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한국 현대사" 3 - 제2장 (1/2) 4·19 혁명

in #kr-history6 years ago

오늘의 포스팅과 다음의 2개의 포스팅은
상당히 묵직한 내용을 담고 있다.
바로 '4·19 혁명'과 '5.16 군사쿠데타'이다.

상당한 중압감이 나를 짖누른다...
잘 기술할 수 있을까? 두렵다.

제2장 4·19와 5·16

: 난민촌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둥이

4.19 혁명 - 나무위키
https://namu.wiki/w/4.19%20%ED%98%81%EB%AA%85

위 나무위키 자료를 읽어볼 것을 추천한다.
이번 포스팅에 사용한 그림이나 사진들은 위 링크에서 가져온 것이다.

국민학교학생데모.jpg

수송국민학교 학생들이 데모하는 모습.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라는 플래카드가 보인다.

이 한장의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4.19 혁명'이었던 것이다.

냉전의 모델하우스

4·19와 5·16은 나를 조용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오랜 세월 그것들과 씨름하고 나서야, 나는 그 둘이 부모는 같지만 외모와 성격과 취향이 완전히 다른 이란성 쌍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이승만 대통령 시대의 분단국가 대한민국, 아버지는 대중의 욕망이었다. 역사는 5·16에 군사쿠데타(군사정변)라는 낙인을 찍었다. 그런데 4·19는 죽지 않았다. 흙더미를 헤치고 세상에 나와 다시 일어섰다. 우리 현대사는 난민촌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가 벌인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다.

어린시절 나는 "4.19 의거, 5.16 혁명"이라 부르며 교육 받았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박정희 정권이었고,
"박정희 대통령, 최규하 국무총리"는 불변의 진리라 생각했었다.

말이라는 것이 참 무서운게
"4.19 의거, 5.16 혁명"이라는 말이 너무나 입에 착착 감긴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친구가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하는 것을 듣고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고 얘기했던 적이 있다.
우리에게는 독재자들의 왜곡된 언어가 얼마나 많이 쇄뇌되어 있을까...

이제 우리는 "4.19 혁명, 5.16 군사쿠데타"라 부른다.
몇십년의 세월이 흐르고 흘러서, 수많은 피를 흘리고 난 후,
드디어 4.19는 5.16을 이긴 것이다.

"난민촌에서 태어난 쌍둥이 형제가 벌인 분투와 경쟁"에서
결국은 승리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4·19를 좋아하고 5·16은 싫어한다. 하지만 5·16이 결코 일어나지 말아야 했거나 오로지 나쁜 결과만 남긴 사건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둘 모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4·19를 좋아하는 것은 4·19를 만들어낸 욕망과 4·19가 만든 변화를 5·16을 일으킨 욕망과 5·16이 만든 변화보다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헌법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4·19는 이렇게 독재시절 만들어진 헌법에서조차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역사이다.

"둘 모두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유시민 작가의 말은
나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4·19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었고
5·16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4·19는 민중의 항쟁이다.
억압받는 민중의 항거는 역사에 무수하지만 승리한 것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이러한 승리를 해낸 민족과 그렇지 않은 민족의 차이는 어마어마 하다.

5·16은 다르다. 군사 쿠데타...
역사에 군사 쿠데타는 무수히 많다.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지 못한 경우보다
정권을 잡는 경우가 훨씬 많다.

결국 내가 판단할때 확률적으로 보아서
5·16이 훨씬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사건이다.

“모든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프랑스 정치가 토크빌 Alexis de Tocqueville (1805~1859)이 한 말로 알려져 있다. 토크빌이 전적으로 옳다. 국민의 수준에는 훌륭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민주적인 선거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능력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토크빌은 완벽하게 옳은 말을 했다.
이 말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새뮤얼 스마일즈 《자조론》의 내용이 더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정부는 그 나라를 구성하는 개인들을 반영한다. 국민보다 수준이 높은 정부라 하더라도 결국에는 국민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려지게 마련이다. 국민보다 수준이 낮은 정부가 장기적으로는 국민의 수준으로 끌어올려지듯이 말이다. 한 나라의 품격은 마치 물의 높낮이가 결정되듯이 자연의 순리에 따라 법 체계와 정부 안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고상한 국민은 고상하게 다스려질 것이고, 무지하고 부패한 국민은 무지막지하게 다스려질 것이다."

결국 4.19 혁명이 당시 승리하고도 지켜내지 못했던 것이나
5.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나
모두 국민의 역량이 그정도 밖에는 되지 못했던 것이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플라톤의 이 말은 영원히 모든 이가 기억해야 하는 문구이다.

반민특위의 슬픈 종말

만약 우리가 신탁통치를 받아들여 좌우가 동거하는 통일정부를 만들었다면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까? 단정할 수 없지만 가능성을 배제할 수도 없다. 잠재적인 위험은 있었다고 보는게 맞을 것이다.

유시민 작가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라는 말로
아주 조심스럽게 얘기하고 있지만, 아니다.
100% 공산화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볼때 주의해야 하는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올바른 결정이 꼭 올바른 결과를 가져다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그때는 민족주의자들의 선택이 올바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 반공주의자들의 선택은
현재의 우리나라를 만들어낸 엄청난 선택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결과가 좋은가 나쁜가를 말하는 것은
무의미할뿐만 아니라 허무하기까지 하다.

공산화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통일국가로 가는 길과 북한을 공산주의자들에게 넘겨주고 남한에 민주주의 국가를 세우는 길이 있었다. 어떤 경우에도 분단을 거부한 민족주의자는 전자를 선택했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들은 차라리 후자가 낫다고 판단했다. 그 대표자가 바로 이승만 박사였다. 분단국가를 세우는 것이 그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독재, 부패,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수많은 시민을 살상했지만 그는 분단국가를 세움으로써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확실하게 막았다. 온갖 비판을 무시하고 국회에 동상을 세운 국회의원들은 바로 이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분단국가였기 때문에 더 잘살게된 측면이 반드시 존재한다.
아주 가까운 곳에 아주 엄청난 적이 존재하면
결코 방심하거나 자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놀드 토인비의 말처럼
"도전과 응전"이 매일 일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하나의 민족이 둘로 나뉘어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경쟁하는 상황이 우리를 보다 극단적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것이 현재의 남한 경제성장의 큰 동력이었던 것이다.

Snap1.jpg
4·19혁명 일주일 뒤 탑골공원에서 철거되는 이승만 동상(1960년 4월 26일, 좌)과 50년 뒤 남산에 다시 세워지는 이 승만 동상(2011년 8월 25일, 우)

식민지에서 풀려나 만든 신생국가는 적어도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정통성을 가질 수 있다. 첫째는 역사적 대의명분이다. 신생 대한민국의 긴급과제는 일제 잔재를 청산해 민족사의 정통성을 세우는 일이었다. 둘째는 경제적 효율성이다. 민중을 빈곤에서 해방하고 물질적 삶을 개선해야 국민이 최소한의 기대를 품고 국가에 복종·협력하게 된다. 셋째는 민주적 정당성이다. 헌법에 따라 자유와 인권을 보장하고 주권재민 또는 인민주권의 원리를 실현해 정치적 정당성을 지닌 정부를 세워야 한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과 집권세력은 오로지 권력의 단맛을 누리는 데만 몰두했을 뿐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

유시민 작가는 국가가 정통성을 갖기 위한 조건을 3가지를 말한다.
역사적 대의명분, 경제적 효율성, 민주적 정당성...
그런데 이 조건들이라는 것이 조금은 현학적으로 들린다.
약간 공허하다고 할까...

식민지였던 조선, 해방후 분단된 나라, 그리고 전쟁...
전쟁이 끝난지 이제 겨우 6~7년, 그때의 대한민국은
역사적 대의명분, 경제적 효율성, 민주적 정당성을 말하기에는
너무나도 미약한 상태가 아니었을까?

이 3가지의 조건은 사실 2018년 대한민국에 적용해야
이제 겨우 좀 되어가는 상태가 아닐런지...

이승만 대통령은 엄연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특히 일본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반감을 보였다. 극단적인 사례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예선전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일본인이 우리 땅에 발을 들여놓게 할 수 없다고 했다. 축구계 인사들이 홈경기 허가를 청원하다가 나중에는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할 수 있게라도 해달라고 애원했다. 도쿄에서 열린 두 경기에서 한국팀은 1승 1무를 거두어 본선에 나갔다. 그랬던 대통령이 정치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 손을 잡았다. 일본군 장교는 국군 장교가 되었으며 조선총독부를 위해 일했던 특고형사는 경찰 간부가 되었다. 판사, 검사, 공무원, 교사, 지식인, 경제인도 모두 독립국가의 지배층이 되어 예전보다 더 큰소리치며 살게 되었다.

월드컵 예선전 내용은 정말 황당하다.
고작 축구경기를 위해서 들어오는 선수들이
단지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대한민국에 들어올수 없다니
이런 황당한 경우가 있나...

난 이것이 진정 이승만이 일제에 대한 혐오의 감정만으로
행동한 것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국민들에게 보여주려는 '쇼'가 아니었을까?

대한민국 제헌국회는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와 특별경찰 특별검찰, 특별재판소를 설치했다. 반민특위는 일단 682명을 조사해 559명을 특별검찰에 송치했다. 특별검찰이 그중 일부를 기소하자 특별재판소가 재판을 열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국회가 헌법의 삼권분립 정신을 해친다며서 반민특위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그 절정은 1949년 1월 반민특위가 노덕술을 체포한 사건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노덕술을 즉각 석방하고 반민특위 관계자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그에게 노덕술은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해 악랄하게 고문했던 일제 특고형사가 아니라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공산당을 때려잡는 대한민국의 경찰관이었다.

노덕술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B%85%B8%EB%8D%95%EC%88%A0

을사오적 못지않은 친일파 매국노
광복 후에도 출세를 위해 동포를 팔아먹는 최악의 인간 말종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의 경찰 간부. 일제강점기 당시 창씨개명한 이름은 마쓰우라 히로(松浦鴻).
좌우를 막론하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공인된 인물이며,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된 인물이다. 혈압주의

'인간 말종'이라... 이렇게까지 심하게 표현되는
위키의 내용은 본적이 없는 듯 하다.

그는 반이승만 세력 숙청, 좌익분자 검거를 주도했던 사람이다.
이승만이 반공투사라고 극찬했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했을지는 짐작이 간다.

이승만은 결코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을 처벌할 생각이 없었다.
아니 처벌을 원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그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고 활용하려 한 것이다.
"일본에 대한 분노보다 공산주의에 대한 분노가 훨씬 컸다."

마치 어떤 한 개인이 가족 내에서 다툼이 일어났을때
남보다 더 가족을 증오하는 모습을 보이는 행동과도 닮아 있는 것이다.
미움의 감정이 남보다 못한 상황들은 너무나 자주 인간들의 모습에서 나타난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반민특위 해체와 정부요인 암살 음모를 꾸몄다가 실패하자 반민특위법 제정과 특위활동에 앞장선 젊은 국회의원들을 간첩으로 몰아 구속했다. 소위 국회프락치 사건이다. 국회는 친일파 비호세력을 주축으로 새로운 특위를 구성했다. 반민특위는 이렇게 막을 내렸고, 국회는 1951년 반민법을 폐지했다. 처벌받은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친일파를 처단하고 친일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대한민국의 약점이 되었다.

처벌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커다란 수치가 아닐수 없다.

국가에 해악을 끼친 사람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또다시
그들에게 지배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그들이 지금까지도 계속 살아남아 있는 기득권이며
드넓게 퍼져있는 적폐세력들은 아닐런지...

2018년 대한민국에서 '언론'의 모습은
'기득권'이라 불러도 크게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이승만 시대의 언론은 조금은 다른 모습을 보인다.

각종 탄압에 의해 혹은 자발적으로 독재에 부역하는 언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은 언론들이 독재에 저항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사람들이 못배우고 무지했던 나라에서
언론은 그래도 가장 시대를 앞서가는 지식인들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리더로서의 사명감 같은 것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결국 그것은 419의 또다른 동력 중의 하나였다.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은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채 미국에 종속되어 살고 있다는 열등감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독재의 빛과 어둠이 공존했던 1980년대 대한민국 사회 한복판에서 주사파가 탄생한 배경에는 바로 이 뿌리 깊은 민족주의적 열등감이 놓여 있었다.

열등감이 존재하는 지는 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그러한 열등감이 존재한다면
2018년 남북정상회담이 끝난 지금은 이제
그따위 열등감은 털어버려도 되는 시점이 되지 않았을까?

북한이 이제는 경제 발전을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많은 북한 사람들이 남한의 드라마를 즐겨 본다고 한다.
터무니없는 남한에 대한 동경을 가지지 않을까 우려되다.

평범한 남한의 서민들조차 우리의 드라마를 보면서
열등감이 느껴질 때가 많은데 그들은 오주하랴...
남북 화해 시대에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할 부분이라 확신한다.

미완의 혁명 4·19

대통령 3선 금지 조항을 없애는 헌법개정안이 국회에서 한표 부족으로 부결되자 소수점 이하를 떼버리고 찬성률을 반올림해 가결을 선포하는 기괴한 반칙까지 저질렀다. 소위 사사오입 개헌이었다. 이미 12년을 집권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나이 80이 넘어서 또다시 대통령 선거에 나섰다. 선거일은 1960년 3월 15일이었다. 그런데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선거 직전 지병으로 별세하고 말았다. 현직 대통령이 단독 후보가 되었기 때문에 선거는 하나마나였다. 문제는 자유당 이기붕 후보와 민주당 장면 후보가 맞붙은 부통령 선거였다. 당 조직뿐만 아니라 국가 행정조직까지 총동원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투개표 조작을 감행한 것이다.

사사오입 개헌이니 각종 부정한 음모와 술수 혹은
공권력을 동원한 악행들 또한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3.15 부정선거에 대한 내용이나 이런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얼마나 잘못되었는지의 정도를 파악하는데는
의미가 있겠지만 그다지 흥미는 없다.

아무런 능력도 자격도 없는 자들이 정권을 잡고 있었던 것이라는
차고도 넘치는 증거들의 향연이다.

혁명의 첫 징후가 나타난 곳은 대구였다. 1960년 2월 28일 일요일에 수성천변에서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 연설회가 열렸다. 그린데 대구의 국공립고등학교에 등교령이 내렸다. 일요일 등교령의 목적은 학생들이 장면 연설회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경북고, 대구고, 경북대 대부고, 경북여고, 대구여고, 대구공고, 대구농고, 대구상고 등 시내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들이 교사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독재와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함성을 내지르면서 대구 중심가를 달렸다. 이것이 대구 시민들이 자랑하는 '2·28 학생의거'다.

이승만은 극단적인 반공주의자다.
반공주의라는 것이 무엇일까? 결국 공산주의에 대한 반대인데
공산주의를 반대하려니 '민주주의'를 가르칠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거치면서 학교는 '민주주의'를 가르친다.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와 삶의 현실은 너무나 다르다.

어쩌면 이당시 고등학교를 다니던 학생들은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인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경상남도 마산 시위가 특히 격렬했다. 그런데 이날 시위에 나갔던 고등학생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되었다. 27일이 지난 4월 11일, 그는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 시신으로 떠올랐다. 로켓 모양의 최루탄이 눈에서 뒷머리를 관통한 채 그대로 있었다.

Snap2.jpg

김주열 학생의 죽음과 묘하게 겹치는 한 사람이 있다.
바로 1987의 '이한열 열사'이다.

이한열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C%9D%B4%ED%95%9C%EC%97%B4

피를 흘리고 고결한 죽음의 희생을 통해 분노는 커져간다.
에너지는 축적되고 축적되어 마침내 폭발하고야 마는 것이다.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자 정부는 이 시위를 '공산당 조직이 조종한 폭동'이라고 비난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 상상력이 부족한다.
모든 잘못을 북한에 뒤집어 씌우는 행태...

4·19 당시에는 이런 주장이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가 알듯 독재 권력들은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늘 북한을 이용해 왔다.

"이 모든게 북한 때문이다"
언제나 만병통치 약으로 써막는 비열한 짓거리들...

4.19혁명의 불길을 피워 올린 것은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생들은 수많은 중고등학생이 체포되고 맞고 다치고 죽은 다음에야 집단으로 투쟁에 참여했다.

4·19의 독특한 점이 아닐수 없다.
대학생이 먼저가 아닌 고등학생들이 들고 일어나는 상황

결국 그 시대에는 대학생보다 고등학생이 더 진보적이었으며
더 지식인이었으며 더 미래를 고민하는 리더였다는 증거이다.

고작 몇년간의 교육으로 깨닫고 저항하고 행동하는 멋진 모습들...
아마도 대한민국이 지금의 영광을 얻게된 가장 큰 힘은
바로 그 당시 고등학생들이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비록 너무도 긴 시간 독재와 싸우며 지쳐갔고 이제는
늙고 힘없어졌고 때로는 꼰대라 비웃음 당하는 그들이지만
난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영광은 없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분들의 용기에 고개숙여 박수를 보낸다.

경찰이 총을 쐈다. 두 곳에서 21명이 죽고 172명이 총상을 입었다. 이렇게 되자 시위는 단순한 부정선거 규탄을 넘어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정치혁명으로 치달았다. 오후 3시 정부가 계엄령을 선포했지만 시민들은 경찰 총기를 빼앗아 곳곳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날이 저물자 서울 시내에 계엄군이 진입했다. 그런데 계엄사령관 송요찬 장군이 군의 선제발포를 공개적으로 금지했다. 이승만 정권을 지켜줄 의사가 없다는 뜻을 밝힌 셈이었다. 시민들은 두 팔을 벌려 계엄군을 환영했고 탱크에 올라가 태극기를 흔들었다.

당시의 최대 권력기관은 '경찰'이었다.
현재의 시선으로 당시의 경찰을 생각하면 안된다.

일제시대 '일본 순사'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해방 후 당시 일본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제대로된 처벌을 받지 않고 또다시 권력을 잡았는데
그 최대의 수혜자가 경찰이라 하겠다.

현재는 검찰의 권력이 경찰의 그것과는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크다.
이렇게 된 이유가 비대해진 경찰의 권력을 막기위해서
검찰에게 보다 많은 권한을 주도록 헌법도 개정하고
기소권 등도 독점하게 하고 경찰 수사도 지휘하게 하고 했던 것인데
한시적으로 하려던 조치는 결국 한번 권력의 맛을 본 검찰이
순순히 권력을 내려놓을 일도 없고
독재자의 입장에서도 검찰을 다루기가 더 쉬웠던 측면도 있다.

독재자가 아니더라도 대통령이 되고나면
검찰은 결국 대통령의 하부 기관이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경찰은 거의 군대와 비슷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승만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루어졌고,
상대적으로 군대의 불만은 상당히 컸다고 한다.
게엄군의 행동이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발포가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만일 광주만이 아니고 서울도 그렇게 회군하는 것이 아니고
진정 함께 그 항의를 이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역사에 만약은 의미없는 일이지만 전두환의 집권을 막을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수는 있다.
하지만 광주를 그렇게 오랫동안 외롭게 놓아두지는 않을수 있었을 것이다.
광주에서 희생된 많은 영혼들에게 너무나 죄송하다...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들이 거리로 나왔다. 매카나기 주한 미국대사가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가 하야를 권고했다. 법무부장관 권승렬, 외무부장관 허정도 하야를 요청했다. 4월 26일 오후, 마침내 대통령 담화가 나왔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였던 육군 소위 이강석은 4월 28일 새벽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남동생 이강욱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자살한 것으로 발표되었다. 주한 미국대사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하와이로 간 이승만은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65년 7월 세상을 떠났다.

이승만은 그렇게 또 빠져나간다.
마치 전두환이 아직도 살아서 떵떵거리며 살고있는 모습과 똑같이...

역사에서 심판받아야 마땅한 사람들이
마땅히 심판받는 모습을 보는것은 너무 힘들다.
그것이 또 역사의 운명인지도 모른다.

4.19 혁명 - KBS 영상실록

4.19는 미완未完의 혁명이었다. 민중의 힘으로 독재자를 축출하고 새 정부를 세웠다는 점에서는 분명 성공한 정치혁명이었지만 그 혁명을 완성할 능력과 의지를 가진 주체가 없었기에 혁명의 정치적 결과는 기존 정치세력 민주당의 집권으로 귀착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자유한국당은 박근혜로 인해서 국민의 심판을 받는 중이다.
절대 권력자를 국민의 손으로 끌어내렸으나
그 힘을 받아갈 민주당은 너무 아쉽다.

국민들의 지지도에 취해서 벌써부터 안일한 모습을 보이는 상황들...
내부 권력 다툼... 아 진정 인간의 본성이라 어쩔수 없는 것이란 말인가!

문재인이란 인간은 얼마나 비현실적인 인간인지
다시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4·19가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민중이 궐기해 권력자를 축출하고 정권을 바꾼 위대한 사건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4·19는 신생국가 대한민국이 정통성 있는 국민국가를 향해 내디딘 첫걸음이었다.

첫걸음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을 맞는다.
성공인듯 보였으나 꿈같이 사라졌다.
629 선언으로 성공인듯 보였으나 짖밟혔다

촛불로 혁명으로 우리는 승리한듯 보인다
하지만 이 승리가 언제 또 짖밟힐지 모른다

어쩌면 영원히 끝나지 않는 싸움을 우리는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좌절하면 바로 그 자리가 끝인 것이다.

영원히 진보의 길로 승리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
역사는 우리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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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는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었고
5·16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와, 표현 정말 좋아요.
정말 그러네요.

때로 조금 더디어도 역사는 진보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제 주진우 기자의 책을 읽었습니다.
주기자는 아직도 독립운동 중이더군요..ㅎㅎㅎ
나치 부역자를 청산한 유럽의 국가들에 비해
나라를 팔아먹고 동족을 수탈한 사람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또다시
그들에게 지배되는 악순환의 고리에 갖혀
지금까지도 계속 살아남아 있는 기득권을 용인하고 있다는
열등감이 있습니다. ...

기원전 철학자 프라톤의 말이 아직도 유효한 나라에 살고 있다니 씁쓸합니다. ..

즉시 리스팀하고 풀봇드립니다. ^^ 역시 감탄합니다.^^

아직도 독립운동중인 주진우 기자가 언젠가는 올해의 기자상을 넘어 더더 많은 찬사와 주목을 받는 날이 오길 바랍니다. 언론의 독립은 아직 멀었습니다.

아... 너무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 뭐라고 답을 적어야 할지 모르겠네요. 선거 연령을 낮추너야 합니다 일단은. ㅎㅎ 1987에만 봐도 그 엄혹한 시기에 기자로서 책임을 넘어 시명감으로 일하는 기자들이 있더라구요. 동아일보였는데, 조중동 으로 묶여 요새는 왜 그런짓ㅇㄹ 하고 있는지... 정권은 바뀌고 국민들의 심판을 받고 있는(?) 자한당... 왜그러나 모르겠습니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그러나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줄 알았던, 잘 모르는 일들이 두루마리에 적혀진 듯한 글이었습니다. 유시민 작가는 대단한 사람 같습니다. 리스팀 합니다.

장문의 글 잘 읽었습니다. 다른건 다 동의 한다고 해도(생각이 좀 다를수도 있으니...)

이승만 대통령은 엄연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특히 일본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반감을 보였다.

이 부분은 동의가 참 힘드네요. 자기의 국적을 일본으로 표기하고 독립 운동에는 아무런 관연한 역사적 자료가 없는것으로 알고 있는데 독립운동가 였다고 하니 이 부분은 어떤 근거로 말씀 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잘못 알고 있을수 있어서 여쭤 보는겁니다.

일반적인 눈높이에서 특히나 상해 임시정부를 잇는 그분들의 사고에서 이승만이 조금은 곁길로 샌 감이 없잖아 있지만, 어쨌든 그도 그 나름대로 독립에 힘쓰는 독립운동가라는 것은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방식이 좀 남달랐다고 평가해줄 수 있는 정도랄까...

아, 그리고 그 문장은 유시민씨의 평가라서 ㅋㅋ 제 평가는 아닙니다.^^

네. 제가 이승만에 만행에 대해서만 공부를 해서 그런가 봅니다. 잘한것에 대해서도 찾아 봤는데 없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어떤 면에서 그런가 해서 여쭤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 라는 얘기가 있지요. 현재의 상황은 많은 생각을 하게합니다.

@yhoh님 초등학교 아니 국민학교 다니실 적이 박정희 정권 집권기였군요...

모든 발전의 시작은 진보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ㅎㅎ할말은 많지만 여기까지....ㅎ

담을 기약해요 간절히 ....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은 반민특위 해산부터 시작된거죠...
그러나 저는 찬탁 반탁 운동부터 한 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예전에 했었습니다. 반탁이 그렇게 지고지순한 명제였는지 같은거요..

신탁통치와 관련한 부분은 참 민감하기도 하고 어려운 부분인 듯 합니다.
당시의 상황과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관점은 또 엄청난 차이가 있구요...

역사는 반복된다지만 제발이지 이제는 그만 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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