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자로드 라다크] 라다크 아카이브
가끔 시간을 앞질러 생각한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순간을 이미 아카이브에 모아둔, 모든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시선을 빌려온다. 모든 게 지나 여기 지금에 있지 않은 미래의 순간 무엇을 그리워하게 될까? 무엇을 기억 속에서 꺼내 몇 번이고 재생하고, 심장을 데우고 삶의 연료로 태우고 결국 나의 일부로 삼게 될까?
라다크의 시간은 느리고 여유롭게 흘러간다. 일어나서도 한참을 누워있었다. 명상하고 책을 읽고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아침 식사를 했다. 아주 천천히 함께 레 시내를 걸었다. 밥을 먹고 선약이 있는 피터 님을 보내고는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열심히 일하는 젠짐과 라라 님을 앞에 두고 힐끗힐끗 창밖의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리고 아침에 읽다 만 헤르만 헤세의 에세이를 끝까지 읽었다.
어쩌면 누구보다 꽉 막힌 여행자일지도 모르겠다. 오기 전 비행기 안에서는 무겁고 쓸데없이 심각한 나를 비우고 있는 그대로 시간을 만끽하고 싶었는데 막상 여행을 시작하니 결국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걸 변함없이 하게 된다. 아무것도 딱히 원하지 않는 거. 가고 싶은 곳이 있더라도 꼭 가야만 하는 특별한 장소는 마음에 두지 않는 거.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고 되는대로 지내는 것. 책을 읽고 매일 하던 생각을 마저 하는 거. 그러다 문득 앞에 보이는 생경하고 경이로운 풍경에 감동하는 거.
아마도 내가 라다크에서 그리워하게 될 건 숙소 창문으로 보이는 룽타의 휘날림에 곁들어진 설산과 하늘, 오후 9시 30분쯤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문을 열면 따뜻한 물이 담긴 주전자를 건네주는 자팔의 손, 불어 터진 파스타를 싹싹 먹어주는 친구들과의 대화, 처음 맛본 육포와 사랑에 빠져 ‘줄레 창’ 개인기까지 보여주는 심뚝과 그걸 사랑스럽게 쳐다보는 사람들, 양첸이 내어준 달콤한 파파야의 맛.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를 갈망하면서 정작 수집하는 건 지극히 일상과 닮은 순간이다. 사소하고 소박하며 생활의 리듬이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일상의 한 조각. 다만 여행지에서 그 경험을 마주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다양한 경험과 관계의 파고가 요구되는지 알고 있는 게으른 여행자로서는 별거 아니라는 오자마자 그것들을 턱턱 내주는 라다크가 특별하다. 여기엔 시간의 연을 성실히 차곡차곡 쌓은 거대 아카이브를 지니고 있는 춘자팀과 함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간을 앞질러 과거를 보듯이 현재를 곱씹는 그 의식은 제한적이고 특별한 장소에서만 가능하다.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무엇이 오든 그저 좋을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을 때, 마음이 저절로 열릴 때, 결국 현재를 200% 즐기고 싶다는 걸 명확히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그 순간, 운 좋게도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
Upvoted! Thank you for supporting witness @jswit.
멋진곳이네요.
라다크만의 분위기가 있죠 :)
낯선곳에서는 선입견으로 시작하기 쉬울거 같아요
신뢰하기를 두려워 하지 않으면 모든게 기쁨으로열리게 될거라는 (제생각)을 합니다
멋진 곳에서, 몸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appa님 덕분에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