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100]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책을 고른 이유는 모리 슈워츠가 떠올랐기 때문이고, 책을 덮을 때는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한번 더 읽는 것이 나았겠다고 생각했다. 사원에서 16년을 살다가 루게릭 병으로 시한부의 삶을 살았던 비욘 '나티코' 린데블란드에게 독설에 가까운 말을 한다는 건 무례한 행위겠지만 나는 개인으로서의 비욘과 멘토로서의 나티코를 구분할 것이다.
나티코는 내려놓음에 대해 반복해서 이야기한다. 자신이 내려놓는 걸 어려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수년간의 수행 후에도 사원의 행정이 원할하지 않은 것에 집착을 가지고 번뇌하는 사람이 나티코다. 수행 중에서 사원에서조차 그런 번뇌를 하는 비욘에게 사원에서의 수행은 비록 고된 부분이 있어도 그에게 가장 어려운 것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불가에 귀의한 것을 '속세를 떠났다'고 표현하지만 현세에 살고 있는 한 속세의 속성은 남아있기 때문에, 그 상황 속에서 나티코는 계속해서 비욘의 집착, 통제욕을 내려놓기 힘들어 번뇌했다. 16년이 지나서 세상에 다시 나왔지만 나티코는 16년 전에 가진 걸 그대로 갖고 있었다. 단지, 외부의 갈등을 해소하기 어려울 때 회피의 수단으로 내려놓음을 사용하려 '노력' 할 뿐이다. 통제력에 대한 집착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죽음에 대한 통제력을 필사적으로 행사한다. 조력자살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아주 강하게 주장하는데 마치 강압적으로 '당신은 틀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틀렸다고 하지 마십시오.'라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마지막 순간까지 학생들에 둘러쌓여 강의를 하다가 마지막 숨을 마친 모리와 비교되는 모습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보통 자신의 약점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비욘은 나티코가 되고도 결코 내려놓음에 능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내려놓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더욱 역설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에 나는 내려놓음에 처음부터 익숙했다. 번뇌가 찾아올 때, 나는 자동적으로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렇지만 모든 걸 내려놓는 게 능사가 아니다. 그러고 싶었다면 나도 사원에 들어갔을 테니까. 그러니 나는 정반대의 훈련을 한다. 필사적으로 움켜쥘 필요가 있다며 자연스럽게 내려놓으려는 본성을 거부하고 투쟁한다. 그건 틀렸으니 틀렸으니 움켜쥐지 말고 주먹에 힘을 풀고 내려놓아야 하는가? 최소한 나티코는 나에게 그것을 내려놓으라고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모리는 나에게 기꺼이 움켜쥐라고 했을 것이다.
멘토의 삶이 아니라 비욘 개인의 일대기라고 생각하면 훨씬 정이 가고, 매력적인 책이다. 방황 끝에 불가에 귀의한 비욘이 죽을 때까지도 이겨낼 수 없던 번뇌와의 싸움. 16년의 수행이 무색하게, 속세로 돌아오자마자 통제력을 잃은 상황에 느끼는 무력감에 무너지는 모습. 그 모든 것이 지극히 인간적이다. 그렇지만 그게 한계라면 한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