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술] 세계의 끝에선 무슨 술을 마실까?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3 years ago (edited)

르아브르라는 생경한 이름의 도시를 가게된 건 단지 내가 탄 크루즈 여정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크루즈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출발해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를 거쳐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가는 코스였다. 유럽의 북쪽 가까기에 있지만 우리가 으레 북유럽이라고 여기는 스칸디나비아는 아니기에 '북유럽 크루즈'라고 붙인 이름은 다소 의아했다. 첫기항지 르아브르는 파리에서 1~2시간 정도 떨어진 항구도시이다. 나도 모르게 혀 끝을 말고 공기 소리를 잔뜩 머금게 되는 프랑스적인 이름 '르아브르'를 발음하며 나는 조금도 예상할 수 없는 낯선 도시의 하루를 몽상했다. 조사 없이 무작정 탄 크루즈라 나는 크루즈에 내려 그때 그때 갈 곳을 정했는데, 크루즈 터미널에서 짧은 시간의 구글링 끝에 나는 앙드레 말로 근대 미술관을 가장 먼저 별표했다. 소설가 앙드레 말로가 문화부 장관 재직 시절 지어진 현대 미술관으로 오르세 미술관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인상주의 회화 작품이 많다고 한다. 르아브르는 프랑스 인상파의 대표적 화가인 '클로드 모네'가 인상파의 선구자인 '유젠 부댕'에게 그림을 배운 곳이기도 하며 앙드레 말로 근대 미술관에는 두 화가의 그림이 모두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단체 관람을 나온 학생들과 어린아이들이 미술에는 도통 관심이 없다는 듯 입구부터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2층은 상시 전시를, 1층은 늘 바뀌는 특별 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르아브르 출신의 화가라는 라울 뒤피의 전시였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낯선 화가의 그림은 처음이었지만 낯설지는 않았다. 그의 대부분의 그림은 르아브르 바닷가가 배경이었고 그곳을 드나드는 증기선과 유람선, 낚시꾼과 해수욕하는 사람들이 빚어내는 분주함과 활기가 그 안에 녹아들어 있었다. 바닷가의 다채로운 모습이 담긴 그림 한점 한점을 보니 내가 크루즈 여행에서 오간 바다들의 다른 색, 다른 공기, 다른 움직임이 꿈틀하며 생동했다. 그림을 쭉 지켜보다가 나는 르아브르가 배경인 라울 뒤피의 그림에 공통적인 지역의 이름 새겨져 있는 걸 발견했다.

"생타드레스."

나는 그림 속 마을을 실제로 봐야만 겠다는 충동에 사로잡혔다. 바로 그 동네로 가는 버스를 알아보고 버스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생타드레스는 르아브르 근교의 휴양도시로 모네의 그림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지도상의 생타드레스는 꽤 광범위했고 정확한 목적지가 없는 나는 어디에 내려야 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속초라는 제목의 바다 그림을 보고 속초를 무작정 헤멘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바다를 옆에 끼고 끝날 줄 모르는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던 길 중턱에서 난 그만 충동적으로 내리고 말았다. 그리고 라울 뒤피의 그림 속에 있는 하얗고 오밀조밀하게 모여있는 집과 그 뒤로 탁 트인 바다가 있는 풍경을 찾아다녔다. 아기자기한 마을 그림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평화로워지는 힘이 있었다. 5월의 프랑스 노르망디의 뜨거운 햇살을 온 몸으로 맞으며 인적이 드문 그 마을을 정처없이 걸었다. 걸어도 걸어도 바다도 하얀 집도 보이지 않았다. 점차 지쳐갈 때 쯤 도로의 끝에 ㄱ자로 길이 끝났고 작은 오솔길이 있었다. 그 오솔길 뒤에 탁 트인 시원한 바다가 보였다. 바다는 충분히 아름다웠지만 그림 속과 풍경과는 조금도 닮아있지 않았다. 예상과는 다르지만 생타드레스 바다도 봤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바였다. 드문드문 다니는 버스를 타고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갈까 싶어 지도 어플을 켰는데 내 눈을 사로잡는 이름이 있었다.

"end of the world"

'세계의 끝'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의 바가 한시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산중턱에 난 내리막 계단을 발바닥에 불이 나고, 무릎 관절이 삐걱거리도록 쉴 새없이 내려가야 하지만 '세계의 끝' 이라는 이름의 바를 어찌 지나칠 수 있을까. 나는 신발끈을 꽉 묶고 '세계의 끝'을 향해 맹목적으로 걸어 내려갔다. 불확실한 목적지인 생타드레스를 찾아 헤매던 때보다 10배 정도의 추진력이 붙어 가벼운 발걸음에 콧노래까지 절로 나왔다.

'세계의 끝에서 인생의 마지막 술을 마신다면 나는 무슨 술을 마실까?'

세계의 끝을 찾아가며 나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지금 고를 수 없다.' 였다. 그 날의 내 몸의 온도가, 나의 기분이, 그날의 날씨에 따라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급히 지은 듯 언뜻보면 허름한 천막처럼 보이기 까지하는 '세계의 끝'바 건물 주변은 수십개의 야외 좌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양쪽 면은 통창으로 되어 있고 바 건물의 앞면은 카운터를 겸하는 작은 창과 문이 있다. 바의 뒤에는 초록의 나무가 앞에는 고요한 바다가 있었다. '세계의 끝'이라는 이름 때문인가. 잠잠하고 스산한 바다가 조용히 철썩이고 있었다. 히피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이 각기 다른 자세로 앉아 각기 다른 술을 마시며 한낮의 나른함을 자연스럽게 몸으로 내뿜고 있었다. 프랑스 생타드레스, 세계의 끝 바에서 나는 차가운 화이트 와인을 시켰다. 이곳은 프랑스이고, 나는 이 곳을 찾기 위해 굉장히 먼 길을 와서 덥고 지쳐있어 차갑게 칠링된 화이트 와인이 제격이었다. 마냥 기쁘지만은 않던 노르망디의 햇살에 지치고 더웠던 몸이 이완된다. 적당한 신맛이 기운을 북돋고 와인의 촉감이 부드럽고 기분 좋게 목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 한모금을 위해 나는 돌고 돌아 생타드레스에 온 것이다.

20190521_194829.jpg

생타드레스 해변가를 걸으며 돌아오는 길엔 모네 그림을 비롯해 생타드레스가 배경인 그림과 그 그림을 설명하는 내용이 담긴 표지판들이 있었다. 많이 보던 그림도 있었고 처음 보는 그림도 있었는데 그림과 그림의 배경은 다른듯 비슷하고 비슷한듯 달랐다. 그림과 실제를 계속해서 비교해서 보자니 평범한 해변가인 그곳이 몽글몽글하고 부드러운 붓터치로 바뀌고 사람들이 활발히 걷고 배가 움직이는 살아있는 그림으로 바뀌었으며, 난 유유히 모네의 그림 속을 걸었다. 한 폭의 그림 속을 여행한 듯한 르아브르에서의 하루였다.

Sort:  

좋은 술은 잘 모르겠지만 좋은 환경, 좋은 글은 금방 알겠네요~^^

Coin Marketplace

STEEM 0.19
TRX 0.15
JST 0.029
BTC 63878.47
ETH 2625.83
USDT 1.00
SBD 2.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