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스팀] 우리를 힘들게 하는 '못난 글' 고쳐보기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in #kr-book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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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셔



일전에 어느 미술 작가가 나에게 작업 노트를 보여주며 고칠 점을 봐달라고 했다.

작가는 유기적으로 변화하는 날씨와 그를 끊임없이 뒤쫒는 기상청의 중첩되는 상황을 캔버스 위에 평면으로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추상의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무슨 말을 하려는 줄은 알겠다. 그러나 문장에 불필요한 수식이 많았다. 군더더기를 빼 봤다.

날씨는 기상청의 예상을 매번 뒤엎곤 한다. 작가는 이 상황을 캔버스에 그렸다. 그림은 추상 형태로 표현되었다.



이를테면 '캔버스 위의 평면으로 표현하고자 하였으며' 이런 말은 사족에 가깝다. 한 마디로 '그림 그렸다' 라는 이야기 아닌가. 내가 고친 문장이 완벽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문장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별 거 아닌 문장으로 바꾸는 것에도 나는 훈련의 시간이 필요했다.



ISBN - 9788965133520



현재 비트코인 논쟁으로 미움받고 있는 유시민이지만, 그의 글쓰기 능력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의 책을 읽고 글쓰기도 배워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는 <글 쓰는 법>같은 부류의 책들을 믿지 않았다. 흔한 자기계발서처럼 하나마나한 당연한 주장만 들어있고 막상 독자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편견이 있었다. 글 잘 쓰는 법은 그저 좋은 책 많이 읽고 많이 쓰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는 잘 해왔다고 믿었다. 평소에 좋아했던 유시민이라는 저자가 아니었다면 안 읽었을 책이다.

그런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뒷통수에 망치를 얻어맞는 느낌이었다. 내 글이 여태껏 얼마나 쓸데없는 군더더기로 뭉쳐져 있었는지, 부자연스러운 표현으로 덮혀 있었는지 알게 해줬다. 다른 글쓰기 실용서는 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효과적인지 모르겠다. 이 책은 확실히 내게 도움이 되었다. 이 책을 읽기 전과 후의 글쓰기를 대하는 내 태도는 달라졌다.

말랑말랑한 살이 아닌 뼈대같은 문장



이 책은 유시민이 서두에서 밝혔듯이 문학적 글쓰기가 아닌 논리적 글쓰기를 돕는 훈련서다. 홀로 일기장에 적어놓고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간직할 글쓰기라면 해당 사항이 없겠지만, 모든 논리적 글쓰기는 원칙이 하나 있다. 남에게 뭔가를 주장하거나 보여주기 위한 글쓰기는 그에 합당한 자연스러운 형식을 갖춰야 된다는 것이다.

책에서 유시민은 본인이 과거에 썼던 글은 물론 지난 세월호 사건 이후 국무총리가 읽었던 대국민 담화문, 헌법재판소의 결정문, 누군가가 블로그에 올린 텐트 상품평까지 다양한 글을 사례로 들어 무엇이 문제인지 진단한다. 그리고 좀 더 나은 문장으로 수정본을 제시한다. 사람마다 호불호가 다르겠지만, 나는 유시민이 고친 글들이 원래 글보다 훨씬 깔끔하고 더 낫다고 생각했다.

유시민의 책은 <후불제 민주주의>, <나의 한국현대사>, 그리고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 까지 여태껏 3권을 읽었다. 유시민의 글에는 화려한 수사가 없다. 정말 건조한 단문으로 글을 이어나간다. 그의 글은 말랑말랑한 살이 아닌 단단한 뼈와 같다. 건축으로 비유하자면 외벽에 시멘트를 바르기 전 굳건하게 서 있는 철골 구조물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으로만 나아간다. 겉보기에는 정말 멋없고 딱딱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겠으나 계속 읽다보면 진짜 좋은 문장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려운 글? NO! 못난 글!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어려운 한자말과 애매모호한 뜻이 담긴 화려한 수사가 남발하는 글을 보고 '굉장히 잘쓴 글' 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진은영의 <문학의 아토포스>를 예로 들며 이러한 문장을 낱낱히 파헤치는 유시민의 분석에 정말 속이 후련했다. 평론 글이란 될 수 있는대로 '있는 체' 를 해야 하는 것일까? '있는 체'의 끝판왕 글은 아무래도 미술 관련 글이다. 화려한 미술 평론 글을 하나 소개하겠다.

순수한 환영이란 텅 빈 환영이며 환영이 시작되는 지점이며 미처 시작되지도 않는 환영이다. 그리고 그 환영의 제로지점 위에 카오스를 방불케 하는, 파토스를 떠올리게 하는 스쳐 지나간 것들이며 흘러가는 것들, 곧 하릴없이 흐르는 생각의 편린들이며 인연의 계기들이 무분별하게 쏘아올려진다



???????!!??예전에 <월간미술>이라는 잡지를 읽다가 하도 해괴망측한 문장이라 낄낄대며 기록해놨던 문장이다. 이러한 문장들이 미술을 쓸데없이 난해하게 만들고 대중들이 등을 돌리게 만든다. 이 글을 읽고 "미술은 역시 철학적이고 어려워.." 라고 생각하는 대신에 " 아놔 ㅋㅋ뭐 이렇게 못난 글이 다 있어?" 라고 생각해야 정상이다.

무조건 쉬운 글만이 좋은 글이라는 뜻은 아니다. 문제는 얼마든지 자연스러운 어휘로 대체해서 명료한 뜻을 전달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학술적이고 전문적인 어휘를 제외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완벽하게 설명하기란 분명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절묘한 비유를 통해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최대한 그 개념어에 가깝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것은, 글쓰기의 능력이다.

내 글부터 고쳐보자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읽으며 깨달았던 점을 내 글에도 적용해보고 싶다. 그래서 과거에 썼던 글을 들추어봤다. 이제는 읽기도 민망한 대학교 4학년 때 쓴 작업 노트다.

현장에서 그리기. 이것은 바로 내가 그동안 그림을 그리면서 정해진 한 가지 원칙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익숙한 재현방식에 어떤 상징을 불어넣는 것도, 그림 속에 은유와 수수께끼를 주입하는 것도 아니라 현장 속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대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구현해내는 새로운 형식을 추구한다. 회화적 사실이란 분명 어떤 대상을 보고 사진적 사실로 옮기는 것이 아니다. 회화적 사실이란 대상과의 시선을 마주치고 그 사이에 있는 수많은 사건들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평면으로 기록되어버린 그 무엇이다. 현장 속에서 그림그리기란 형상에 따라 다르게 변하는 공간의 구조와 흐름, 공기의 밀도와 울림, 시선의 움직임과 거리가 표현 가능한 환경이다.



열정은 솟아오르고 가슴은 뜨거운데 문장력이 받쳐주지 않았던 시기다. 지금 보면 별 심각하지도 않은 문장을 굉장히 현학적으로 썼다. 무엇보다 의미가 불분명한 문장이 많다. 미술에 있어서 "익숙한 재현방식" 이 무엇을 뜻하는지, "회화적 사실"과 "사진적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깨달았으니 보는 사람이 이해하던가 말던가" 라는 식의 굉장히 불친절한 문장이다.

"평면으로 기록되어버린 그 무엇" 이란 문장도 어색하기 그지없다. 내가 다른 사람 앞에서 실제로 "제 그림은 말이죠, 평면으로 기록되어버린 그 무엇입니다!" 라고 말한다고 생각해보자. 정녕 손발이 오그라드는 표현이다. 또 문장이 너무 길다. 생각은 많은데 문장 구조를 생각하지 않고 주절주절 내뱉은 결과다. 책에서 배운 내용을 상기하며 고쳐봤다.

현장에서 그리기. 스스로 정한 이 원칙을 지키면서 그림을 그렸다. 어떤 대상을 개성 없이 사진처럼 배낀 후에 억지로 상징을 갖다붙이는 식의 그림은 싫다. 나는 내 눈으로 직접 대상을 봤고 현장의 공기를 느끼며 그림을 그렸다. 사진만이 나타낼 수 있는 것과 그림만이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분명 다르다. 그림은 같은 대상이라도 화가의 주관적인 느낌을 짙게 드러낼 수 있는 매체다. 내 주관적인 붓질이 대상의 실체를 오히려 사실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서 있는 공간의 구조와 흐름, 공기의 밀도와 울림, 시선의 움직임과 거리감을 충분히 고려하며 대상을 그렸기 때문이다.



고친 글이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원래 글보다는 확실이 더 낫다. 단문으로 끊어서인지 하고자 하는 말이 더 명료해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 내가 느꼈던 감정을 더 솔직하게 번역했다. '회화'라는 단어는 모두 '그림' 으로 바꿔썼다. '미술'은 조각과 건축을 모두 아우르는 단어라 해도, '회화'와 '그림'은 사실상 같은 의미다. '회화'라는 한자말을 쓰면 조금 있어보이고 우리말인 '그림'이라 하면 수준이 낮아보이는 걸까?

나는 '회화'보다는 '그림'이 더 발음하기도 쉽고 쓰기에도 자연스러운 단어라고 생각한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그림 그린다' 라는 표현을 거리낌없이 써왔기 때문이다. 미대의 '회화과'를 '그림과'로 바꾸면 어떻겠느냐라고 제안했던 서용선 작가의 문제 의식에 깊이 공감한다. 이렇듯 글은 문장과 단어 하나하나 세심하게 신경쓸수록 더 나아진다. 물론 아직은 훈련 단계라 두 배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일이다.

글쓰기는 '거리두기'


글을 쓴다는 행위는 기본적으로 '거리두기' 다. 자신의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을 밖으로 꺼내어 글자로 대상화시키는 작업이다. 내 안에서 형체없이 있던 것이 밖으로 탈출해서 글자라는 물질로 변환된다. 글쓰기는 한발짝 물러서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그런데 내 글을 남들과 공유하고 싶다면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한번 더 자신의 글을 대상화시켜야 한다. '보는 사람 입장'에 서서 자신의 글을 돌아봐야 한다. 이로써 두 번의 거리두기가 가능하다. 최초의 생각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더 확고해지고 명료한 언어의 옷을 입게 된다. 앞으로 쓰게 될 모든 글에 대해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두고 여러번 검수하는 과정을 거쳐야겠다. 무엇보다도 "말에서 멀어질수록 못난 글"이 된다는 말을 명심해야겠다.


@thelump


지난 북스팀 포스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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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샘 말에 따르면,

자기 분야를 어려어 보이기 만드는데-
경제학자는 성공하고, 미학자들은 비웃음을 샀네요...ㅎㅎㅎ

사족들을 다 제거하라.
간단할수록 강하다.
글쓰기는 발췌요약부터 시작하라..---열심히 실천중입니다.

기억이 맞다면 거기서 읽은 것 같네요...^^

맞아요. 요약 잘하는 사람이 글도 잘 쓴다는 챕터가 있죠. 저도 동의합니다.
그리고 미술 관련 종사자들은 비웃음 살만한 글들을 실제로 많이 생산하긴 하는 것 같아요 ㅎㅎ

꼭 한번 읽어보고 싶던 책입니다~

저는 도움이 되었습니다. 시간나시면 읽어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책을 읽고 바로 실천하시는 모습이 멋집니다!
저도 저 책을 읽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던걸로 기억합니다. 다시봐야겠어요ㅎㅎ

맞아요. 여러 번, 주기적으로 읽어야 할 책인 것 같습니다.

저도 제 글쓰기를 돌아보게 되네요. 버리고 또 버려야 하는데..

끊고 버려야 되죠. 그런데 일상생활 하면서 sns에 글쓰기 하면서 저런 것까지 신경쓰기 사실 쉽지 않습니다. 절로 체득되어 그냥 쓰더라도 자연스러운 문장이 되는 경지까지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봉주흐!!!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글쓰기는 역시 읽기와 듣기와 말하기와 떨어질 수 없는 거 같네요
말하는듯이 글을 쓰면 되는데 그게 쉽지 않네요
글은 읽는 사람이 아는 만큼 읽힌다고도 하지요 그렇습니다
글쓰기는 읽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말하듯이 쓰면 좋다고 믿습니다
봄날 건승하세요!!!

봉주으흐! 말하기를 하면서 쓰면 최소 두 배는 더 자연스러운 문장이 나오지 않을까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

저도 유시민의 글쓰기 특강을 읽었습니다. 물론 한번 읽었다고 그분처럼 잘 쓰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난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글을 만들지 않는 법에대해선 잘 배운거 같아요 ^^

내 머리가 나쁜가? 에서 내가 읽은 글이 잘못된 거였구나! 로 깨닫는 계기가 되었죠 ㅎㅎ

짱짱맨 태그 사용에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감사 또 감사 !

글쓰기를 되돌아보게 되는군요. 오늘 특히 글이 꼬여서 올리까말까 엄청 고민했는데요. 리스팀합니다.

리스팀 감사합니다. 글이 꼬일 때는 자고 일어나서 보면 풀리는 경우가 많더라구요 ^^

비트코인에 대한 태도를 제외한 그의 모든 걸 존경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입장이 바뀔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에서 멀어질수록 못난 글.. 쉽게 읽히지 않을수록 점점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을 보면 참 공감되기도 하는 말이네요, 제 글을 돌이켜보게 되네요 흠흠..

핵심은 퇴고를 해야한다는 것인데.. 사실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글 직업인이 아닌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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