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9

in #kr-diary5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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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쓰는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인지라, 용어 정리를 하고 본문으로 넘어가보도록 하자.

로맨틱, 안티로맨틱은 형용사이기 이전에, 각각 로맨틱한 사람, 안티로맨틱한 사람을 뜻하는 명사다.

곳곳에서 많이 보이는 '로맨티스트'란 용어는 사실은 존재하지 않으며, 로맨티시스트(Romanticist)의 잘못된 표기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당장 구글에 Romantist를 치면 Did you mean romanticist? 라고 뜰 것이다.) 비슷한 예로 각각 나르시시즘(Narcissism), 나르시시스트(Narcissist)의 잘못된 표기인 나르시즘, 나르시스트가 있다.

그런데 로맨티시스트는 사조로서의 낭만주의를 표방하는 낭만주의자를 뜻하는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나는 안티 로맨티시스트보다는 안티로맨틱을 택해서 쓰고 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들 한다. 비록 자칭이긴 하지만 나 같은 안티로맨틱에게도, 분명 극단적으로 로맨틱한(엄밀히 말하면 로맨틱해 보이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가령 로맨스에 해당하는 관계가 시작되려면 반드시 첫 눈에 반할 것을 고집하는 점이 그렇다.

그런데 그게 정말 로맨틱한 것일까? 내 생각엔 결코 그렇지 않다. 반해서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안티로맨틱 유형의 인간에게 힘든 것인지 익히 알고 있어서이다. 그래서 확실히 반한 사람과만 관계를 시작하게 된다.

마치 오랫 동안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에서 가급적 편안한 자리를 고르는 것과 흡사하다. 아무 이유 없이 약속을 취소할 권리, 음악을 듣는다는 이유로 조용히 해달라고 할 권리, 아무리 귀중한 휴일이라도 내가 보고 싶지 않으면 안 볼 권리 등은 관계 속에서 침해받게 되어 있다. 이러한 것들을 가까스로 지켜낼 수도 있겠지만,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할 마음이 있다면 결국엔 그만큼 대가를 지불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첫눈에 반한 그 순간에 대한 기억, 그리고 애초에 반해버린 내적, 외적인 부분들은 관계에 대한 회의감이 늦가을 바람처럼 찾아들 때, 훈훈한 화톳불이 되어줄 것이다.

물론 그 불씨마저 꺼지게 되면, 이제 그만 길을 떠날 시간이 온 셈이다.

이렇게 말했지만, 첫눈의 순간에 이토록 무게를 두는 것에는 사실 아주 단순한 이유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바로 그런 순간들에 익숙해져서, 그 이하(?)에는 만족하지 못한다거나.

때는 초등학교 졸업반, 아니 그 전 해쯤이었다. 여자아이들은 상당수가 조숙하고 이성에 더 관심이 많았던 반면, 남자아이들은 서서히 그렇게 되어갈 무렵이었다. 이미 여러 번 언급했듯이 나는 죽 외국에서 자랐는데, 한 도시에 그리 오래 살진 않았기 때문에 그 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반에서 가장 인기 있는 남자아이 둘이 있었는데, 단짝이었다. 그들의 최고 관심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축구였다. 그 중 한 명인 나이절은 막 여자 친구가 생긴 참이었고, 나머지 한 명인 리엄은 아직도 여자아이들을 귀찮게 생각하는 쪽에 가까웠다. 나이절이 여러 모로 누나 같은 자신의 여자 친구와 대판 싸우는 일이 잦아지면서, 모르긴 몰라도 그 둘의 세계는 점점 변해갔을 것이다. 둘 다 발육이 좋은 여자아이들에 비하면 아직 어린 아이 같았고, 작았다. 일단 내 눈에 나이절은 정말 못생겼었다고 해두자.

그러나 나이절의 단짝, 리엄은 달랐다. 다른 것보다 나는 그 애가 정말 내가 본 것 중 가장 파란 눈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여자에 관심이 없을 정도로 어린 아이긴 했지만, 뭐 그 때는 그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다 그랬으니까. 그러나 그 정도의 관심 이상은 생겨나지 않고 있었다. 내 이상형은 문학에서는 맥베스, 연예인 중에서는 그때 10년은 족히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병사 역할로 시리즈물에 출연하면서 아주머니들 사이에서나 인기가 많았던 배우 숀 빈이었고, 내게 별 관심 없는 또래 남자아이에겐 '눈이 예쁘구나' 이상의 생각을 할 겨를은 없었으니까.

문제의 그 날이 오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 학교에서는 체육 시간에 수영을 하는 일이 잦았다. 사춘기에 들어선지 꽤 시간이 지난 여자아이들 입장에선 수영을 간다는 것 자체가 여간 신경쓰이는 일이 아니었는데, 막상 물에 들어가면 주어진 거리를 완주하는 것만 신경쓰기도 바빴다. 스무 명 정도의 아이들이 여러 갈래로 나뉘어서 100 미터 정도씩을 자유형으로 수영하곤 했는데, 소독약 냄새가 나는 수영장 물은 그리 유쾌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코스 정도 남겨뒀을까, 물 속에서 누군가와 부딪쳤다. 말 그대로 수중 충돌이었기 때문에 아프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나보다 키가 작은데도 밀려나질 않아서 나는 눈을 뜨고 수영장 바닥에 발을 디뎌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정확히 어디를 어떻게 부딪쳤는지도 모르겠다. 물 속에서 눈을 감다시피 하고 있다가, 갑자기 엉켜드는 형체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었을 뿐이다. 그리고 앞에 있는 사람과 눈을 맞추고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아, 너구나(Oh, it's you.)."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상대가 누군지 깨달은 것은 한참 시간이 흐른 뒤였다. 분명 무의식적으로는 누군지 알았으니 그렇게 말을 내뱉은 것 같은데, 머릿속에서는 계속 의문이 울리고 있었다. '얘는 누굴까.'

그 외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부딪쳐서 민망하다는 생각조차도.

학교에 돌아가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나와 부딪쳤던 게 리엄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그 사건 이후로 걔가 변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내가 처음부터 좋아했던 그 눈이 달라졌다.

평소에는 매우 견고한 파란 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날 이후로는 눈이 마주치면 물처럼 변해버리곤 했다. 나는 그 물로 변하는 눈을 중독적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그냥 예쁜 눈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눈이 내게 반응해서 좋은 것 사이의 차이는 너무나도 극명했던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오는 성취감이랄까, 뿌듯함의 이유를 그 순간, 그러니까 물 속에서 부딪친 순간에서 찾게 되었다. 여자아이들을 귀찮아하고 축구밖에 모르던 애가 변한 이유는 순전히 그 순간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니까. 물론 이미 알던 사이였으니 문자 그대로의 '첫눈에 반한' 순간은 아니었지만,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 그 날은 서로 처음 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그 순간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그 후 그 애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해두기로 하자. 달갑지 않은 제 3자들이 끼어들면서, 엉망이 된 기억들만이 남아 있다.

어쨌든, 안티로맨틱으로서 첫눈에 극적인 감정이 있을 것을 고집하는 이유 중에는 어쩌면 이런 것도 있는지도 모르겠다, 뭐 그런 얘기이다.


지난 회차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1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2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3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4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5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6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7
어느 안티로맨틱의 수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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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이 시간에...

그럼 재방이나...

흥미진진하게 전개되려나했는데~ 아쉽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 뒤로 벌어진 일이 이제 보면 흥미진진할 수도 있겠네요, 초딩이지만. 하지만 뭐 이런 이야기는 계속 있으니깐요.

끝난 거예요??

ㅋㅋㅋㅋㅋ일단은요. 다음에 이어 나올지는 모르겠지만요...

초딩 이야기가 더 설례요. 나이가 들수록 애가 되는것 같아여

ㅋㅋㅋ귀여우시네요!

손좀 녹이고 감...


따땃...

ㅋㅋㅋㅋㅋㅋㅋ손가락이네ㅋㅋㅋ

짱귀ㅋㅋㅋㅋㅋㅋ

ㅇㅇ저러는거 보면 걱정...야무지게 알아서 하겠지만...

생긴것도 야무지게 생겼네

확실히 나이절 이란 이름보다 리엄 이란 이름이 더 멋지게 느껴짐요. -.-+

ㅋㅋ 역시 디테일에 강하신 판다님...끝의 표정은 왜 째리는 것 같죠?!

추측이긴 하지만 확신에 찬 날카로운 눈빛... 뭐 이런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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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웃지말고 메세지 확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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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같은 눈!

으아아아악

달갑지 않은 제 3자들이 끼어들면서, 엉망이 된 기억들만이 남아 있다.

이 한 줄에 마음이 참 씁쓸해지네요.

아, 저 아이와의 사이만 보면 그렇지만, 다 웃을 수 있는 추억들 뿐이라서 괜찮아요.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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