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zan 작가상 수필 부문] 불안을 물총으로 보내는 방식

in zzan3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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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zan 작가상 수필 부문
불안을 물총으로 보내는 방식
@hyunyoa


처음으로 범불안 장애라는 진단을 받았을 때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른다. 사람이라면 걱정 없이 살 수 없다는 걸 잘 알면서, 이제까지 나를 괴롭게 한 감정이 불안이라는 판결을 받으니 마음껏 불안을 미워할 수 있었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게 너구나, 너였어! 탓을 돌릴 대상이 생기면 이때구나 하고 달려드는 이처럼 걱정이 조금이라도 들면 '또 네가 오는구나', '이 녀석 언제 다시 돌아가는 거니' 하면서 주렁주렁 매달린 약을 한 움큼 먹었다. 그래도 불안이 잦아들지 않는 어느 날에는 싸우는 과정마저 지쳐 일상이 제멋대로 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일 년이면 끝날 줄 알았던 복용량은 점점 늘어났다. 어느새 나는 사회 적응을 돕는 조울증 약까지 먹은 채 몽롱히 움직였다. 맞는 약을 찾아도 잠깐, 애초에 약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사람이 알맞은 약을 먹는다고 순식간에 나아질 리 없다. 심지어 약으로 협박하는 가족을 보며 컸기에 아무리 안전하고 괜찮다는 약이라도 끊고 싶다는 열망조차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다.

약을 그만 먹고 싶다는 욕망이 약을 먹고 삶을 지속하고 싶다는 욕망을 앞질렀을 때, 나는 의사와 상의 않고 약봉지를 숨겼다. 정신과 약은 중독성이 없어도 뇌에 큰 영향을 미치는 구성물로 이루어져 있어서 뇌를 속이며 천천히 약을 줄여야 한다는 얘기는 잘 안다. 다만 약을 먹어 쓰려진 속을 채우기 위해 배고프지 않은데 밥을 먹는 것도 질렸고, 마취총을 맞은 듯 잠에 드는 과정도 더는 원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약을 먹으면 늘 몽롱했다. 기쁜 일에 기쁘지 않았고 슬픈 일에 그렇게 슬프지 않았다. 감정의 폭을 줄여주는 효과이기 때문에 그런 건 알고 있었지만 점점 나를 잃는 것 같았다. 약 덕분에 아픈 일을 겪고도 정신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온 걸 잘 알아서 쉽게 안녕을 고해도 괜찮은지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몸이 "나 이제 괜찮아, 슬슬 놓아둬도 돼!"라 말하고 있었다. 약을 먹는다고 나를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완벽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이제 조그만 걱정이 들어도 그 걱정의 멱살을 쥐어 잡고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버릇도 없앴으니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약을 끊은 지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 달라진 것은 꿈을 더 많이 꾼다는 것일 뿐. 원래는 꿈꿀 겨를 없이 잠에 취해 다음 날 아침에 비몽사몽 하게 일어났다면, 이제는 어항을 얼굴에 끼고 해초를 가로지르며 바다를 헤엄치는 등의 온갖 꿈을 꾼다. 중간에는 악몽도 많이 꿨지만 이 과정 전체가 즐겁다. 나를 괴롭히는 요소를 모두 반기기로 마음먹어서다. 다시 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곤란할 때는 서랍 안에 고이 숨겨둔 약을 꺼내 다시 복용을 시작하겠지만, 지금까지는 일 년간 연습한 명상으로 위기를 넘겼다. 약을 끊어 가장 좋은 점은 안개 낀 듯 뿌옜던 머리가 서서히 맑아진다는 거다. 꿈을 꾸지 않는 만큼 실제 생활이 늘 꿈을 꾸는 듯 흐릿했다. 어떤 사람과 얘기했는지는 알아도 어떤 얘기를 했는지는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입은 바짝바짝 말랐고 속은 쓰렸다.

그제는 운영하는 에세이 수업에서 수강생 분들이 쓴 글을 한데 묶는 작업이 있었다. 약 기운에 취해 몽롱한 나는 표지와 뒷면을 바꿔버리는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업이 시작하기 삼십 분 전에 그 사실을 알아냈다. 자나팜이든 인데놀이든 나를 지키는 아무 약 없이 '사람들이 나를 미워할 거야!'라는 불안에 빠졌다. 심지어 뒷면에 넣으려다가 결국 표지를 차지한 글은 내 책의 일부분을 발췌한 글이었다. 잘못하면 자의식 과잉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매니저님께 "죄송하지만…… 잠시 혼자 있을 시간을 좀 주시겠어요……"라고 말한 뒤 홀로 머리를 쥐어뜯다가 인스타그램을 켜 스토리에 투표를 올렸다. 모르는 척 태연히 거짓말을 할 것인가, 혹은 미움을 받더라도 솔직하게 얘기할 것인가……. 내심 거짓말을 하라는 표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말하라는 쪽이 더 우세했다. 나는 눈물을 머금고 들어오는 수강생 분들에게 "죄송합니다!!!"라고 연거푸 소리쳤다. 원래는 "죄송합니다 흑흑흑."으로 말하려 했지만 될 대로 돼라! 나는 열심히 했다! 를 읊조리니 'ㅠ'가 '!'로 전환됐다. 다들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모두가 속지부터 표지, 주문 제작에 교정까지 한 내 노력을 받아들여주어 무사히 수업이 끝났다.

놀랍게 '아무 일이 없었다'는 사실은 커다란 느낌을 선사했다. 조금 뒤면 세상이 정말 멸망할 것 같은데, 독자 분들의 나의 허점을 파악하고 모두 뒤를 돌 것 같은데, 일을 대충 한 날에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욕을 한 바가지로 먹고 실업 급여를 전전할 것 같은데 예상보다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에 나는 조울증과 범불안장애를 약과 함께 서랍에 고이 넣어두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만큼 나를 애정 하는 이도 늘 테니까, 좀처럼 글을 읽지 않아 어휘력이 떨어지는 기분에 휩싸여도 이제까지 쌓아둔 독서량은 나를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강풍주의보에 호우주의보가 겹친 제주에서도 이전처럼 천장에 물이 새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으며 안전히 글을 쓰는 단계에 올랐다.

가끔은 아픔에 괴롭고 현실에 초조해, 지나간 세월에 총을 들고 난사하고 싶은 마음은 물총을 들고 귀엽게 삑- 삑- 푸시식- 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행복이라는 거창한 가치를 쥐기 위해 억지로 바꾸려고 한 게 아니라, 내가 세상에 애정을 잔뜩 두고 면밀히 바라본 날 덕분에 무섭고 거대한 기관총이 조그맣고 귀여운 물총으로 자연히 줄어들었다.

이제는 불안이 손에 손을 잡고 탭댄스를 추며 오더라도 나는 물총을 들고 하찮게 삐- 삐- 하며 내쫓을 힘이 생겼다. 약을 끊자마자 창고에 묵혀뒀던 우울이 터지듯 쏟아 내릴 줄 알았는데 그간 내가 시간을 쏟던 책과 영화, 사람들이 나를 지켜주고 있는 기분이 든다. 드디어 긍정에서 우러나오는 기쁜 에세이를 쓸 수 있을 듯한 기분이 든다. 만일 언젠가 에세이를 쓰지 않는 날이 온대도 주변에 사람이 몰리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불안에게 진정 안녕을 고한다. 실은, 불안을 바라보던 내 걱정 어린 마음에 안녕을 고한다. 그러니 불안아 또 와봐, 이제는 내쫓기보다 뽀송뽀송하게 샤워라도 시키고 보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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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ce & Love!

긴장이 극에 달한 순간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서 마음가짐에 변화가 생겼네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알아챌 수 있을만큼, 마음이 불안에서 벗어날 준비가 되어있었던 것이기도 하겠지요.
앞으로 쭉 평온하시기를.

@kmlee님, 정말 오랜만이에요. 불안이 일더라도 예전처럼 가만히 지고 있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마음이 들어요. 상황은 같더라도 마음가짐만 변화했을 뿐인데 달라진 게 참 많은 것 같다고 느낍니다. 평온을 바라주셔서 감사합니다. 자주 찾아뵐게요.

그렇게 불안을 떼어 놓으실 수 있게 되었군요.
너무 많은 업무가 떠올라 잠이 깬 월요일 새벽이네요. ㅜㅜ

많은 업무가 떠올라 잠이 깨시다니 ㅠㅠ 일은 침대와 뚝 분리해서 지내는 것만큼 편안한 건 없는 것 같아요. 모쪼록 남은 이번 주는 안온하시기를 바라겠습니다. 도잠님 늘 응원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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