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VIE 100] 세상 모든 것을 다 재로 만들어 버리더라도

in Wisdom Race 위즈덤 레이스5 months ago



한국 오는 비행기에서 엘리멘탈을 봤다. 이 후진 스토리의 끝을 따라가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지만, 이따위 스토리에 500만 명 이상의 한국인이 열광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더 힘들었다. <나의해방일지> 신드롬을 지켜보며 느꼈던 것과 비슷한 감정이다.

어쨌든 나에게 픽사의 애니메이션 <엘리멘탈>은 유해 콘텐츠다. PC 관련해서 말이 많던데, 정교하지 못한 PC에 대해서는 유행이라는 평가도 아깝다. 이주민 문제를 다루고자 했다면 이보다는 훨씬 더 날카롭고 세련되었어야 한다. 그것에 실패했기 때문에 이 이야기의 낡고 후지고 촌스러운 부분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이 수준으로 만들어놓고 어렸을 때 겪었던 일을 바탕으로 만들었어요 말하는 것은 창작자로서 너무 나이브한 태도다. 때가 어느 때인데... 그리고 이주민 문제는 전 지구적이고, 너무나도 정치적이고, 모든 문제와 중첩되어 있고, 그래서 천 년 전이든 지금이든 언제나 핫한 이슈라서 대충 할 거면 건들지도 않는 것이 좋다. 우리 이주민들이 이렇게 저렇게 일상적으로 차별을 받아왔다고 그 사례들을 일일이 전시하여 보여주는 것으로서는 접근조차도 안 된다. 그런 이야기는 유튜브에 이미 차고 넘친다. 그래서 뭐, 서로 조금씩 양보하면서 어울려 살아가라고? 물과 불이 만나 수증기가 되듯 사랑의 힘으로? 정반합의 차원으로? 낭만꾸러기들은 정말 못 말린다.

이 콘텐츠가 유해한 이유는 단 하나다. 멍청하고 무책임한 주인공, 그것이 문제다. 이 주인공의 서사는 낡고 후지고 촌스러운 걸 넘어 유해하다. 세상의 모든 스토리텔러는 신이고, 신은 이야기의 주인공을 뜻대로 창조할 권리가 있다. 그러니 끔찍한 멍청이든 사악한 빌런이든 뭘 주인공 삼든 그건 스토리텔러의 자유다. 하지만 이런 멍청한 존재가 픽사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좀 문제다. 대중이 픽사와 디즈니가 창조한 스토리에 기대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나날이 PC의 새 영역을 부지런히 일구며 애쓰고 있는 건 알겠는데 힙한 척은 적당히 하고, 인간의 이야기, 그 자체의 완성도에 먼저 집중했으면 좋겠다. 인간 났고 PC 났지, PC 나고 인간 났냐. 생명력 없는 캐릭터와 그들의 이야기로부터 무슨 논의가 생겨난단 말인가.

주인공 불. 어떤 질문도 던지지 못하고, 어떤 답도 내어주지 못하며, 매력도 없고, 완성도도 떨어진다. 불은 자신이 무엇인지, 어떤 능력을 가졌는지 모르고, 알고자 하는 의지조차도 없다. 그저 자신을 잃을까 봐, 그렇게 사라질까 봐 노심초사하고 두려워한다. 애초에 이렇게 불안정한 존재에게 부정적 감정을 컨트롤하는 고수의 스킬을 기대하는 건 무리겠지만, 자신의 능력, 가능성과 잠재력은 대충 묻어두고 살아왔으면서도 화와 짜증이 밀려올 때만큼은 마음껏 '불'이기만 한 주인공의 발작은 정말이지 가만 봐주기 힘들다. 자기 주변의 모든 것을 얼음으로 만들어 버리는 엘사가 스스로를 가둬버리면서까지 자신을 이해하고 극복하려는 시도를 했던 것을 떠올리면 불의 스토리는 '성장'이라는 훈장을 달기에는 한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얼마나 무책임한지. 가업 물려받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주인공이 원해 왔던 일 아니었나. '부모의 희생에 보답하고 싶다'는 꿈은 수준 낮은 꿈인가? 극이 전개되는 내내 '가업을 잇는 일'이 억압적으로 표현되기는커녕 중반까지 주인공이 간절히 바라는 것처럼 묘사되다가 어느새 얼렁뚱땅 '부모의 뜻을 받들기 위해 진정한 나를 지워야 하는 일'로 여겨져 버리는데 그러한 결론에 닿기까지 주인공이 내적으로 어떤 고민과 갈등을 겪었는지도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니 주인공이 맥락 없이 돌연 본심을 밝힐 때는 뒤통수를 맞았다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다. 그 무책임한 태도에 대한 부끄러움도 없어 보인다. 주인공의 회심에 대한 정당성을 마련하기 위해 내내 다정했던 아버지를 돌연 가부장적이고 억압적인 존재로 그리는데 이쯤 되면 와 참 못됐다 싶은 생각까지 든다. 여기서 사람들이 K-장녀 운운하며 피해의식 표출하는 것도 진짜 고리타분하다. 나를 포함한 내 주변 장녀들이 지나치게 미래적인 건가. 물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불의 변덕과 우유부단함에서는 여러 차례 종료 버튼을 누르고 싶었으나 겨우 참았다.

지칠 줄 모르는 연인의 외조와 약간의 운이 작용하여 마침내 어떤 기회를 얻었지만, 내가 보기에 불은 끝까지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고, 무엇인지 알려고 하는 의지가 없으며,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러니까 불이 스스로 쟁취한 것은 없다.

이 멍청한 주인공과 손을 잡은 물은 적어도 자신이 무엇인지 아는 모양이다. 물은 현상이 아니라 물질이다. 물은 환경과 조건에 따라 상태를 달리할 뿐 사라지지 않는다. 순환한다. 그걸 아는 물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마치 물이 자기희생적인 사랑으로 상대를 구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아니다. 물은 자신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고, 사랑하는 이에게 자기 능력을 선보인 것일 뿐이다.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지만, 숭고한 희생 같은 건 아니다.

조건이 사라지면 함께 사라지는 불이라는 현상은 애초에 의존적이다. 그러나, 불이라는 현상은 뜨겁고 밝다. 흐르지도 끓지도 않는 물은 에너지를 만들어 낼 수 없지만, 불은 그 자체로 에너지다. 불의 에너지는 만물의 변화를 이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재로 만들어 버리더라도 이야기의 바깥에서 불이 그걸 깨달았기를 바란다.



비행기에서 엘리멘탈 보고 내내 소화가 안 되어서 한국 오자마자 베터콜사울 시즌1부터 다시 보고 있다. 개비스콘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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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months ago (edited)

방금 막 엘리멘탈을 보고 이 글을 다시 읽으러 왔어요
전 꽤 엘리멘탈을 잼나게 보았어요- 불과 물이 표현되는 영상이 아름답고 물 가족들의 울음벨과 가끔씩 표현되는 불이나 물의 사랑이 아름다웠거든요

그런데 라라님이 쓰신 글에 구구절절 동의도 되요 특히 불의 캐릭터에 관해서는 말이죠. 아쉬운 점도 많고요 더 잘 만들 수도 있었을텐데, 오랜 시간 이어진 이민족의 갈등과 화합을 너무 순진하고 단순하게 그려내기도 했고요

물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불의 변덕과 우유부단함에서는 여러 차례 종료 버튼을 누르고 싶었으나 겨우 참았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 이게 꽤 참을만 했던 게 제가 불같은 속성이 있어서 그 변덕과 미성숙함에 공감이 되더라고요. 중간에 입을 막으며 그만둬 ㅋㅋㅋ 정신차려 엠버 울부짓긴 했지만서도

아직 불이 가야할 길은 멀지만 일단 물을 만나 기회를 잡았으니 운이 좋죠 살다보면 언젠가 엠버도 알게 될 거에요. 자신이 무엇인지 누구인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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