이 TV 사진을 보면서, 예전 집에 있던 최초의 TV도 생각난다.
화면을 보호하기 위해서 슬라이딩 방식의 문이 있던 그 TV...
그 TV로 홍수환의 4전5기 경기를 보았다.^^

1978년 1월, 입학시험을 보러 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는 교문이 없었다. 데모를 하지 못하게 하려고 동숭동에 있던 캠퍼스를 관악산 아래 골프장으로 옮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포항제철의 철강생산 능력을 보여주는 대형 철제 교문이 들어섰다. 국립서울대학교를 나타내는 ‘ㄱㅅㄷ'을 기하학적으로 결합해 만든 교문을 우리는 공산당 또는 계집·술·담배의 약자라며 낄낄대곤 했다.

서울대정문.jpg
https://namu.wiki/w/%EC%84%9C%EC%9A%B8%EB%8C%80%ED%95%99%EA%B5%90

'개 소 돼지'라고도 부른다.
나 역시 처음 보았을때는 '샤'라고 읽었다.
ㅎㅎ 이 대학교를 참 가고 싶었는데...^^
아마도 '개 소 돼지'가 되기 싫어서 안갔는지도 ㅋㅋ

쉰 다섯 살이 된 대한민국의 중년들이 회고하는 어린 시절 경제생활의 변화 양상은 저마다 모양과 색깔이 다를 것이다. 각자가 본 대한민국의 일굴이 달랐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어린 시절 경제생활의 변화 양상'이 있을 것이다.
종종 내가 겪은 것과 너무나도 다른 일들을 겪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때가 있다.
내 의지로 단식을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적어도 나는 밥을 굶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그랬던 친구들이 한 1/3 정도는 되는 듯 하다.

그들이 보았던 대한민국의 얼굴은 참 많이 다를 것이다...
그래서 그 변화가 더 각별한 것일까?

이륙에서 대중소비사회로

<그림 1>은 1959년부터 2013년까지 달러로 표시한 국민 1인당 연평균 명목소득을 보여주는 막대그래프다.
<그림 2>는 <그림 1> 막내 그래프 꼭대기를 연결한 선이다. 이 선을 보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상상을 할 수 있겠지만, 정답은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리다가 이륙해 공중으로 날아간 궤적이다.

대한민국GDP-1.jpg
<사진 출처: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

대한민국GDP-2.jpg
<사진 출처: 유시민의 "나의 한국 현대사">

이들 그림에 '감동(?)'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알아야 하는 부분이 있다.

브레튼 우즈 체제
https://ko.wikipedia.org/wiki/%EB%B8%8C%EB%A0%88%ED%8A%BC_%EC%9A%B0%EC%A6%88_%EC%B2%B4%EC%A0%9C

베트남 전쟁 등으로 인한 미국의 국제수지 적자가 발생하고, 전비조달을 위한 통화량 증발에 의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달러 가치가 급락하자 일부 국가들이 금태환을 요구하였고, 결국 금태환 정지선언인 1971년의 8·15 닉슨 조치는 이런 달러위기의 타개를 꾀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나 이 조치에 따라 브레튼 우즈 체제가 붕괴, 국제 통화제도는 혼란에 빠지고 세계무역은 축소화의 경향을 지지게 되며 한편 후진국에는 악영향을 주었다.

뭐 우여 곡절은 있었지만 1970년 이전은 '금본위제'였다.
물론 정확하게 금의 보유량 만큼만 딱 돈이 발행되는 것은 아니지만
금의 보유량을 엄청나게 벗어나서 어마어마하게 돈이 생성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것이 사라졌다.
결국 어마어마한 통화량이 생성될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진 것이다.

위 그래프는 달러로 표시되는 그림이다.
달러의 가치가 1970년 이전과 2018년은 엄청난 차이가 있다.
이 점을 반드시 명심하고 그래프를 보아야 한다.

다른건 몰라도 경제성장만큼은 독재, 권위주의, 보수정권이 민주, 자유주의, 진보정권보다 더 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림 2>는 이것이 실증적 근거가 없는 고정관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한국 경제는 박정희 정권 때 이륙했다. 그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의 상승폭은 민주화 이후 10여년 동안이 그 이전보다 더 컸다.

위에서 얘기했듯이 그래프를 달러의 가치와 연동해서 살펴볼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경제 성장이 상당히 이루어졌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특히나 김대중 정부는 IMF 사태라는 초유의 환경에서 극복되는 과정이었다면
물론 세계 경제의 성장과도 맞물리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노무현 정부때의 성장 부분은,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한다.

기득권 세력들의 '노무현'이라는 인간, 혹은 세력에 대한
극단적인 '증오'는 아마도 끝나지 않는 싸움일지도 모르겠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대 MIT 교수이자 뛰어난 통계분석 전문가였던 로스토 박사는 산업혁명 전후 영국의 경제통계를 분석해 특정한 경제성장의 패턴을 찾아냈다. 어떤 나라든 적절한 정책을 쓰면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산업화는 비행기를 하늘에 띄우는 것과 비슷하다. 전통사회는 변화가 느리고 성장률이 낮다. 그런데 어느 시점에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갑자기 빠른 속도로 경제가 성장한다. 이것이 이륙이다. 일단 이륙에 성공한 국민경제는 성숙 단계를 거쳐 높은 수준의 대중소비 단계로 나아간다. 이 이론 전체의 핵심은 이륙이다. 이륙하는데 성공하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비교적 수월하다 하지만 이륙하기가 쉽지 않다.
후진국, 저개발국 또는 개발도상국의 정치적 야심가들에게 로스토의 이론은 위대한 복음이었다. 어느 나라든 이륙을 위한 선행조건을 갖추기만 하면 반드시 하늘을 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하늘을 날 수 있다. 우리도 잘살 수 있다! 절대빈곤에 허덕이는 사람들에게 이것은 분명 가슴 설레는 꿈이다.

박정희 역시 '로스토 박사'의 팬이었다고 한다.
아니 당시에 권력을 잡은 사람의 입장에서 사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백성들을 잘 살게 해주는 방법밖에는 없다.
지금 북한의 '김정은'이 하려는 일과 100% 같은 것이다.

이유가 뭘까? 백성들이 불쌍해서?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멋지지 않다.

그냥 할 수 있는 일이 딱 그거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배가 고프니까 밥을 먹으려 한 것, 그것이 이유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다. 멍청하면 안된다."

그런데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다. 어떤 이론도 현실의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로스토의 길을 따른 신생국가들 역시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칠레의 피노체트와 필리핀의 마르코스를 비롯해 자본주의적 개발독재를 선택했던 대부분의 야심가들이 실패했다. 현실은 이론보다 훨씬 복잡하다.

난 적어도 '박정희'가 멍청하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지도자가 멍청하면 절대로 나라가 제대로 굴러갈 수가 없다.

기업이 사장의 수준 이상으로는 절대 발전할 수 없는 것처럼
국가도 지도자의 수준 이상으로는 절대로 올라갈 수 없다.

박정희가 멍청하지는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너무나도 '권력욕'이 강했다.
그것이 바로 비극을 초래한 원인이었던 것이다.

나는 인간 박정희가 아무 '주의자'도 아니었다고 본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반공주의, 군국주의, 자유주의, 그 어떤 이념도 그를 온전하게 사로 잡지는 못했다. 생애 전체를 볼 때 그가 일관성 있게 추구한 것은 권력 하나뿐이었다. 이승만 박사와 달리 '전前 남로당원' 박정희는 자유주의 이념에 갇히지 않았다. 국가가 주도하는 중앙통제식 계획경제가 러시아공산당의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박정희 시대 한국 경제는 영국, 프랑스, 미국 등 자본주의 선진국과 제국주의 일본,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을 절반씩 닮은 체제였다. 다시 말해서 사유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기본질서에 중앙통제식 계획경제를 결합한 혼합형 경제체제였던 것이다. 오늘날 중국의 경제체제도 그와 비슷하다.

만약 박정희에 대해 열광하는 많은 기득권 세력들에게
"딱 박정희가 했던 그 정책들을 지금 다시 하겠다"고 말한다면 찬성할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물론 그 계획경제의 그 '계획'에 자신들의 이익이 결부되면
적극적으로 환영하겠지만 과연 그럴까?
자신의 '의지'가 아닌 독재자의 '계획'으로만 이루어지는 사업 계획이라면?
아마도 그들은 자신들이 보고싶어하는 박정희의 모습만 보려고 하는 것이 아닐까?

1977년에 대한민국은 드디어 '수출 10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를 달성했다.

박정희의 끝은 아마도 이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꿈과 같은 일이 현실로 다가온 이 시점.
이때가 아마도 박정희의 모든 정력이 다 소진된 시점이 아닐까?

이때라도 그 집요한 '권력욕'을 내려놓고 조용한 여생을 보낼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그랬더라면 결과는 멋진 마무리가 되었을수도 혹은 더 비참했을 수도 있다.

육영수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9C%A1%EC%98%81%EC%88%98

1950년 8월 이종사촌인 송재천의 소개로 당시 소령이었던 박정희를 만났다. 박정희는 집안 어른들이 정해주는 대로 1936년 김호남과 결혼하여 이듬해 박재옥이라는 딸을 낳았으나, 첫 번째 부인인 김호남에게는 그다지 정이 없었다. 박정희는 김호남을 두고 이현란이라는 여대생과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동거하였으나, 이현란과도 헤어지고 김호남과 이혼한 후 곧 육영수를 만나 결혼했다.

박정희의 첫 부인 김호남 씨와는 아무래도 당시의 상황에서
연애 결혼이 아닌 것은 당연하고 거의 반 강제로 결혼을 했다고 한다.
음.. 그래서? 여대생과도 바람을 피고...
박정희가 여자를 참 많이 좋아하기는 한 듯 하다.
결국은 이혼하고 육영수와 결혼한다.

육영수.jpg

참 예쁘다. 단아하다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 멋진 분이다.
옛날 사람이라는 생각보다는 요즘 사람의 느낌이 든다.
박정희의 작고 외소한 체구의 모습과 대비되어 더 멋지게 느껴진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육영수가 사망한다.

혹자는 육영수의 사망이후 박정희의 폭주가 시작되고
그로 인해 유신으로 종신 집권을 노리고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렀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이는 순서를 좀 헷갈렸기에 발생하는 오류다.
유신 헌법이 통과된 날은 1972년 12월 27일이다.
육영수의 사망은 1974년 8월 15일이다.

결국 육영수의 죽음이 없었어도 박정희는
종신 집권을 하려는 마음을 결코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육영수가 청와대 내에서 일종의
'야당'역할을 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로 보인다.
마음씨도 매우 따뜻했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고,
소록도의 봉사 등은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육영수가 계속 살아 있었어도 박정희의 종신집권 야욕을 막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영수의 죽음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그의 폭주를 그래도 '쬐끔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림 2>는 50여 년에 걸쳐 수천만 국민들이 수행한 분투의 기록이다. 나는 여기에서 그 세월을 견디고 살아남은 사람들과 죽어간 사람들이 느꼈을 기쁨과 슬픔, 자부심과 분노, 역사가 그들의 인생에 각인한 성공과 좌절의 흔적을 본다. 독일 루르지역 탄광의 지하갱도와 리비아의 사막에서 석탄 검댕과 흙먼지를 먹으면서 일했던, 기계에 손가락과 팔다리를 잘리고 목숨을 잃었던, 중금속에 중독되고 갖가지 직업병에 시달렸던 노동자들의 고통과 희망을 느낄 수 있다. 한국 경제의 50년 궤적을 몸으로 밀어왔던 사람들은 이런 것을 보면서 꿈을 꾸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한국 경제 50년의 역사에서 아프게 죽어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분노, 증오, 복수... 이런 것이 아니다.
다만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416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지난 글 목록

"나의 한국현대사"를 펼치며...
"나의 한국 현대사" 1 - 서문과 프롤로그
"나의 한국 현대사" 2 - 제1장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르다
"나의 한국 현대사" 3 - 제2장 (1/2) 4·19 혁명
"나의 한국 현대사" 4 - 제2장 (2/2) 5.16 군사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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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은 망각하며 살아도 될듯해요.
신이 주신 선물중 망각이 최고의
선물이듯...

그렇죠^^ 기록으로만 남기고 저도 망각 하려구요...
살기위해서 뇌는 스스로 잊어버리려 하는 듯 합니다.
계속 기억하면 너무 슬퍼서...

육영수에 대해서는 잘몰랐는데 야당역할을 했었군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육영수 여사는 꽤 괜찮은 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남자를 잘못 만났지만서도...

박정희 육영수가 님같은 국민을 후손으로 둔 것이 잘못된 만남 이라고 봅니다. ㅋㅋ

맘이 많이 아프신가봐요... 늘 싸움을 하려고 하시니...

님들의 그 거짓 선전선동에 대항하여
올바른 시각을 젊은 세대들에게 전하려는 것입니다.

https://steemit.com/kr/@steamsteem/c4s3b

제가 님과 싸워 뭣하겠습니까?

목적하시는 바를 이루는 것은 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래도 꾸준한 노력에는 박수를 보내 드립니다.

3달 만에 이미 큰 성취를 하나 했습니다.
한번 보여드릴까요 ??

https://steemit.com/kr/@steamsteem/48wi8c

조만간에 김정은의 북한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종북 간첩성 공산지향의 문가 정권이 무너지고,
자유민주 정부가 들어 서는 것이 먼저가 될지, 나중이 될지는 모르겠네요.

멋진 연재에요
조용한 카페에서 혼자 읽고 싶네요
지금 보물 2호가 색열필가지고 장난을 치는 바람에... 집중이.

연재 전체를 읽으시는 것, 강추입니다. ^^

아침에 보고 이제야 정독했습니다. 예전에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던 해 박근혜를 찍었다는 서른이 안된 남자 동생이 하는말이, 본인의 무능함을 모든 사회적 정치적 구조의 문제로 돌리던 아이답게, 지금은 박정희처럼 사람들을 확 휘어잡을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ㅜㅜㅜㅜ 몇가지 묻고싶었습니다. 1.박근혜가 박정희같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아저지는 똑똑했지만 멍청한), 2.박정희의 독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 3.너는 역사의식이라고 있기는 하냐. 평소에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화 이후로 마음속의 거의 증오하다시피 했던 기억이 납니다. 박정희의 독재에 대한 변을 보고 있자니 그 무식한 아이가 갑자기 따오릅니다.’어느 매체에서 육영수의 글을 읽은 기억이 나는데, 박근혜의 남의 말을 듣지 않는 성향이 엄마를 빼다박았다고 하는 글이었는데,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그 얼굴에서 박근혜가 보이니 전혀 미인으로 보이지 않습니다만 ㅎㅎ 오늘도 역시 엄지 척 하고 갑니다

육영수가 박근혜에게 최태민을 멀리하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격을 닮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육영수가 더 합리적이고 똑똑했던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박근혜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좀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많죠

오늘 많이 배워갑니다. 감사합니다.

어이쿠 배우셨다니 제가 더 감사합니다

몰랐던걸 많이 알게 되네요
좋은글 잘읽고 갑니다~^^

좋은 글이라고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 그래프를 보면,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이 경제성장을 상당히 견인했던 지도자라는 평가를 인정하지 않을 수 가 없네요.

사실 민주적인 정부에서는 기업이 성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우리나라처럼 선진국 대열에 올라선 나라는 더더욱 그렇죠^^
뭐 김대중 노무현이 엄청 잘했다기 보다는 정경유착 끊고
기업에게 돈버는 데에만 집중하라고 하면 잘 된다는 얘기죠 ㅎㅎ

짱짱맨 호출에 출동했습니다!!

우리나라가 해방이후 경제성장을 하면서 미국, 일본을 많이 본따서
성장을 했죠.
이제는 유럽국가들을 더 많이 본받아 소득의 재분배 관점에서의 발전을
고려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봅니다.
그렇기 통일이 되고 한단계 더 높은수준의 발전을 이룩해낸다면 우리나라야말로 전세계에서 이민 오고싶어하는 나라가 될수 있겠죠.

북한과의 관계 개선으로 더 발전하는 한국이 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오늘 트럼프의 회담 취소때문에 좀 괴로운 상황이 되었지만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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