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후감] #43.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by 콜슨 화이트헤드 - 당신이 몰랐던 흑인 노예 이야기

in #kr-book6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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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다.


대략적인 건 알고 있었다. 흑인 노예 사냥이 있었고, 수많은 흑인들이 잡혀갔고, 짐승만도 못한 대접을 받으며 노예로 혹사당했다. 남북전쟁이 벌어졌고, 노예 해방이 됐으며, 그 후로도 오랜 기간 눈에 보이게 혹은 보이지 않게 차별을 받아왔었다. 겉보기엔 완벽한 평등이 이루어진 듯 보이나 아직도 곳곳에는 뿌리 깊은 차별과 멸시가 숨어 있다.

2월은 '미국 흑인 역사의 달(Black History Month)'이다. 흑인들의 역사와 업적을 기리는 달을 맞아서, 나도 흑인 노예의 탈출을 다룬 소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라는 책을 읽게 됐다. 아직 남부에서는 공공연하게 흑인 노예들을 매매하고, 재산처럼 부리고 있을 때 그들을 좀 더 자유로운 북쪽 주(州)나 캐나다로 탈출시켜줬던 점조직이 바로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였다. 수많은 백인과 흑인들이 비밀리에 이들을 빼내주고, 은신처를 마련해주며 탈출시키기 위해 애썼다.

이 흑인 노예 해방 조직은 들키지 않고 비밀 대화를 하기 위해서 "지하 기찻길(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Underground Railroad)"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지만 실제로 지하를 오가는 기차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 책의 저자는 땅 속에 실제 기차가 다니는 줄 알았다고 했다. 훗날 그게 진짜 기차가 아니라는 걸 알게됐지만 저자는, "진짜로 땅 속에 도망 노예를 실어나르는 기차가 있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하게 됐고 그걸 이 소설로 쓰게 됐다.

누구나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책의 내용은 슬프고 가슴 아프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미처 읽기도 전에, 번역가의 '옮긴이의 말'만 읽고도 큰 충격에 빠졌다.


그들은 스스로를 '역장', '기관사'로 칭했고, 도망 노예들을 '승객', 그들을 숨겨주는 이들의 집을 '역'으로 부르는 등 실제 철도 용어를 은어로 쓰면서 10만명이 넘는 노예들을 자유로 이끌었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옮긴이의 말' 중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10만명.

이 조직이 힘겹게 탈출시킨 노예만 10만명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노예가 있었다는 걸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백인들에게 붙잡혀서 가족과 헤어져 낯선 땅에 내던져졌다는 뜻일까? 붙잡히다가 죽고, 노예선에 실려오다 죽고, 죽도록 일을 하다 죽고, 탈출하다 죽고. 힘겹게 살아남아 중노동에 시달리다 목숨을 걸고 가까스로 북쪽으로 탈출한 사람들이 10만명이라면. 아, 도대체 이 당시 미 대륙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짧은 시간 구글링을 통해서 나는 끔찍한 사실을 알게 됐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들은 천2백만명. 그 중 짐짝처럼 실린 노예선에서 질병이나 사고로 죽은 사람들이 2백만명. 미 대륙에 도착한 흑인들은 대략 천만명. 그 중 35만명이 목화농장을 하고 있던 당시 미국의 13개 주에 팔렸고, 나머지는 사탕수수 농장이 있는 캐리비안해 근처의 나라들과 브라질에 팔렸다.

미국에 흑인이 살고 있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노예로 힘들게 살았었다는 건 알았지만 한번도 그 내막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내가 그동안 읽었던 책들은 기껏해야 1960년대, 비교적 최근의 시대를 다룬 것들이었다. 노예 해방은 되었지만 백인들이 법을 비웃듯 공공연히 흑인을 무시하고 차별하던. 그들의 시초, 그들이 막 노예로 잡혀오던 1800년대의 이야기는 책으로 접해보지 못했었다. 그들의 조상이 짐승처럼 사냥당해서 낯선 곳에 팔려왔고, 학대와 중노동에 시달리다가, 자신들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이들까지 노예로 이리저리 팔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는 그 끔찍한 역사.

아, 잔인한 인간이여.



슬프고 아파도, 부끄러워도, 그것이 있는 그대로 역사다.


이 소설에는 '코라'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가 나온다. 책은 그녀의 힘겨운 탈출 여정을 묘사하며 따라가고 있다. 나는 해피 엔딩을 무척 사랑한다. 어떤 책이나 영화, 드라마가 새드 엔딩이라는 걸 알면 아예 보는 걸 포기할 정도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속으로 간절히 애원했다. 부디 해피 엔딩이길, 부디 코라와 그녀가 아는 모든 이들, 그녀를 도운 모든 이들이 안전하길.

하지만 역사가 스포라 했던가. 이 시기의 노예 탈출을 다루면서 도망 노예들과 그들의 탈출을 도운 모든 이들이 전부 무사하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건 마치 일제시기를 다룬 책에서 독립운동을 한 투사들이 모두 일본 순경을 무사히 따돌리고 폭파와 암살에 성공했으며, 아무도 모진 고문을 당하지 않았고, 그들이 모두 광복의 기쁨을 누렸다는 억지와 비슷했다.

슬프고 아플지라도, 부끄럽더라도, 역사를 제대로 보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2월 한 달을 '미국 흑인 역사의 달'로 제정하고 관련 행사를 이어가는 모습,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와 같은 책이 전미 도서상, 퓰리처 상을 수상하고 아마존 판매 1위를 달성하는 현상들이 참 반갑게 느껴진다. 이는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 아직까지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망발을 일삼는 일부 국내 국회의원과 정치인들의 행태를 떠올리면 참으로 비교가 되는 지점이다.

책을 재미있게 읽은 만큼 다른 분들께도 꼭 추천을 드리고 싶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은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점이다. 처음에 한글 책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한글을 읽어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가끔 나와서 영어 원서를 다시 빌려 그부분은 영어로 읽기도 했다. 글의 흐름에 큰 영향은 없으나 사소한 오역도 보인다. 워낙에 원서를 쓴 저자의 스타일이 자세한 설명 없이 끊어 쓰는 타입이긴 하지만, 그걸 그대로 직역만 하면 한글로 읽을 때 완전히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조금 있었다.

사실 이럴 때마다 갈등이 되긴 한다. 있는 그대로 직역을 해야 하는가, 아니면 독자를 위해 원서에는 없는 설명을 가미해야 하는가. 음, 어렵다.



나를 깨우는 말들



1.

그 청년과 적수가 풀밭에서 엉켜들었다. 마땅히 화내야 할 대상에게 그럴 수 없어서 서로에게 화풀이를 해대듯. (p. 39)

진짜로 화를 내고 싶은 대상은 백인들인데, 농장주들인데, 노예 사냥꾼들인데. 그들에겐 화를 낼 수 없다. 그래서 쌓인 울분을 그저 동료와의 다툼에 쏟아붓는 노예들.
혹시 우리도 그러하진 않은지. 마땅히 화내야 할 대상들이 저기에 있는데, 그들의 위세와 권력에 주눅들어 그저 애꿎은 서로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진 않은지.

2.

다른 순찰대원들은 행실이 나쁜 남자들과 소년들이었다. 이런 일이니만큼 그런 부류들이 모였다. 다른 나라에서 그들은 범죄자일 테지만, 여기는 미국이었다. (p. 90)

한국도 그랬던 때가 있었다. 범죄자이고 매국노인데, 오히려 감투를 쓰고 으쓱거리며 거리를 누비던 때가, 있(었)다.

3.

검둥이들은 자유가 그들 몫이었다면 사슬에 묶여 있지 않았으리라. 인디언이 자기 땅을 지킬 수 있었다면 그 땅은 여전히 그의 것이었으리라. 백인이 이 신세계를 차지할 운명이 아니었다면 백인은 지금 이것을 소유하지 못했으리라.
여기에야말로 진정한 주신(Great Spirit 主神)이, 모든 인간의 노력을 연결시켜주는 신성한 끈이 있었다 – 지킬 수 있다면 그것이 네 것이다. 네 재산이든, 노예든, 땅이든. 미국의 명령이었다. (p. 95)

4.

그에게는 그의 잃어버린 아프리카 언어가 섞인 피진어와 노예들의 언어가 더 맞았다. 옛날에 대농장에서는 다들 자기 부족말을 썼다고 엄마는 말했었다. 그들은 아프리카 방방곡곡에서 납치되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다양한 언어가 쓰였다. 바다 건너에서 온 말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박탈됐다. 간결함을 위해, 그들의 정체성을 지우기 위해, 반란을 억누르기 위해. 자신이 전에 누구였는지를 아직 기억하는 이들이 몰래 감춰둔 언어를 빼고는 모든 언어가 사라졌다. “그들은 그것을 귀중한 금처럼 숨겼지.” 메이블은 말했다. (p 112)

그들이 빼앗긴 게 '자유'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들의 언어, 문화, 정체성도 빼앗겼다는 단순한 진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5.

진실은 당신이 보지 않을 때 누군가에 의해 뒤바뀌는 상점 쇼윈도의 진열과 같았다. 그럴싸하고 결코 손에 닿지 않는.
자유인 신분이 된 흑인들이 제 주인들을 피해 달아났듯이, 백인들 역시 그들 주인의 폭정을 피해 새로운 시작을 하려고 이 땅에 왔다. 그러나 그들이 가진 이상은 다른 이들의 이상을 부정했다. 코라는 마이클이 랜들 대농장 뒤편에서 독립선언문을 암송하는 것을 여러 번 들었다. 성난 유령처럼 마을을 떠돌던 그의 목소리. 코라는 그 말들을 거의 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정말로 모든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니었다면 그것을 쓴 백인들 역시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었다. 흙처럼 손에 쥘 수 있는 것이든 자유처럼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그들이 다른 사람의 것을 강탈했다면, 아니었다. 코라가 경작하고 일했던 땅은 인디언들의 땅이었다. 코라는 백인들이 여자와 아이들을 죽여서 그 종족의 미래를 씨앗부터 말살해버리는 대학살의 효율성을 자랑스레 얘기한다는 것을 알았다. (p. 136)

6.

훔친 땅에서 일하는 훔친 몸들. 그것은 피로 가는 보일러, 멈추지 않는 엔진이었다. 스티븐스가 설명한 수술로 백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래를 훔치기 시작했다고 코라는 생각했다. 당신의 배를 갈라서 피를 뚝뚝 흘리는 미래를 들어내는 것. 누군가의 아기를 뺏어 간다는 건 바로 그런 것 – 미래를 훔쳐 가는 것이었다. 그들이 이 땅에 있는 동안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괴롭히고, 훗날 그들의 후손이 더 나은 삶을 살리라는 희망마저 앗아 가버리는 것이었다. (p. 136)

의사들은 흑인들에게 불임 수술을 종용했다. 무분별하게 흑인들을 잡아와서 노예로 부려먹었었는데, 이제는 노예들의 수가 너무나 많아졌다. 어떤 주에서는 백인들의 수보다도 노예들의 수가 더 많았다. 그들의 수적 우세에 겁에 질린 백인들은 자유인 신분을 가진 흑인들에게 불임 수술을 받으라고 집요하게 강권하기 시작했다.

7.

“그리고 미국 역시, 그 무엇보다도 대단한 착각입니다. 백인종은 믿습니다 – 진심을 다해 믿지요 – 이 땅을 취하는 게 그들의 권리라고 말입니다. 인디언들을 죽이고. 전쟁을 일으키고. 형제들을 노예로 삼고. 이 세상에 일말의 정의라도 있다면 이 나라는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살인과 절도, 잔혹함을 토대로 만들어진 나라니까요. 그러나 여기 존재합니다.” (p. 320)



제목: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저자: 콜슨 화이트헤드 (Colson Whitehead)
원서 제목: The Underground Railroad
출판사: 은행나무
번역: 황근하 옮김
특이사항: 퓰리처 상 수상작. 내셔널 북 어워드 수상작.





[독후감] 지난 독후감들 최근 5개 링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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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사극으로 읽는 한국사 by 이성주 - 골라먹는 디저트 한국사

41. 워터 포 엘리펀트 by 새러 그루언 - 추억은 힘이 없다. 그러나 역사는 힘이 세다.

42. 섬에 있는 서점 by 개브리얼 제빈 - 책, 서점, 그리고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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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글로리님이 추천해주신 '너무 재미있어서 잠못드는 세계사'에서 간단히 읽고 지나친 내용인데 끌려간 흑인들인 1천만이 넘었다니 충격이네요...ㅠㅠ
불이님 추천 책은 항상 리스트에 등록해 놓아야겠습니다~!

막연하게 알고 있던 사실을 알게 되어서 좋았어요. 내용은 슬펐지만요. ㅠ.ㅠ

아프리카에서 이주한 방법은 정말 끔찍하더라구요 인간은 정말 잔인한가봅니다 , 저도 새드엔딩은 잘 안보는데 역사물을 볼때는 감수하고 봐야하겠더라구요.

저도 인터넷에서 흑인을 실어나르던 노예선 사진/그림을 본 적이 있어요.
설마, 누가 지어낸 거겠지 싶을 정도로 끔찍하더라고요. ㅠ.ㅠ

리뷰만 봤는데도 마음이 무거워지네요. 책을 읽을 자신이 없어져요.

1800년대 불과 200년 전에 아무렇지 않게 자행되던 일. 인간의 목숨이 소중하게 여겨진 게 그리 오래되지 않았죠. 여전히 특정 나라 특정 지역에서는 사람의 목숨이 날파리같이 여겨지고 있지만요.. 역설적으로 세상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불과 얼마전 이야기인데.. 도처에서 다시 고개를 드는 유럽의 신나찌즘이나 미국의 백인우월주의 를 보노라면 답답해집니다. 그래도 세상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고 믿어야지요.

아직도 나이드신 분들은 흑인에 대한 인식이 좋지 못하다고 하더라고요. 어디선가 노예 운반선을 본 적이 있는데 정말 개,돼지 같은 취급을 당했더라고요... 참으로 끔찍한 역사의 한부분입니다. T^T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아도 속으로는 흑인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가진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저도 그 노예운반선 본 적 있어요. 끔찍하죠..

탈출시킨 인원이 10만명?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을지...솔직히 상상이 안가네요!
흑인만큼 오랜세월 사람다운 삶은 살지못한 사람도 드물겠죠!

그러게요. 단지 피부색이 다를 뿐인데. 그냥 짐승 취급을 해버렸으니..
잔인하고 부끄러운 역사에요.

아직까지도 인종차별이 은근히 있죠.... 유럽엔 대놓고 있는 나라들도 몇 있구요. 한국도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까진 좀 있는편이기도 하고....

한국도 은근히 많을 거예요. 학원 영어 강사나 학교 외국인 선생님에도 백인만 선호한다는 얘길 들었어요. 흑인 선생님은 학부모들이 싫어한다나.. -_-;;

우리도 일본에게 온갖 몹쓸짓 많이 당했지만
흑인 노예들도 그에 못지 않게 고통속에 살았죠...

우리가 고통을 당해봐서인지 그들의 고통에 더 공감할 수 있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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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독후감이 저도 한권을 다 본 느낌이에요 ㅎㅎㅎ
알찹니다 ㅋㅋ 특히나 당한자의 역사는 비슷한것 같네요 ㅠ

그래도 독후감이 책만 하겠습니까? ^^;;
알짜배기는 다 남겨놨지요. 궁금하시면 책을 보시는 걸로..

인간이 가장 잔인해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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