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낭만일기] 낭만의 기쁨과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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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0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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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20세기 여름을 만들기로 한 이후 처음으로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침대에서 밍기적거리고 쇼파에서 잠을 잤다. 솔직히 말하자면 더 자고 싶었다. 그러나 늦을 수는 없어나 약속하기로 한 시간에 준비를 재빨리 하고 집을 나섰다. 얼른 가라고 떠미는 듯 버스는 금세 와버렸고, 길도 막히지 않았고 환승도 최단 시간.

어제는 오랜만에 인간 김OO이 슬퍼하는 걸 지켜보았다. 나는 변한 건 없고 그다지 슬퍼할 이유는 없다고 조용히 그에게 말해보았으나, 그는 자신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다 말했다. 잠깐 자신을 슬퍼하게 내버려두라고 말했다. 나는 알겠다고 말하고 그렇다고 네게 시간을 많이 내줄수는 없다고도 덧붙였다. 다행히 오늘 하늘은 파랗고 날씨가 좋았다.


다들 어제의 술자리 여파로 피곤해보였고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다. 마법사님은 어제 마술사처럼 나타나 페인트를 후딱 칠해 준 귀인 '빠박 작가'님과의 만남이 보통 일이 아니라 말했다. 그런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어조는 변함이 없는데 이상하게 더 힘이 실리고 또렷하게 전해진다. 인연이 물질화된 페인트 벽면을 NFT화하고, 여름동안 이 벽면의 상징성을 보존하자는 데 모두 동의했다.


우리는 계속 실수를 거듭하고 있다. 어제는 페인트칠을 하기 전, 사전작업으로 붙여둔 마스킹 테이프가 전혀 마스킹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건 친환경 박스테이프지 마스킹 테이프가 아니였던 것이다. 어제의 어리석음을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박스테이프를 가까스로 띠어 내며 깨달았다. 페인트와 프라이머는 벽면에 튀고 바닥에 좀 흘렀고 페인트의 결과물은 어쩌면 굉장히 엉성해보였다. (물론 그거 나름대로 이야기와 느낌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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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와중에 전등에 고정할 나사가 사라졌는데 바닥에서 보물찾기 하듯이 나사를 한 두 개 찾아내고 어린아이처럼 기뻐했다. 또 배고플 무렵, 20세기 소년 광희 작가님이 만들어주신 파스타도 너무 훌륭하고 맛있었다.

한 쪽에서는 계속 마법같은 신기한 우연이 생기는데 (개인적 고뇌를 제외하고도) 내 마음은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나는 달력을 보고 가오픈 기간이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무척 초조했다. 그동안 기간은 짧지만 많은 일을 한 꺼번에 매일 해내고 있고 우리는 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있었는데 남은 날보다 처리해야 하는 일이 훨씬 더 많아보였다.

아직도 뭐 하나 확정되지 않은 내 눈에는 정리되지 않아보이는 지하공간에, 사야할 물품도 신경쓸 것도 잔뜩인데 우리는 계속 무언가를 놓치고, 잡지 못하는 기분이다. 가오픈 날 전까지 완벽하지 않더라도 장사를 할만큼 준비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생각해보면 무모한 일이다. 함께 일해 본 적 없는 사람끼리 모여서 단 기간내에 갑자기 해본 적 없는 이상한 일을 함께 벌인다는 게, 그저 재밌겠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불발이나 실수는 예정이다. 마법사님 말대로 어떤 결과보다도 이 프로젝트는 어쩌면 우리의 팀워크를 시험해보는 자리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나의 스타일도 나의 강점도 단점도 아직 모른다. 그건 일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다. 난 그들을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어떤 사람들인지 아직 잘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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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야식을 먹으며(스트레스 받으면 먹는 편) 슈퍼밴드2 비긴즈가 방영되고 있었다. 본격적인 오디션 시작 전, 심사위원 각자의 심사 기준과 평소 밴드에 관한 생각을 말해보는 자리였다.

밴드는 결국 사람이에요. 엄청 유명한 세계적인 밴드 중에 의외로 연주실력이 최고인 밴드는 많지 않아요. 그보다 중요한 건 에너지죠. -유희열

멤버는 모두 취향도 색깔도 달라요. 그렇지만 중요한 건 방향성이죠. 결국 생각이 같아야지 밴드가 오래갈 수 있는 것 같아요.-CL

저는 밴드는 양보인 것 같아요. 밴드는 절대로 혼자 할 수 없어요. 난관에 봉착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늘 도움을 줬어요. 더 좋은 방향성을 제시하고 생각지 못한 더 좋은 결과가 나왔죠. -이상순

그래, 중요한 건 에너지다! F&B도 공간 인테리어도 핵심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정체성이고, 정체성은 사람에서 나오고 그 사람이 내뿜는 에너지에서 나온다.

나는 라라님의 에너지에 매료당했다. 이번 겨울 우울하고 침울해질때마다 세상 풍파에 밀려 자꾸 작아질때마다 그를 만난 2시간의 대화가 나를 웃게 했고 글을 쓰게 했고 행동하게 했다. 나는 그의 에너지가 좋다. 그만큼의 에너지를 내게 주는 사람은 이제까지 흔치 않았다.

아마 각자에게 '20세기 여름' 프로젝트의 의미도 일도 종류도 달라질 수 있으나 그 방향성 만큼은 우리 모두 같지 않을까. 한국에는 이제 사라져가는 낭만을 믿는 사람들, 문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교류하고 싶고 진심으로 연결되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을 만드는 것. 혼자가 아니라 함께하고 싶다는 것.

나의 개인적인 걱정과 스타일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말자. 그렇다고 그들이 내 의견을 존중하지 않고 묵살할 사람들도 아니겠지만 나는 내려놓고 함께 하는 법을 배워야 해. 손을 놓고 누가 해주길 가만히 기다리지 말고, 불평 불만이 생길 시간에 내가 할 수 있는 것, 잘할 수 있는 건 적극적으로 하자.

낭만은 결코 말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낭만은 동화같은 게 아니라 낭만은 현실에서만 꽃 피울 수 있다. 낭만의 즐거움과 기쁨은 갈등과 시행착오, 땀과 혼돈을 모두 품고서야 올 수 있다. 그러니 즐기자, 이 초조함도 걱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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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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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years ago 

일기 기다렸어요!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일기가 밀려서 오늘 것부터 적었어요.
나루님이 기다려준다니 좀 설레는데요 :D

 3 years ago 

와 드디어! ktx 예매해야겠어요!

와! 보얀님이 오신다니 기대되요- 춘자들과 기다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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