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최초의 육아 성적표.

in #kr-daddy7 years ago


01.jpg

출저: pixabay



살면서 받아온 수많은 성적표, 성적표에는 기본적으로 거짓이 없었다. 가끔 운이라는 놈 때문에 내가 갖춘 노력이나 실력이 다소 왜곡되어 나타나기는 했으나 항상 거짓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지난주에 집사람이, ‘영유아건강검진결과표’라는 걸 들고 오기 전까지는.


02.jpg
국민건강보험 홈페이지-영유아 건강검진



포스팅을 하려고 인터넷 국어사전을 찾아보았다. 엄밀히 말하면 그건 성적표가 아니다. 성적成績이라는 말은 ‘해 온 일의 결과로 얻은 실적’을 말하는 것이고, 실적이란 ‘실제로 이룬 업적이나 공적’을 말하며 업적은 ‘어떤 사업이나 연구에서 얻은 공적’을 말하는 것이며 공적은‘노력과 수고를 들여 이루어낸 일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므로. 이러저러하게 키우려는 의도 없이 하루하루 아이와 상대해주었을 뿐이니까 사실 내겐 그 종이가 성적표가 아니었다. 다만, 노력과 수고를 들여 이루어낸 일의 결과라는 점에서 성적표와 비슷하다고 해 두자.


03.jpg


육아에도 성적표가 있다는 것은 그 종이를 보고나서 처음 생각해 보았다. 기껏해야 키가 얼마나 컸는지, 살은 얼마나 쪘는지 정도를 숫자로 나타낸 것에 불과하지만 내 눈가 눈을 뗄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88올림픽이 개최된 그 시절 쯤, 유치원에 등록을 하고 원복을 맞추기 위해 신체치수를 잴 때의 일이다. 유치원 건물에 붙은 사무실쯤이었으리라. 내 몸을 이리저리 재던 사람이 ‘너는 남보다 좀 넓은 어깨를 타고났기에 어깨에 맞춘 옷은 어쩔 수 없이 소매부분이 손등을 덮을 것’이라고 했다. 어머니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넌 머리가 참 작다. 모자는 소小로 하면 되겠다, 아니 이게 좀 이상하네. 보기보다 너 머리가 큰가보다. 중中으로 하자. 응? 이게 왜 이렇지? 어이, 저기 대大 갖고 오세요. 자 이제 맞지?’ 여전히 머리가 좀 아팠다. 더 큰 건 없는지 물어보았고 아래와 같은 대답을 들었다.

‘아, 특대해야겠네. 이건 주문넣어서 받아야하거든. 너 입학하는 날 여기 와서 모자 받아가라, 알겠지?’


분명 집사람은 이 종이를 받을 때 의사로부터 머리둘레에 대한 무언가를 들었을 것이다. 틀림없다. 하지만 나는 모른체했다. 옛 생각을 하면서 물끄러미 종이를 바라보는 내 옆모습을 보던 집사람이 한마디 덧붙였다.

여보, 의사가 머리가 좀 크긴 한데 인지능력이 괜찮은 편이라 정밀평가는 안 해도 된대. 그리고 검사할 때 의사가 봐도 머리가 좀 컸나봐. 숫자를 좀 낮춰서 넣었다던데?

아, 숫자를 낮춰 기록했는데도 100명 중에 1등인 내 아이의 머리 크기, 심지어 선의의 거짓까지도 포함된. 마음속으로만 아래 사진의 아저씨가 외쳤던 그 대사를 나즈막히 외쳤다.


04.jpg









Sort:  

웃프군요.. 😂

자식을 살피다가 의외의 부분에서 나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예전에 본 시의 한 구절, '발가락이 닮았다'는 부분이 생각나는 날이었습니다. 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가족여행으로 대마도를 한 번 다녀온지라 그 부분 포스팅 잘 읽었습니다.

이 새벽에 구슬픈 외침이라니.. 아니 웃픈이겠죠?ㅎ
이왕에 머리크기가 닮았으니 아이도 대구님 닮아 매력적일거에요ㅋㅋ

p.s. 아 근데 저번에 세친구 링크 봤는데... 유머코드는 맞지 않는걸로.. ㅠ

숫자와 상관없이 자기 자식은 예뻐보이는건지 제 눈엔 그렇게 크게 보이질 않네요. 덕담 감사합니다^^

의사 선생님이 이왕 선의의 거짓말을 할 거면 조금 고친 사실을 부모님께도 알리지 말지...ㅠㅠ

ㅎㅎㅎ원래 완전한 진실이나 완벽한 참 어렵습니다.

헉 이런ㅜㅜ 슬프면서도 재미있는 사연이네요. 사실 읽는 제 입장에서는 슬픔보다는 재미가 훨씬 커서 또 무척 즐겁게 읽고 말았습니다. 옛날에는 머리가 크면 똑똑하다는 속설도 있었잖아요! 또 어릴 적에는 신체 발육이 제각각이라 머리만 먼저 커버린 걸지도 몰라요! 저도 아기때는 코가 아예 없는 수준으로 낮아서 이모들의 걱정을 샀는데, 10대부터는 코가 쑥쑥 자라서 지금은 너무 높을 정도거든요. 음 쓰다 보니까 과연 이게 위로가 되는 말인지 갑자기 혼란스러워지네요ㅎㅎㅎ

재밌게 읽기를 바라며 쓴 글입니다. 유전으로 봤을 때, 성장 후에도 제법 큰 편일거라 생각합니다만 큰 걱정은 하지 않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헤어스타일을 선택하는데 제약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은 많이 드네요. 위로해주신대로 10대부터는 머리가 쑥쑥 작아져서 성장 후엔 너무 작을 정도가 되길 바랍니다ㅎㅎ

아아... 유전인가요ㅠ 저도 같은 입장인지라 공감이 많이 됩니다. ㅎㅎ 머리크기와 지능은 비례한다는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근데.. 막짤 애비메탈 저분은 잘 지내는지 모르겠네요. ㅎㅎ 재밌게 잘보고 갑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ㅋㅋㅋ그래도 얼굴이 작은편이라 '덴마크, 대갈장군' 따위의 별명은 항상 다른친구가 가져갔는데.. 제 아이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ㅋㅋㅋㅋㅋ 대구라기에 반가워서 보고 왔는데 글 넘나 재밌네요 푸와~!

감사합니다^^ 자주 뵐게요.

임요환선수의 별명이 임대가르시아였죠. 예비군에서 찍힌 사진을 보면 철모끈을 못 하는 것도 보였었습니다.

뛰는놈 위에는 항상 나는놈이 있는가봅니다. 저는 철모는 잘 들어갔거든요ㅎㅎㅎ

Coin Marketplace

STEEM 0.16
TRX 0.15
JST 0.028
BTC 58192.51
ETH 2295.28
USDT 1.00
SBD 2.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