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속의 조용한 신전, 환기미술관

in #kr-art6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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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속의 조용한 신전

환  기  미  술  관







약속이 있어 부암동에 간 김에 환기미술관을 들렀다. 별 기대 안했는데 대단히 인상깊게 관람했다. 뉴욕 시절의 김환기 그림은 마크 로스코에 견주어도 절대 뒤지지 않을 정도다. 로스코가 빨려들어갈듯한 붉은색과 검은색의 장송곡으로 사람들을 홀리게 만든다면, 김환기는 은은하면서 요동치는 파란색을 통해 무한한 우주를 체험하게 해 준다. 그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미술사에서 어떤 지위를 차지했을지 불현듯 궁금하다.


'추상화'에 대해서 생각해본다. 추상화를 그린다는 것, '순수한 조형'을 추구한다는 것, 아무런 외부세계를 지칭하지 않으면서 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되는 그림에 대해 생각해본다. 두 가지 감정이 동시에 든다. 일단은 허망함이 떠오른다. 그림의 '내용없음'은 얼마나 허탈한 것인가? 순수한 형태와 색채를 지향하는 태도는 얼마나 뜬구름잡는 것인가? '무제'라는 캡션이 얼마나 무책임해보이는가? 그러니까 저 그림 속에 있는 동그라미와 네모와 맘대로 그은 선들이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뭐 어쩌란 말인가? 하물며 일생을 바쳐 심각하게 그림을 그리는 저 작가의 작품을 보고 있자하니 이 얼마나 허망하며 허탈한가? 저게 뭐라고 도대체? 이렇게 진지하게?


한편으론 추상화만이 진정 불멸과 영원을 꿈꾸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든다. 환기미술관 3층에 전시되어 있는 대형 그림들 앞에 서 있노라면 우주의 탄생부터 현재까지의 모든 과정이 압축되어 있는것만 같다. 인간의 사소한 감정들은 모두 사치라고 느껴진다. 거대하게 흐르는 우주의 시간에 비한다면 지금 우리가 당면해 있는 사회적 문제들은 시시하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계속 봐도 또 보고 싶다. 영원히 질리지 않을 것만 같다. 무인도에 갇혀 죽을 때까지 단 하나의 그림만 소유할 수 있다면 나는 김환기나 로스코의 그림을 택할 것이다.


그런데 숭고를 지향하는 추상화를 보는 내 느낌은 그림 자체에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숭고-추상화가 가지는 강력한 장점 중 절반은 그림이 전시되는 갤러리, 즉 화이트 큐브에서 기인한다. 반대로 말하자면 화이트 큐브라는 제의적이고 중성적인 공간이 없다면 추상화도 존재할 수 없다. 높은 천장과 사방이 하얀 벽면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은 플랫하고 거대한 추상화(color field painting)인 것이다. 숭고라는 감정도 이러한 조건 속에서만 가능하다. 김환기 전용 미술관은 이러한 점을 잘 꿰뚫고 있다. 추상화를 전시하기에 가장 적합한 건축적 형태를 띄고 있다. 관객은 마치 성당이나 신전에 있는 듯한 신성한 느낌을 체험한다. 산 속의 조용한 신전. 환기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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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기미술관 (출처: 김달진 미술연구소, 환기미술관)









타이틀 디자인 @kyu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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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산속의 신전 은 맞는것 같아요
조용하고 멋있어요.
감상평과 소개 글 참 좋았습니다^^

나중에 부암동 들르실 일 계시면 살짝쿵 방문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

로스코의 작품을 좋아하는데...
김환기 화백의 그림은 제대로 본적이 없어요
부암동에 갈 기회가...언제 갈 수 있을지 기약이 없지만
꼭 한 번 들러보고 싶은 곳입니다.

저도 유명세에 비해 진지하게 감상한 적은 없었는데, 역시 작가의 특색을 가장 잘 살린 미술관에서 그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은 색다른 것 같더라구요. 부암동은 환기미술관 말고도 핫플레이스가 많으니 겸사겸사 방문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좋은 감상평 잘 읽고 갑니다. 미술관도 아주 좋은것 같습니다. 특히 산속에 있다니...좋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미술관입니다. 보통 작품을 감상하러 가는데, 여기는 그냥 미술관을 감상하러 가는 곳이기도 하니까요 ^^

제가 너무 좋아하는 환기미술관ㅠㅠ정말 조용히 숨겨진 신전같다는 느낌도 드네요.
전 1층에서 3층으로 올라가면서 작품을 보면서 김환기화백의 작품이 갈수록 단순해지고 추상적으로 변해간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 단순한 추상화를 평생에 걸쳐 완성해가는 느낌..

완전 좋죠 이렇게 알맞은 공간에 알맞은 크기에 아담하면서도 웅장하고 고급진.. 저도 이런 미술관 누가 하나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ㅠㅠ 나중에 언젠가 꼭....!!

그림에 무식쟁이인 제가 봐도 그림이 뭔가 빨아들이는게 있는것 같아요. 그림에 어우러진 글도 감동입니다ㅜ 한국가면 어디어디 갈지 정하고 있는데 일단 요기도 찜해봅니다

부암동에 핫플레이스가 많으니 겸사겸사 구경 추천합니다 :)

김향안 작가님의 글을 참 좋아하는데, 환기 미술관도 꼭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입니다. 작은 컴퓨터 화면으로만 보아도 남다른데, 직접 저 그림을 보게 된다면 어떤 감각을 느끼게 될지 상상도 가지 않네요. 오쟁님의 글까지 아름다움을 더하는군요. :-) 무척 소중하게 읽고 갑니다...!

아. 검색해보니 배우자 김향안 작가네요. 몰랐습니다. 어떤 글을 쓰셨던 분인지 궁금하네요~~! 기회되면 읽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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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

가보고 싶네요
감상평이 감동적입니다.
푸른점으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치열함이 자아내는 신성한 기운이 상상됩니다.

그렇죠. 저 반복과 확장하는 집요함에서 삶에 대한 확신이 느껴져요. 뭐든지 이런 노력으로 기나긴 기간동안 뭔가를 만들어온 사람의 흔적을 보면 존경스러워집니다.

저 여기 꼭 가볼래요~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넵 가시면 감상평 포스팅도 기대하겠습니다 :)

오쟁님이나 오나무님을 통해서 라나님과 씽키님을 통해서, 그리고 그림을 무척 그리고 싶어하시는 제시카님을 통해서 그림이 가지는 의미를 조금씩 배우고 있습니다. 언젠가 인상파 화가의 그림을 본 사람이 '정말 빛이 있더라'라고 말한 걸 보고 직접 관람하는 것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구요... 적어도 서울에 있으니 한번 가봐야겠네요..ㅎㅎ

그림에 조금이나마 관심을 갖게 된 계기 중에 제가 있다니 넘 좋네요.. 인상파 그림은 정말 빛이 있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자연에서는 빛이 색을 만들지만 그림에서는 색이 빛을 만드는데.. 인상파의 그림은 정말 빛을 만들줄 아는 색을 구사하거든요. 김환기 그림은 구도자와 수행자같은 느낌이 나서 인상파의 그림과는 또 완전 다른 느낌이지만 한번 체험해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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