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 어젯밤, 파리에서

in #kr-book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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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라는 도시엔 한번 닻을 내리면
움직일 수 없는 이상한 힘이 있다."

-레일라 @laylador


적나라한 내면 아래 밑바닥까지 한없이 침잠할지라도 어쩔 수 없이 우아한 글. '어젯밤, 파리에서' 이 책을 단 세 단어로 정리해야 한다면 성찰, 사랑, 성장을 꼽을 것이다. 그것은 내게 파리보다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한줄평으로 모든 평을 대신하는 영화평론가가 아니라 어찌나 다행인지. 길고 지지부진하고 주관적인 시선으로 이 책에 대해서 말할 수 있어 기쁘다.


책을 통해 파리에서 사는 그녀의 일상이 텍스트로 선명하게 재현된다. 어쩐지 그녀의 일상은 아무리 사소하고 구체적이어도 어딘가 태가 달라 시선을 붙든다. 분명 과장이 있거나 형식적으로 쓰인 문장 하나 없이 그의 글은 담백하건만, 글을 통해 보는 그려지는 그의 삶은 한없이 예술적이고 고귀하게 전달된다. 아마도 그녀가 살아낸 삶이 고스란히 책 속에 담겨있기 때문이며 일상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어쩔 수 없이 예술적이고 우아하기 때문이다. 즉,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매일의 연습을 게을리하지 않으며, 집요하게 텍스트를 탐독하고 기록하고 매 순간 사유로 그녀의 세계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만든 그녀만의 독특한 색채가 오롯이 삶을 여과하기 때문에 일상의 이야기가 이다지도 우아한 선율로 마음에 와닿는 것이다.

파리엔 언제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생전 바라지 않았던 거창한 자유로움이 늘 서려 있다. 불필요하게 타인을 신경 쓰지 않는 각각의 집합체인, 지극히 개인적인 도시 파리에서 나는 아이러니 하게도 고독함과 자유로움, 이 두가지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사는 셈이다. -96 p



언젠가 그녀는 사람들이 막연히 파리에 품은 환상과는 다른 자신이 겪은 파리의 민낯을 언젠가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구태여 파리를 변명하지도 숨기지도 않은 채 여행자가 아닌 일상의 시각을 자연스럽게 삶에 녹여 펼쳐낸다. 파리에서 살 게 될 때 겪는 불편함, 곤란함 그리고 불안의 영역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음에도 그녀의 시선을 통해 알게 되는 파리는 여전히 예술적이며 특별하다. 아니 오히려 그녀의 시선을 빌린 덕에 파리는 한층 더 복잡해지며 현실성까지 부여된 실체로 변모한다. 파리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거둔 자리에 본 적도 없는 주제에 마치 파리를 한 번 거닐고 몇 날 며칠을 보낸 뒤에야 가질 수 있는 확신에 찬 애정이 그 자리를 메꾸어버린다.





그녀의 이력은 어쩌면 독특하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자라고 파리에서 살고 있다. 덕분에 영어, 프랑스어, 한국어 3개 국어를 구사하며, 서로 다른 문화권을 오가며 타자로서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해소해야 하는 동시에 여러 곳에서 문화적 정신적 자양분을 자연스럽게 얻게 되었을 것이다. 지적인 욕구와 호기심으로 탄생한 그의 지성의 뿌리는 분명 3배 더 넓어졌을 것이다. 또한 파리에서 여러 프로젝트로 본인의 음악색을 보여주는 재즈 가수인 동시에 아이들의 다정한 글쓰기 선생님이기도 하다. 이토록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 글로도 느껴지는 성실성과 매 순간 깨어있는 자각과 그를 통한 성찰 덕분일 것이다.

돌아보면 나를 한 가지 타이틀로 규정하던 사회의 많은 것들을 깨고 이곳으로 넘어온 결정은, 내 삶에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 -124p



그중 파리가 특별한 이유는 그녀다움을 부여해 준 도시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는 데 큰 계기가 되어주었다. 그녀는 공간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공간이 시각을 만든다'고 말하며 공간에 대한 애착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내겐 그녀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다'라는 행위 자체가 그다지 중요치 않고, 내면에 대한 태도와 진정한 사랑의 추구,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또 끊임없이 배우고 살아내고자 하는 열망 만이 강렬히 남는다. 차분하고 조용한 열정과 역동이 고스란히 이 책 속에 담겨 있다. 그녀가 어디서 어떤 삶을 살더라도 그 글을 통해 드러나는 그녀란 사람의 삶은 하나이며, 그의 색깔은 확장될지언정 크게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이런 글은 그녀가 파리에서 살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이기 때문에 쓰인다.

새로운 것도 없는 것이, 내 일상의 서사는 '쌓임'이었다. 연습의 쌓임, 기록의 쌓임 그리고 그리움의 쌓임. -72p

성찰에 중심을 두지 않으면 한낱 지난 시절을 회상하는 추억거리가 될 뿐, 기록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이다.-116p


그녀는 글을 쓸 때 대충 얼버무리는 법이 없다. 글 앞에 혹독하다. 적확한 단어를 골라내 안정적인 호흡의 길이로 문장을 쓴다. 일상을 섬세하게 풀어내어 독자를 오해시키는 법이 없이 조심스럽고 치밀하고 단정하게 기록한다. 그것도 매일. 그녀만큼 치열하게 자신과의 타협 없이 하루를 열심히 멋지게 살아가는 사람이 흔치 않음에도 그녀는 늘 부족하다고 말한다. 그런 채워지지 않는 글과 기록에 대한 열망이 그녀를 작가로 만들었다. 삶을 매 순간 지각하고 성찰하고 잠시나마 성찰을 잊은 스스로를 다그치기도 한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었는지 또 충분히 최선을 다해 사랑했는지 감사함을 잊지 않았는지 사소한 순간을 쉽게 넘기지 않았는지.


그러나 결국 글을 다 읽고 나면 미소를 짓고 사랑의 마음으로 가득 차는 이유는 힘겨운 자신과의 사투 속에서도 늘 산책하는 여유를 잃지 않고 내면을 돌보고자 하는 여백에 있다. 치열하게 살면서도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따듯한 시선으로 사랑을 우선으로 두기란 쉽지 않은데도 신기하게도 그는 이 어려운 작업을 온 생애를 다해서 해내고 있다.

산책은 그런 시간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훅 떠나는 일상의 작은 여행 같은, 작은 소음마저도 즐거운 자극이 될 수 있는 절기 한 것. -28p


갑자기 태어난 글이 아니다. 시간과 삶이 만든 글, 아무도 보지 않는 짧은 글 한 토막이라도 늘 그녀는 자기의 색채를 담아 아름다운 글을 꾸준히 쓰고 있었다. 언젠가 그 글들을 나의 책장에 소장하고 싶었다. 약속대로 사랑을 담은 차분하지만 예리하고도 지성이 넘치는 멋진 책이 세상에 나왔다. 약속을 지킨 그녀와 살아내온 삶에 감사함과 애정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팬으로서 독자로서 그녀의 다짐이자 선언인 이 한 구절을 발견하고 어찌나 기뻤던지! 이 책이 시작이라고 믿는다. 글도 음악도 또 그녀도 계속되기를! 또 매일 멋진 하루를 살아내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 일터를 창의적이고 아름다운 나만의 공간으로 꾸며 사람들을 초대해 나누는 일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이다. 쉬지 않고 사유를 생산하다 보면 견고히 쌓아질 나만의 작은 일터. 언젠가 완성될 그곳을 오늘도 상상한다. 앞으로도 나의 노래를 듣는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디서든 노래할 것이고, 읽어주는 사람이 존재하는 한은 멈추지 않고 글을 쓸 것이다. 우리의 인생을, 나의 이야기를 그리고 모두의 삶을 비추는 아름다운 가사와 아름다운 사랑을 그려내며. -62p

지금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멋지게 살아낼까 정도가 전부이다. 실제로 삶에 행복이 존재한다고 믿는 방법은 다름 아닌 내 시간을 현명하게 살아내는 것이다.-18p


P.S. 레일라님의 에세이 단언건대 소장가치 1000%. 밤에 전등키고 보면 파리에서 사는 아름다운 사람이 그려지실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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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라님의 리미티드에디션을 가지고 있습죠 흐흐

엇!! 오이님 럭키하셨군요. 저도 있답니다. 후후

이분이 또!!
전에는 재즈에 빠지게 하시더니 이번에는 책에까지 ㅠㅠ
파리 근처도 못가봤는데 그리움이 쌓입니다;;;

레일라님이 또 그만! 하하 만능이시죠 :D
저 역시 가본 적 없는 파리앓이중! 크게 관심없는 곳이었는데 꼭 가보고 싶어졌어요.

친구 빠리 유학시절 3개월 정도 있었다는 이유로 2년 뒤 가족들을 데리고 자유여행 다녀왔었는데... 3번째 방문을 꿈 꿔 봅니다. 그립네요 ^^

오호 그러셨군요:D 가족여행이라니 대단하세요. eli님은 3번째 그리고 저는 첫 방문을 꿈꿔봅니다.

파리의 새벽 갓 구운 빵과 함께 커피를 마시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 언제 한 번 읽어봐야겠어요.

파리 빵이 그렇게 맛있다던데!
파리에 대한 기억이 있으시다면 더욱 좋은 책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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