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묻은 선입감
대학을 다닐 때 한 번 휴학을 했다. 등록금이 없어서는 아니다. 먹고 대학생의 전형이었던 나는 더 이상 집에서 학자금을 지원 받을 수 없었다. 사회에 나와서, 학자금대출 등을 받고 온갖 파트타이머를 전전하며 어렵사리 학업을 마친 사람을 심심찮게 보았다. 굳이 내가 등록금이 없어서는 아니라는 사족을 붙인 이유다. 힘들었다고 하면 찔리니까. 각설하고! 휴학 기간에 아르바이트를 했다. 월급을 먹고 살고 입고 이따금 삶을 향유하는 데까지 쓰다 보니 돈을 모을 수 없었다. 복학할 시간은 바투 다가왔다. 돈을 조금이라도 모아 한 학기 등록금을 댈 요량이었던 나로서는 참으로 난처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생각난 키워드가 있었으니. '숙식! 제공!'
인력사무소직업소개소에 연락해 일을 구했다. 숙식 제공이 되는 대표적 직업은 막노동이다. 내가 일할 장소는 파주에 위치한 LG디스플레이 공업단지였다. 그만큼 커다랗고 드넓은 공단이 조성돼 있을 줄은 몰랐다. 처음엔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 불법 어선에 팔려 가는 청년에 한창 공감하고 있을 즈음 내 직책이 배관공의 조공임을 알게 됐다. 디스플레이 생산 공장은 반도체 공장처럼 부품(?)을 씻어내는 작업을 중시하는 듯했다. 그래서 배관을 까는 작업이 중요한 듯했다. 자신감 없이 '듯하다'라는 용언을 연이어 쓴 까닭은 자세히는 몰라서다. 조공이 뭘 알겠는가.
배관의 자제는 한두 종류가 아닐 테지만 우리가(?) 작업한 배관은 PVC였다. 궁금한 분은 별로 없겠지만 주로 하는 일은 줄자로 얼만큼의 PVC가 필요한지 가늠하고(이 작업이 중요하다, 배관공의 줄자질 작업이 멋있었다) PVC를 자르고, 자른 PVC에 프라이머를 바르고 그 위에 본드를 덧바르고, PVC와 PVC를 결합하고, 이음새에 용접을 하는 것이었다. 그전까진 용접이란 쇠붙이를 고문하는 것으로만 알았다. PVC 용접이 있다는 것은 그때 처음 알았다. 아, 배움의 전당이여! 위에 열거한 작업을 죄다 내가 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막내야 뭐 좀 가지고 와라." "막내야 이것 좀 들자." 고막에 막내라는 단어가 와 닿을 때마다 조건반사하면 그만이었다(침은 흘리지 않았다).
배관공(줄자 작업 및 모든 작업에 개입하며 배관 작업을 총지휘하는 사람), PVC 용접공(경력을 쌓아 배관공이 된다)이 해당 일을 전업으로 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을 뒷받침하는 조공은 기간을 잡고 일을 하러 온 사람들이었다(조공을 하다 PVC 용접공이 되기도 했다). 공사 현장에 온 조공의 사연은 다양했다. 기술자는 아니지만 조공이 준직업인 사람, 하던 일을 그만두고 비어 버린 시간을 막일로 보충하려는 사람, 나처럼 고효율 아르바이트란 집어등을 쫓아온 오징어 등등.
아침잠이 많은 내가 새벽같이 일어났다. 함바집으로 가 취향 따윈 차치하고 음식을 위장에 밀어넣었다. 그래야만 점심 시간 전까지 힘을 낼 수 있었으니까. 일하기 전에 체조를 하고 군인들이 구호를 외치듯 작업자들도 구호를 외쳤다. 어딜 가나 느끼는 거지만 그곳에서도 지휘자의 중대함을 깨달았다. 나는 두 명의 반장을 거쳤다. 처음 만난 반장은 사람은 좋았으나 우유부단하고 일머리도 좀 떨어져 보였다. 그 사람과의 작업을 파하고, 두 번째로 맞이한 반장은 연배도 있었고 무뚝뚝했으나 경험에서 나오는 장인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몸은 더 힘들었어도 일할 맛은 났다.
가로새자면 죽음이 가까운 곳에 있음을 느낀 일이 있었다. 야간 작업을 하는 날이었다. 오후 작업을 마칠 때쯤 야간 작업자를 선별했다. 오후 작업 도중 한 청년을 만났다. 말을 터 보니 나보다 몇 살 아래였다. 그 친구가 내게 한 말을 아직 기억한다. "형, 여자친구 있으세요?" 청년은 야간 작업을 하지 않고 숙소로 갈 거라고 말했다. 숙소 가봤자 뭐 하나, 돈이라도 더 벌 생각으로 나는 야간 작업을 지원했다. 다음날 거짓말 같은 소식을 들었다. 그 청년이 죽었다는 것이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멀쩡한 모습으로 "형, 여자친구 있으세요?"라는 말을 건넸던 그이가 말이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일하는 사람끼리 술 마시고 숙소에 들어가 잠을 자다가···. 지병이 있었던 걸까?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내막이 있었을까. 잊고 살지만, 죽음은 느닷없이 찾아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적마다 그 청년이 호출된다.
그곳에서 일하며 과거 인간을 판단하는 내 시각이 자못 협소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국은 기술자를 대우하는 사회가 아니다. 낮잡지 않으면 다행이다. 막노동 현장에서 목도했던 군상을 배울 점이 있는 사람과 한심한 사람으로 양분할 수 있다(일반 사회와 엇비슷한 비율이다). 똑똑하면 똑똑했지 결코 능력이 떨어져서 공사 현장에 몸담는 것이 아니었다. 휴일에 숙소에 묵어도 됐지만 그건 정말 싫어서 경의선을 타고 서울로 갔다. 숙소로 돌아올 때 책을 들고 갔는데, 일과를 마친 뒤 내가 책을 읽는 모습을 보고 PVC 용접공이었던 분이 한 말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무슨 책 읽냐?"
"토지요, 토지 읽어 보셨어요?"
"토지 안 읽은 사람도 있냐? 다 읽으면 람세스도 읽어 봐라."
나는 람세스를 펴 보지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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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단어들이 살아있네요. 국어사전이 생각났어요~
예전는 경험도 부족하고 몰라서겠자만
세월이 지난 지금을 생각해보면 어쩜 더 깊은 선입견이 선입감이 생겼는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반성하게 되네요. 더 곤곤히 내 생각과 감의 울타리를 치고 있는지도요..
이 와중에 전 토지도 람세스도 아직이라는..도망갑니다~
좋은 아침요^^
ohnamu님, 좋은 아침이네요. 저런 글을 썼지만 저 역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어요. 그래서 그때의 기억을 상기하며 글을 쓴 거 같아요. 박경리 선생이 쓴 토지는 의외로 재밌더라고요. 제 취향의 책이었을 수도 있지만요.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소실 읽은지 오래된것 같아서 읽긴해야겟어요.
읽게된다면 토지나 람세스를 우선순위에 올려놔야겠어요.
알게 해주셔서 제가 고맙죠~
람세스는 말은 많이 들었지만 읽지 않아서 재밌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저야말로 고맙습니다. ^^
토지도, 람세스도 펴 보지도 않았습니다. 흑흑..
글 너무 재미있습니다 ㅎㅎ
thelump님은 제가 읽지 못한 책을 많이 읽으셨을 거예요. 재밌게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ㅎㅎ
저 역시도 토지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입니다 ^^
고로 람세스도 읽지 말아야 하나요? ㅋ
하하. 전개가 그렇게 되나요? 반전이네요. ^^ 댓글 고맙습니다!
!!! 힘찬 하루 보내요!
https://steemit.com/kr/@mmcartoon-kr/5r5d5c
어마어마합니다!! 상금이 2억원!!!!!!
고맙습니다, 짱짱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