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 현대사" 2 - 제1장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르다

in #kr-history6 years ago

제1장 역사의 지층을 가로지르다

: 1959년과 2014년의 대한민국

우리를 압살하고 지나가는 근대화와 자본의 맹목적이고 무서운 속도를 일시 정지시키고 '이것이 과연 인간다운 것인가' 물었던 것, 그것이 1980년에서 내가 가져온 작은 불꽃이다. 나는 이 불꽃으로 우리의 삶 전체를 그러아 아주 작은 것들 하나하나를 비추어 보려 한다. 1980년대 내내 나는 얼마간 비관주의자였다. 그러나 이제야말로 나는 고통스러운 자기응시를 통해 작지만 단단한 희망을 말하고 싶다.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는 나의 고통스러운 자기응시에 붙여진 이름이다.
-김진경, "30년에 300년을 산 사람은 어떻게 자기 자신일 수 있을까"

나의 대학 신입생이던 시절에서 지금까지 30년이 흘렀다.
정말 우리는 이 30년에 300년을 살아온 것이리라.

피흘리며 죽어가는 꽃다운 청춘들의 희생들을
아무것도 할수 없는 미약한 힘으로 지켜보았었던 시절로부터
남과 북의 정상들이 손잡고 마치 고무줄 놀이 하듯
휴전선을 넘나드는 모습을 TV 생중계로 지켜보는 날까지...

진정 유럽에서는 300년 동안 일어났을법한 일이
대한민국에서는 30년 동안 일어났다.
이 격동의 시대를 살면서 나는 나 자신일 수 있을까?

1959년 돼지띠

1959년의 대한민국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꼭 누가 잘못해서 그랬던 것은 아니다. 광복 14년, 정부 수립 11년, 한국전쟁의 포화가 멈춘 지 겨우 6년이었다. 대한민국은 학대와 굶주림, 질병으로 숨이 넘어가는 어린아이와 같았으며 공식적으로는 국제연합UN, 실제적으로는 미국이라는 이웃이 그 아이를 구해주었다. 미국을 위해 아무 원한도 없는 베트남에 대규모 전투부대를 보냈으며 미군은 60년 넘게 수도 서울 한복판에 사령부를 두고 있다. 좋은 양아버지였든 아니든, 미국이 양아버지였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유시민의 생년이 우연히 1959년이기에 그 시점을 말하고 있으나
전쟁의 상처가 미처 치유되지 않았던 1950년대 말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하나의 국가로 보기에 너무나 부족한 곳이었다.

미국의 대한원조정책
http://www.archives.go.kr/next/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8856

미국의대한원조는 해방 이후부터 1970년 5월 미국의 원조지원 대상국에서 제외되기까지 물자와 외화부족 문제를 완화하였으며, 특히 1950대말까지는 유일한 외자도입 창구로 전후 경제부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미국의 대한원조는 1969년 말까지 무상원조는 약 44억 달러, 유상원조는 약 4억 달러에 달하여 한국경제의 투자재원 마련, 국제수지 적자보전 및 경제성장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나라"라는 것에는 반기를 들수 없다.
미국의 원조가 아니었다면 굶주림에서 빠져나오기도 힘들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원조를 받는 형편에 있는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베트남 파병을 추진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대한민국군 베트남전 참전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8C%80%ED%95%9C%EB%AF%BC%EA%B5%AD%EA%B5%B0_%EB%B2%A0%ED%8A%B8%EB%82%A8%EC%A0%84_%EC%B0%B8%EC%A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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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1964년 9월 11일 ~ 1973년 3월 23일, 파리 협정에 따른 철수
사상자 5,099명 사망 11,232명 부상
베트남전 참전(大韓民國軍 베트남戰 參戰) 또는 월남전 참전(越南戰 參戰), 월남 참전은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66년 4월까지 4차에 걸친 박정희 정부 하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민국 전투부대를 파병한 일을 말한다. 한국의 파병 제안과 월남정부 및 미국의 요청에 따라 행해진 대한민국 최초의 국군 해외 파병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시 이라크 전쟁에 대한 파병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당시 베트남 파병 역시 미국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라
생각할 수 있으나 현실은 그 반대였다.

박정희 정부는 경제, 군사적 이유로 먼저 파병을 제안한다.
"공산침략을 당한 국가가 안보와 자유수호를 위한다는 명분"

명분은 그럴듯 하다. 냉전시대의 공산주의 침략을 방어하는
첨병으로서의 역할을 주도적으로 수행하는 대한민국...

과연 베트남 파병은 옳은 결정이었을까?
당시의 상황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의미있을까?

베트남 파병으로 많은 경제적 이익을 거둔 것은 분명하다.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전쟁의 상처는 영원히 남아 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전쟁을 결정해야 하는 상황은 올수 있다.
우리나라를 침략해 오는 적과 대항해 싸우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그게 다른 나라라면? 적은 과연 누굴까?
미국이 우리의 친구이니 친구의 적은 우리에게도 적인가?

무려 50년도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역사는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아픔만 남아 있고 상처만 기억될 뿐이다.

평등하게 가난했던 독재국가

1959년 대한민국 인구는 2,400만 명이었다. 해마다 100만 명씩 아기가 태어나 인구증가율이 3퍼센트가 넘었다. 경제활동 인구는 760만명이었다. 미성년자가 많고 여성들이 가정에 머물렀기 때문에 경제 활동 참가율이 30퍼센트밖에 되지 않았다. 취업자의 63퍼센트가 농사를 짓거나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다.

경제활동 인구가 7백만명밖에 되지 않는데
그중의 63%가 농업, 축산업, 어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국민의 대부분이 1차 산업에 종사하는 가난한 국가...

국민들은 평등하게 가난했다. 1959년 국내총생산GDP은 19억 달러, 1인당 GDP는 81달러 수준으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우간다. 토고와 함께 국가 순위 밑바닥에 있었다. 필리핀과 태국, 터키는 우리의 두 배가 훨씬 넘었다. 유럽 선진국들은 1,000달러, 미국은 2,000달러를 웃돌았다.

"평등하게 가난했다"는 말이 가장 아프다.
이 말은 "가난하지만 행복했다"는 말의 다른 버전이 아닐까?

국가별 1인당 GDP 순위(명목)
https://namu.wiki/w/%EA%B5%AD%EA%B0%80%EB%B3%84%201%EC%9D%B8%EB%8B%B9%20GDP%20%EC%88%9C%EC%9C%84(%EB%AA%85%EB%AA%A9)

현재의 1인당 GDP 순위에서 8위 미국이 $59,495이다.
29위 대한민국은 $29,745이다.
정말로 격제지감이라는 말은 이런때 써야하는 것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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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중 임시학교에서 수업을 듣는 아이들(위)과
청계천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여공들(아래, 1973년)

열세 살이 넘어서도 한글을 깨치지 못한 사람이 450만 명이었다. 1970년대에는 누나가 공장에 다니면서 남동생을 공부시켰는데, 1959년에는 누나들이 다닐 공장조차 없었다. 입을 덜기 위해 어린 여자아이를 남의 집에 월급도 없는 식모로 보내는 게 다반사였다.

한글을 읽는 것은 누구나 한 일주일만 공부하면 할 수 있다.
내가 외국 사람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적이 있었는데
한 2시간 정도 교육 받고도 읽을 수 있었다.
한글은 그렇게 쉬운 글자이다.

하지만 한글을 읽는다고해서 그가 지식인이 될 수는 없다.
한글마저 깨치지 못한 사람이 450만명이라면, 정말 무슨 말이 필요할까...

"누나들이 다닐 공장조차 없었다"는 말이 정말 아프다.
갑자기 아버지가 떠올랐다. 내 아버지는 당시 24살이었다.

20대의 꽃다운 나이를 1959년에 보낸 이의 삶은 어떤 것일까?
20대의 꽃다운 나이를 1987년에 보낸 이의 삶은 어떤 것일까?
20대의 꽃다운 나이를 2018년에 보내는 이의 삶은 어떤 것일까?

지금의 20대가 무척이나 부러운 것 만큼이나
나의 아버지의 20대는 너무나 아프고 슬프다.

대학을 마쳐도 반듯한 일자리를 찾기 어려운 현실을 두고 청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이야기가 많이 들린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종의 착시현상일 뿐이다. 오늘의 청년들이 특별히 고달픈 운명을 맞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고교생의 85퍼센트가 대학에 진학한다. 전문대학을 포함한 고등교육 진학률이 15퍼센트도 되지 않았던 시대에는 대학 졸업장만으로도 보수와 근로조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관리직, 전문직, 사무직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학졸업장이 노동시장에서의 상대적 우위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우리 역사에서 모든 청년에게 제대로 된 일자리가 주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1995년...
당시 고교생 대학진학률은 처음으로 50%를 돌파했다.
경제는 호황이었고, 기업은 너도나도 직원을 채용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했다.
아마도 이때가 대학을 졸업하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로부터 2년뒤 IMF 시대가 열렸지만서도...

유시민 작가가 말하는 그 "일종의 착시현상"
아마도 1990년대와의 비교에서 나온 말일지 모른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때와 같은 시절은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살짝 우울해진다.

1959년 7월 3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정적 조봉암을 법살했다. 내가 세상에 나온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허황하기 짝이 없는 '북진통일론'을 비판하고 '평화통일론'을 에둘러 주장한 죄로 교수형을 당한 그는 사형집행 임석검사에게 말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그저 이승만과의 선거에 져서 정치적 이유로 죽는 것이오. 나는 이렇게 사라지지만 앞으로 이런 비극은 없어야 할 것이오."

1959년의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무법천치였다.
아니 법은 있었으나 그 법은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서"만"
좌지우지되는 무용지물이었다.

조봉암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B%B4%89%EC%95%94

2011년 1월 20일, 대법원은 재심에서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원심을 파기, 무죄를 선고했다. 이어 간첩 혐의에 대해서도 "유일한 직접증거인 증인(양명산)의 진술은 일반인에 대한 수사권이 없는 육군 특무부대가 증인을 영장 없이 연행해 수사하는 등 불법으로 확보해 믿기 어렵고 합리적인 의심 없이 증명됐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고 선고했다. 이로써 조봉암은 1959년 사형당한 이래 52년만에 복권되었고, 이승만 정권이 자행한 대표적 사법살인의 희생자로 기록되었다.

역사에서 사법살인은 매우 흔하다.

과거 유럽의 "마녀사냥"은 대표적인 사법살인일 것이다.
마녀로 지목된 사람에게 매우 근대적인 법절차를 따라 심판한다.
물론 자백을 받기 위해서 "고문"이 허용되었다.
아니 자백할때까지 고문했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인민혁명당 사건
https://namu.wiki/w/%EC%9D%B8%EB%AF%BC%ED%98%81%EB%AA%85%EB%8B%B9%20%EC%82%AC%EA%B1%B4

2013년 11월 28일,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의 재심에서도 무죄가 선고되어 1, 2차 인민혁명당 사건 모두 무죄가 확정되었다.

박정희 시대의 인혁당 사건이 역시 대표적 사법살인일 것이다.
그의 딸 박근헤는 이 무죄 확정에 대해서
"역사를 왜곡하고 헐뜯는 수작에 불과하다"고 했었다.
누구의 역사인식이 올바른 것일까?

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

1959년에는 평등하게 가난한 독재국가였던 대한민국이 2014년 현재는 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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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하게 풍요로운 민주국가"

풍요로우면 풍요로울수록 더욱 불평등해지는 것이
그것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리라.

불평등 연구자 4명이 말하는 ‘한국 불평등의 민낯’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00057.html

계층: 50대 남성 ‘핵심적 중산층’ 10명중 7명, 60대에 중산층서 탈락
소득: 상위 0.01% 소득, 국민 평균소득의 167배 달해
빈곤: 빈곤층 10명중 6명은 5년 이상 장기 빈곤자
건강: 대졸 청장년 1명 사망때 중졸 이하는 8.4명 사망

인간은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아픈 것은 못참는다" 한다.
이는 진리일 것이다. 문명 발전의 원동력이 바로 이 "질투"다.

20세기 신생국가들 중에 제국주의 수탈과 전쟁이 남긴 폐허를 딛고 거대한 현대적 산업과 정치적 민주주의를 세우는 데 성공한 나라는 거의 없다. 아직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다. 휴전선의 존재와 분단 상황, 그리고 그에 대한 국민들의 생각과 태도다. 1953년의 정전협정은 60년이 지나도록 그대로 있다.

대한민국은 폐허에서 선진국이 된 유일한 국가일 것이다.
아마도 이스라엘을 건국한 유대인과 한민족,
딱 이 두개의 민족만이 진정한 승리자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그대로 있는 이 정전협정이 드디어 폐기되고
평화협정으로 바뀌기 일보 직전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난민촌이 아닌데도, 많은 국민이 여전히 난민촌 정서를 지니고 있다. 이 정서는 문화유전자에 담겨 전후세대에게 상속되었다. 북한을 대할 때 우리는 대체로 이성을 따르기보다는 감정에 휘둘린다. 6·25전쟁에 대한 원한이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이라고 해서 결백한 것은 아니다. 우리도 북한에 대해 비슷한 일을 했다. 국민들이 그 사실을 잘 모를 뿐이다.

유시민은 딱 여기까지만 말을 하고 마치고 있다.
구체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합리적 의심"이라는 말이 있다.
남한이 북한에 대해서 도대체 어떤 "짓"을 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구체적으로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아무 짓도 안했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비합리적이고 너무나도 순진한 생각이다.

북한의 행동은 뉴스에 나온다. 하지만 우리의 행동은 잘 뉴스에 안나온다.
특히나 북한의 어떤 행동 이전에 취해진 남한의 행동은 결코 알수없다.

북한이 매우 비합리적인 집단일 것이라는 생각은 매우 심한 착각이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을 보면서는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게된다.
북한은 개방을 원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길 원한다.
남한과 같은 발전을 정말로 간절히 원한다는 것을 말이다.

욕망의 위계

나는 대한민국 현대사를 만든 힘이 욕망이었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기적을 만든 힘은 국민이 개별적·집단적으로 분출한 욕망이었다. 1959년 국민의 가장 강력한 욕망은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 북한의 위협과 사회 내부의 혼란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는 문제 였다. 사람들은 이 욕망을 충족할 수 있게 해주기만 한다면 어떤 사람이나 집단에게도 복종할 뜻이 있었다. 4·19에서 5·16까지 1년을 제외하면, 국민들은 정부 수립 이후 1987년까지 40년 동안 권력에 굴종하며 살았다. 1인당 국민소득이 3,000달러에 근접해 생존에 필요한 물질적 자원을 어느 정도 확보한 다음에야 대중은 분명한 태도로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정의와 인권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그렇게 해서 일어났다.

먹고사는 생존의 문제가 가장 큰 욕망이었고
이를 충족하기 위해서 권력에 굴종했다는 말은 살짝 잘못된 접근이다.
유시민 작가는 인간을 너무 높이 평가한다.
인간은 그렇게 대단하지 않다.

원래 인간은 권력에 굴종하고 복종하는 것을 매우 잘한다.
이것에 별다른 거부감이 없고, 어쩌면 오히려
매우 편안한 안도감 같은 것도 느낀다.
마치 조폭 두목에게 복종하는 졸개의 상태와 같다.

원숭이 집단에서 서열을 정하고 그 서열을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집단에서 권력을 정하고 따르는 것은 동일하다.

원숭이들이 서열 다툼을 벌인다. 서로 1등이 되려고 싸운다.
인간도 똑같다. 권력을 얻기 위해서 투쟁한다.
나는 이것이 인간의 동물적 본성이라고 생각한다.

"자유와 민주주의, 사회정의와 인권을 요구" 했다고 말하는데
사실 이는 표면적으로 말하는, 아니 뭔가 근사한 것을
말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지껄이는 좋은 말일 뿐이다.
인간은 그저 권력을 원할 뿐이다.

힘이 약할때는 그저 복종하지만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바로 물어뜯는다.
그것이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1987년 6월 민주항쟁때, 전두환이 탱크로 서울을 밀어버렸으면
역시 80년 광주와 마찬가지로 실패했을 것이다.
하지만 전두환은 약해졌고, 88 올림픽 때문에 쫄았고, 그래서 이긴 것이다.
뭐 결국 이긴 것도 아닌게 되어버렸지만서도...

그라운드 제로, 그리고 욕망의 질주

대한민국은 권위와 힘을 가진 지배층이 존재하지 않는 '그라운드 제로' 사회였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사회는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냉전시대가 올 것임을 일찌감치 예견한 빈손의 망명객 이승만이 탁월한 수단을 발휘해 대통령이 되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줄을 대어 일본인이 두고 떠난 적산을 불하받은 사람들이 신흥자본가로 등장했다. 자발적으로 또는 어쩔 수 없이 일제에 협력하며 살았던 군인, 경찰, 판검사, 교사, 공무원들이 그대로 남아 대한민국의 권력기관과 행정조직을 장악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처단함으로써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려 했던 국회 반민특위는 친일파의 역습에 해산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권력의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다.
엄청난 힘으로 419 혁명을 일으켜 독재자를 물러나게 했지만
또다른 독재자에게 바통을 넘기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뒤이은 독재자는 이전에 비해 좀더 세련되어지는 것이 다를뿐.

자유와 존엄에 대한 열망은 정부 수립 13년째였던 1960년 419 혁명으로 터져 나왔으나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516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부는 물질에 대한 욕망 충족을 부추김으로써 권력을 유지하는 개발독재체제를 구축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그라운드 제로' 대한민국을 질주했다. 그 욕망의 탁류는 누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대중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던 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둑을 터뜨려 물길을 냈고 그 욕망의 탁류 위에서 위험천만한 '역사 래프팅'을 했다.

박정희는 과연 대한민국을 구원했는가?
공과가 있다고 말한다. 진실인가?
독재자의 공을 공으로 인정해야 하는가?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우리나라의 현재의 모습은 매우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 다르다는 것이 결코 더 나쁘거나 좋다는 것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혹자는 말한다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경제발전이 없었을 것이라고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지금과는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 다른 모습의 대한민국이 수치로는 말할 수 없는
더 멋진 모습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역사에 어찌 가정을 할 수 있단말인가,
박정희는 존재했었고, 그로인해서
우리는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일 뿐이다.

우리는 독자적인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다. 한글은 쉽게 익힐 수 있는 과학적인 문자다. 우리는 역사적·문화적·인종적으로 매우 균질하며 중앙 집권 정치체제에 익숙한 민족이다. 상이한 인종과 종교, 크게 다른 문화와 전통이 뿌리내린 나라는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으기 어렵다. 대한민국의 변화는 기적이 아니다. 일어날 법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일 뿐이다.

유대인은 왜 강한가?

유대인은 구약성역 앞부분의 5개의 책 즉 "모세오경"
종교적인 명령으로 아주 어릴때부터 읽고 쓰고 외워야 했다.

중세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글을 읽고 쓰지 못했다.
심지어 왕들 중에서도 글을 읽거나 쓰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을 정도니
일반 백성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그런데 유대인들은 달랐다.
거의 모든 유대인들은 그 옛날부터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이점이 바로 유대인들을 강하게 만들어준 원동력이다.

난 대한민국 기적의 원인은 단연코 "한글"때문이라 확신한다.
하나의 언어를 표현하는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문자.

유시민 작가의 말처럼 이것은 기적이 아니다.
언제고 반드시 일어났어야 하는 일이었을 뿐이다.

촛불 혁명이 그러하였고,
대한민국의 통일, 전 세계의 주역이 될 날도 멀지 않았다.


이렇게 1장을 끝냈다.
마치 숙제를 하는 아니 대학 리포트를 쓰는 기분이 든다.
모든 장이 끝나면 그래도 우리 현대사에 대해서
적어도 나의 현대사는 좀 정리가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조금씩 생기는 듯 하다.


지난 글 목록

"나의 한국현대사"를 펼치며...
https://steemit.com/kr-book/@yhoh/7sfjpt

"나의 한국 현대사" 1 - 서문과 프롤로그
https://steemit.com/kr-history/@yhoh/8qfy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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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변하고 오래전 독재의 그늘에서 벗어나려는 지금도 아직 과거의 풍요로움에 기생하는 그들이 불협화음을 냅니다. 깨어있는 지성이 필요한 때입니다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가지고 평할 수 없으나, 베트남 한국전쟁 피해 마을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무서워하니 한국인이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에 끄덕이곤 아무말도 못했습니다. 마음이 시릴 정도로 아프더라구요.

일교차가 큰 날씨에요 감기조심하세요^^

어떻게 되었든 적화 통일만 되지 않았다면 우리나라는 발전 했을 겁니다. 그 정도가 어는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요.

확실한 것은 단군 건군이래 가장 평화로운 60년을 보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세종대왕 만쉐이~~!! 인가요?^^
글에 정성이 가득하네요. 나중에 다시 정독해야겠습니다.^^

작년 광화문에선 이미 탱크로 밀어버리기엔 너무 늦어버린 걸까요? 아니면 탱크로 밀어버리기엔 사람이 너무 많아서였을까요?

사람이 너무 많았죠^^

일단 리스팀하고 나중에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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