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자를 이해하기 위하여 _ 02 친구들 1

in #choonza3 years ago (edi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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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티베트 민중봉기 기념일, 티베트의 수도 라싸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시위대를 향한 발포가 이루어졌으며, 라싸 시내는 사실상 계엄 상태라고 뉴스는 말했다.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자유를 원하는 티베트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평화롭게 시작된 시위는 중국 정부의 의도적인 방조와 부추김 아래 순식간에 폭력적으로 변했다. 오랜 시간 억눌려 온 티베트 사람들의 분노는 한꺼번에 폭발했다. 화가 난 그들은 무기를 들었고, 그들의 분노는 진압의 빌미가 되었다. 고산의 바람이 매섭던 라싸의 거리 위에 장갑차가 발을 질질 끌며 줄줄이 나타났다. 명분을 얻은 군인과 경찰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체포된 시위대가 공안의 손에 이끌려가는 것이 보였다. 거리의 상점들이 불타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날 새벽에는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라고 엉엉 울면서 일기를 썼다.

소식을 공유하던 나와 친구들은 집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중이었는데, 뉴스가 보도되고 다음 날, 티베트어 수업 정보를 공유하는 티베트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 게시물이 하나 올라왔다. 티베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뭐라도 해보자는 내용이었다. 훌쩍거리며 뉴스만 보고 있는 건 너무 고통스러웠다. 그래. 뭐라도 할 수 있다면. 나와 친구들은 바로 인사동으로 달려갔다. 약속된 장소에는 티베트 사람 몇 명을 포함하여 열댓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짧게 인사를 나누고 인사동 마당 한쪽에 나란히 서서 촛불과 피켓을 들었다. 그날 우리가 약속한 것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매일 촛불을 들자는 것뿐이었다. 커뮤니티에 공지를 올리고, 다음날부터 매일 매일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모였다. 그렇게 모인 사람들의 이름은 ‘티베트의 친구들’이었다.

아직 매서운 꽃샘추위에 오들오들 떠는 낯선 얼굴들이 매일 새롭게 하나둘 나타났다. 자신을 티베트의 친구라고 여긴 사람 중에는 한국에 망명한 티베트인, 티베트나 인도를 여행한 경험이 있는 여행자, 불교 신자, 가톨릭 신자, 인권/평화 운동 등 각종 단체 활동가, 탈북자나 파룬궁 관련 반중 단체, 문화예술인, ‘달라이라마'나 ‘히말라야’와 같은 단어에 반응하는 온갖 사람들이 뒤섞여 있었다. 우리는 저마다 급하게 만든 조악한 피켓을 들고 있었는데, 피켓에 적힌 메시지도 각양각색이었다. 다만, 우리 모두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일은 세상 어디에서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며칠이 지나자 ‘친구들’은 저마다 자신의 ‘친구들’을 데리고 나타났다. 촛불은 매일 늘어났고, 커다란 피켓과 현수막이 등장했다. 롤링 마이크를 통해 모두가 각자의 목소리와 이야기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다 동시에 공통의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우리가 외친 구호는 '프리 티베트', '더 이상 죽이지 말라', '티베트를 티베트인들에게'와 같은 것들이었다. 사실 이 구호는 매우 정치적이었는데 그때는 잘 몰랐다. 우리는 보다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 후원계좌를 열었다. 금세 돈이 모였고, 그러자 이것저것을 좀 더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티베트의 상황을 효과적으로 알리기 위해 콘서트나 문화제를 열기도 했다.

'친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많았다. 그럼에도 '친구들'은 여전히 조직되어 있지 않았다. 더 열정적인 사람, 더 많은 것을 아는 사람, 더 많은 시간을 가진 사람, 더 잘하는 사람 등이 두 팔을 걷고 나서서 필요한 일을 찾아서 했다. 그 과정은 완전히 자율적이어서 더 할 수 있어 기쁜 누군가는 그밖에 더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지 고민했고, 무언가를 더 할 수 없어 미안한 누군가는 가진 힘을 다하여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역할을 갖는다는 것에 부담을 느낀 누군가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그곳에 서서 목소리의 크기를 조절하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티베트의 친구를 자처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티베트'를 '친구들' 모두의 공통분모로 꼽기에는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티베트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다. 인류애, 연대 의식, 측은지심, 정치적 신념, 종교적 신념 등 다양한 생각들이 중첩되어 있었다. 게다가 그 안에는 '진영'이라는 것이 선명하게 존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 역학과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진영 밖에 있는 사람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중에는 티베트에 대한 관심은커녕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 심지어 그저 사람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빨대를 꽂고 자신의 필요와 결핍을 채우는 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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