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 기억의 승리

in zzan6 years ago

어제는 뜻하지 않은 일로 진을 뺄 뻔했다.
대단하게 중요한 일도 아니면서 사람을 몰아붙이는 성격 때문에 생긴일이다. 그동안 신던 운동화가 너무 낡아 지난 겨울 아들이 선물로 사 준 운동화를 신으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알았다는 대답만 할 뿐 전혀 신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몇 차례나 되풀이 되면서 새 운동화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고 물어도 좋다고는 하면서도 도무지 바꾸어 신을 생각을 안 하기에 나중에 찾으면 주려고 박스에 담아 정리를 했다. 그런데 어제 갑자기 운동화 달라고 한다. 순간 술꾼들이 자주 하는 필름이 끊어졌다는 말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 뿐이 아니라 예능프로의 정지화면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가 이어졌다.

한 번 꽂히면 멈추지 못하는 성격을 알기 때문에 앞으로 벌어질 상황이 눈앞에 전개되고 있었다. 그 때 가게에 손님이 와서 사또와 어머니께서 온 집안을 다 헤집기 시작이다. 우선 다용도실로 창고로 여기저기 찾아봐도 안 보인다고 한다. 나중엔 지쳤는지 포기하고 신고 있던 운동화를 빠리 빨아서 말려야 한다고 성화를 바치기 시작이다.

바로 그 때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왕자님의 키스에 잠을 깨면서 시게도 움직이고 벽난로도 다시 불이 타고 모든 게 다시 살아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처럼 내 기억이 반짝하고 돌아온다. 태연하게 그리고 내가 없으면 도무지 되는 노릇이 없다는 투로 의기양양하게 운동화 박스를 꺼내들고 사또 앞에 내놓는다.

어머니와 사또가 동시에 어안이 벙벙해서 아무말도 못 하고 무사히 지나갔다. 만약에 그 순간 손님이 오지 않았거나 기억스위치를 켠 것처럼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또 얼마나 허둥대며 비숫한 새 운동화를 사러 쥐도새도 모르게 달려야 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기억은 기록을 이길 수 없다고 하지만 아직은 쓸만한 내 기억이 나를 구했다. 이쯤 되면 사또앞에서 약올리며 커피 한 잔 하는 여유까지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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