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배타적인거지.

세상에 함부로 자신을 내보이면 안 되지만, 운 좋게도 가장 힘든 시기 내 모든 걸 그대로 내보여도 그것을 용기있고 따뜻하게 바라봐 준 누군가가 있었다. 모두에겐 안 되지만, 그들에게 되었다. 나의 지상 과제는 그들을 찾아내는 거였다. 사랑하고 마음 다 주어도 괜찮을 누군가, 누군가는 조건도 대가도 없는 나의 사랑이 지겹거나 부담스럽겠지만 누군가는 그 마음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받아줄 수 있었다. 그럴 때면 사랑이 피어났다.

그러니 조건은 그런 사람을 알아보는 눈과 감을 키우는 거야. 다른 이들에게는 적당히 아니 조심스레 아니 내가 나란 걸 들키지 말아야 한다. 어차피 사랑은 그들과 하는 게 아니니까.


제주도였다. 여행에 가면 마음이 열린다. 제주도 여행은 쿠바를 다녀온 이후로 처음으로 칩거하다 떠난 여행이었다. 그것도 난생 처음으로 내가 제일 사랑하는 나의 베스트 프랜드 M과 떠난 여행, M은 내게 특별했다. 나는 M을 나의 엄마라고 불렀다. 진짜 친 엄마는 우리 엄마지만, M은 나만의 엄마였다. 누구에게도 뺏기지 않는 나의 엄마, 나와 M은 모든 일상을 속속들이 공유하거나 서로의 시간을 점거하지는 않았다. M의 편지에도 수십 번 썼지만, 우린 손 붙들고 같이 화장실에 가는 여자친구 사이이나 좋아하는 남자를 고백하며 함께 마음 설레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M과 나는 깊고 배타적인 애정을 지니고 서로에게만은 본 모습을 허락한 사이로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고 서로를 배려했다. 나는 M에게 단 한 번도 이성적이거나 성적인 호감을 느껴본 적은 없었지만, 누구보다 M은 남들이 말하는 흠모하는 연인에 가까웠다.

난 누구도 M과 나 사이에 끼여주거나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M에게 주는 마음을 타인에게 비슷하게라도 주기 싫었다. M은 내 마음을 모두 가질 자격이 있었다. 내가 어두워 맨날 울고 힘들어 하던 시기 날 이상한 취급 하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바라봐주고 나의 아름다운 빛을 보아준 건 M이 유일했다. M은 날 동정하지도 불쌍히 보지도 이상하게 보지도 않았다. 그런 M은 내 마음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다른 어떤 관계가 다 끝이 나도 M과 1년 넘게 연락을 못 해도 M과의 공고한 마음의 유대감과 애정에게는 조금의 금이 가지 않았다. 실제로 우리는 18년이 넘는 기간동안 내가 히스테리가 끝에 다달은 적에 딱 한번, 반나절의 말다툼을 한 게 전부이다. 나는 어떤 남자랑 헤어져도 아무렇지 않았지만, M과의 다툼은 너무 힘겹고 세상이 무너지는 기분이라 하루죙일 괴로워하다가 다음날 눈물의 사과를 하며 화해를 하고 사이는 더더욱 공고해졌다.

그런 M과 처음으로 제주도 여행을 왔으니 나의 신남과 행복이란 얼마나 강력했는지, M과 게스트 하우스에 막 도착해 마음이 온통 다 열린 나는 평소 여행에서 그런 것처럼 처음 만난 사람과 애정이 넘치고 친근한 대화를 농담조로 막 던졌다. M은 그날 충격에 휩싸였는데 평소 자신에게 보여주는 나의 애정이 타인에게 그대로 묻어나오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당연히 나의 마음 속 위계질서에는 M보다 깊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그 모습을 보고 서운해하는 M이 나는 신기했다.

그때 내가 조금 남들과 다른 방식을 가졌다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학창시절 자발적 아웃사이더로 고립을 자초했기에 내게 남은 친구는 몇 없다. 사실 고등학교 때도 중학교 동창이 내게 별로 없었고, 중학교 때도 초등학교 동창이 내겐 없었다. 그게 날 언제나 외톨이로 느끼게 했다. 나는 주기적으로 나가는 모임 같은 게 없었다.

대학 OT에서 한 선배가 한 말이 기억에 남는다.

"20살 이전까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네가 누군지는 여기서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우린 지금 여기서 처음 시작할 뿐이야."

그 말에 희망을 품어 보았지만, 왠일, 억지로 무리해서 술도 못하는 데 용기를 내서 갔던 OT에서 내가 확인한 건 심리학에 관심있는 사람들조차 날 받아줄 수 없단 것이었다. 뭐 나를 괴롭히거나 무시했냐고? 그렇지 않았다. 그러나 눈치가 빠르고 예민한 나는 나를 다소 불편해하는 시각이나 은근 슬쩍 나를 피하는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한 번이라도 어색함의 기류나 불편함이 감지되면 나는 내가 먼저 손절하며 끼어달란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심리학과에서조차 아웃사이더였다. 선배들에게 술이나 밥을 사달라고 어울리지 않는 부탁을 한 적도 있고, 교복 입고오기 행사를 할 때 친하지도 않은 주제에 끼려고 노력했던 적도 있다. 뭐 결과는... 대체 내가 왜 그랬지 싶을 뿐, 노력도 하지 말 걸.

어쨌든 결혼을 한 건 2년 전인데 L은 아버지가 어릴 적 돌아가셔서 아버지 손님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친구 선후배 연구실 군대 친구들이 잔뜩잔뜩 와서 사진을 찍기 힘들 정도였다. 반면 나는 아주 소심하고 남의 평판에 신경쓰는 사람이라면 하객 알바를 고려할 정도로 결혼식장을 찾아올 친구가 많지 않았다. 물론, 엄마와 아버지 손님, 그리고 아주 많은 우리의 친척이 그 빈자리를 채우긴 했다.사실 결혼식 때 나를 찾아온 사람들의 수는 내가 평생 느끼던 고립감과 아웃사이더 역사에 비해서는 지나치게 많은 편이라 오히려 감사했다.

거기엔 예전 직장 동료라든가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 몇 명이 있지만, 대부분 나와 친한 다른 사람들과 만난 면면을 살펴보자면, 딱히 굳이 결혼식에 초대하기 애매한 경우가 많다. 취업 전 국비 교육 스페인어 모임에서 만났던가, 인터넷으로 알게 된 사람이라든가 인터넷에서 글을 쓰다 만난 사람이라든가, 하여튼 일반적으로는 그렇게 만난 사람과는 마음을 나누지 않는다.

어렸을 때부터 혈연이니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다고 어떤 관계의 보장이 되는 게 아니란 걸 깨달은 나는, 가장 중요한 건 그가 어떤 사람이고 내가 어떤 사람이고 우리가 어떤 관계를 맺는지 개별적인 이야기와 면면에 달렸다고 믿었다. 그래서 익히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인터넷에 만난 사람 때문에 속상해서 밥을 하루종일 굶는다든가 진심으로 그와 미래에 같이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만나든 채팅하다 만나든 어떤 일시적인 모임 행사에서 만나든, 내겐 다를 게 없다. 지인의 지인이라고 한들 그게 그 사람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어차피 그 사람이 누군지는 나와 잘 맞을지는 개별적으로 하나하나 시간을 들여 다시 알아가야 한다. 나와 알아갈 의지와 관심이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어제는 어쩌다보니 나의 지인들이 한 꺼번에 마구 몰려들어 정신이 없고 신경도 못 쓸 겨를이였는데 이 중에서 일반적으로 다들 친하게 지낼 법한 관계는 별로 없다. 독립출판물 수업 듣다 알게 된 사람, 스팀잇에서 글 쓰며 교류하는 사람, 마케팅 수업에서 만났던 사람, Mi Cubano 감명있게 읽었다며 혹시 만나줄 수 있냐고 물었던 사람, 클럽하우스에서 친해진 사람.

나는 그들을 만나고 대할 때 어떤 편견도 어떤 선도 정해놓지 않았다. 이 사람은 여기서 만났으니 여기까지 공유하고, 여기서 만났으니 마음을 이만큼만 주고, 오히려 나의 마음 속 관계의 위계란 나에 대한 관심과 마음의 문제이다. 나랑 친해질 마음이 있는지 나에게 이 사람도 다가오려 하는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지 나와 있는게 즐거워보이는지가 지인의 지인인줄 같은 학교 출신인지 같은 핏줄인지보다 억만 배 중요하다. 뭐 나의 동반자 L군을 랜덤채팅으로 만났으니 증거는 충분하다.

엊그제는 그런 나와 깊은 대화를 나눈 H님이 물었다.

그런데 Stella님, 남편이 서운해하시지 않아요?

에이, 그 정도로 감당못할 남자면 결혼하지 말았어야죠.

이렇게 말해두긴 했지만, 정작 어제 사람들 만나고 내가 이들을 사랑한다는 걸 깨닫고 사랑이 마구 샘솟고 내 안의 사랑이 샘솟아 나오는 지금 여기가 너무 행복하다는 걸 깨닫고 이 마음을 다 표현하고 집에 가다가 문득 의문이 생기긴 했다.

L은 이런 내 모습을 진짜 아나? M처럼 L도 충격 받을까? (머리로 아는 것과 보는 건 다른거니까)

보통 사랑은 배타적인데, 서로에게만 마음을 다하고 그 누구도 끼어들게 하지 않는 게 사랑인데 정말로 L은 괜찮나. L의 입장에는 알지도 못하고 알 필요도 없는 사람들과 깊은 대화를 몇 시간이고 나누고 보고싶다고 말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내가 아무리 그들에겐 이성적인 호감이나 사심 같은 건 없어라고 말해봤자 L은 믿어줄까?

그러나 L은 변함없는 부처님 미소를 지으며 내가 행복해보이니 다 좋다고 말했다. 물론 농담으로 '넌 내꺼야.' 치토스 흉내를 내긴 했지만. L은 별 생각도 없고 성찰도 안 하고 딱히 직관도 발달하지 않은 AI 주제에 나름 복잡하고 고통스럽게 완성된 나의 정신 상태를 너무 잘 이해하는 면이 많아서 억울할 지경이다.

이전까지 나의 사랑은 매우 배타적이였다. 한 번 확정되면 조건 없이 마음을 쏟지만 아무에게나 마음을 주지 않았다. 나의 진가를 알아주지 못하고 마음이 흔들릴 별 볼일 없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1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사랑이 넘쳐나니 (에너지와 체력엔 한계가 있지만) 따지도 재지도 않고 열어두기로 했다. 사랑이 돌아오지 않아도 알레가 말했던 것처럼 사랑은 받거나 기대하는 게 아니라 그저 하는 데 행복이 있는 거니까. 그 자체로 의미있고 완성되고 그게 날 행복하게 하니까.

문득 내 사주를 보며

어이구, 평생 남자를 먹여살려야 할 팔자네.

했던 역술가에게 L의 사주를 불러주니

좋은 놈으로 잘 골랐네. 먹고 살 걱정은 없겠다. 네가 아둥바둥할 필요도 없고.

했던 것처럼, L은 나의 세계가 익숙치 않아도 생소하고 낯설어도 지금처럼 재밌다고 애정을 담아 같이 하자고 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2021년 7월 8일
-Stella

p.s. 어쩌다 왜 이런 글을 쓴 건지 모르겠어.

Sort:  

절 감당할 놈은 없을 줄 알았는데 대단한 L

별님뿐만 아니라 이세상의 어떤 사람도 감당할수 없어요. 다만 사랑이란 이유로 소유하려들지 않는 사람이 멋진거죠. 그런데 묘한게 사랑을 시작할때는 서로간에 소유하려들지 않으면 대체적으로 서운해하죠. 그런데 서로 내꺼라고 확인되면 무관심과 배려라는 두가지를 구분하기 어려울정도로 서로간의 정당화에대한 무기가 되겠죠. L님은 배려와 존중심이 있다고 봐야하겠죠. 아닐수도 기일수도. 사람심리는 복잡다단 음냐음냐.

무관심과 배려, L은 눈빛만 봐도 언제나 제게 사랑과 관심이 넘쳐서 그 키워드가 제가 기억해둘게요 어쨋든 고마운 L이에요 잘해줘야지 ☺️💜

이제야 좋은 곳에 이르셨군요.

내 안의 사랑이 샘솟아 나오는 지금 여기

그리고,

더 예쁜 이름입니다.

stella

라님 저는 지금 꿈과 로망에 도착해있습니다.
☺️ 감사드려요

Coin Marketplace

STEEM 0.18
TRX 0.15
JST 0.029
BTC 63135.01
ETH 2546.56
USDT 1.00
SBD 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