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가만히 있었는데요

in #kr6 years ago

"인도에 있는 동안 어디에 계셨죠?"

출국심사대 앞에 선 내게 뜻밖의 질문이 돌아왔다. 6개월 관광비자의 만료일이었다. 더운 여름날을 나기 위한 얇은 반팔 티셔츠 쪼가리 몇 장만을 쑤셔 넣고 인도로 떠나왔던 것이 6월 중순이었는데. 시간 참.

'잘 있다 가는 사람에게 왜 이러세요'하고 속으로 구시렁거렸지만 이내 약간의 미소를 억지로 머금고는 다람살라에 있었노라고 대답했다. 심사관은 가장자리가 낡아 나달거리는 내 여권을 첫 페이지부터 찬찬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그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인도에서 다른 곳은 가지 않았나요?"

비자 만료일에 딱 맞추어 출국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 여권에 다다다 붙어있는 인도 비자 딱지들이 의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뭐가 문제냐고 물었지만 그는 여전히 별 말없이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열한 번째. 손가락 셈을 세어 다시 확인했다. 열한 번째 인도와 헤어지는 시간.

"주로 다람살라에서 지냈고, 마날리랑 델리에 잠깐 갔었어요."
"그렇군요. 뭐 하셨어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냥 가만히 있었는데요."

이번에는 정말이지 신경질이 나서 '그건 당신이 알 바가 아니고!'하고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내뱉은 나의 짜증 섞인 대답에 그는 피식 웃더니

"유 아 쏘 퍼니."

라고 했다. '퍼니'라... '웃기는 양반이네' 뭐 이런 건가? 여권에 꽝꽝 도장을 찍는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출국심사대에서 '유 아 쏘 퍼니'라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그래요. 인도를 여행하는 사람 중엔 정말 별별 사람들이 다 있답니다. 인도에서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열 번도 넘게 인도를 찾는 동안 라자스탄도 안 가봤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고백하다 보면, 내가 그 별별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열한 번째 인도를 찾았던 2016년의 여름, 가을을 통째로 다람살라에서 지냈다. 6개월. 지루한 몬순을 버티고 나니 매일 아침 눈을 뜨고 하늘을 바라보면 '굿데이!'라는 외침이 절로 터져 나오는 청명한 계절이 찾아들었다. 마른빨래를 걷을 때면 그 바삭한 냄새가 좋아 옷가지에 코를 박고 한참이나 킁킁거리기 일쑤였다. 그 계절은 참으로 눈이 부셨다. 아침, 저녁 쌀쌀해진 날씨에 이불속에 웅크리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겨울의 문턱에서야 슬슬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인도 전역을 대혼돈 속에 빠뜨린 모디의 화폐 개혁으로 맥그로드 간즈 그 작은 산동네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현금이 없어서 몇 날 며칠을 굶었다는 사람들은 외국인 여행자, 현지인 할 것 없이 곳곳에서 나타났다. 덕분에 은행과 씨름만 하다가 마지막 한 달을 보내고 왔지만 '인크레더블 인디아'를 이보다 더 잘 보여주는 사례는 없을 것이므로 나쁘기만 한 경험은 아니었다고 이제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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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leod ganj, india, 2016

들고 나는 사람이 많은 곳이었다. 제법 오랜 세월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을지라도 내 고향이 맥그로드 간즈요 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달라이라마가 사는 곳, 티베트 망명정부의 거점, 티베트 난민들의 보금자리. 올해 만난 사람을 내년에도 볼 수 있을지, 아니 봄에 있던 사람이 그해 여름에도 여전히 있을지 확신할 수 없는 곳.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겠지'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그런 동네. 떠돌이 유전인자가 몸속에 흐르고 있는 사람들은 그 공간의 위태로운 정체성 자체에 본능적으로 끌려 모여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많은 티베트 사람들이 꿈을 갖고 이곳으로 흘러들었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새로운 꿈을 찾기도 했지만, 갖고 있던 꿈마저 버리고 마는 이들도 있었다. 말 끝마다 '나는 난민이라', 혹은 '우리 난민들은' 하던 티베트 친구들과의 대화에는 정말이지 진력이 나서 속으로 난민 신분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느냐며 답답한 가슴을 두드릴 때도 많았다. 여권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농담 아닌 농담들. 내가 입을 닫아버리게 만들던 회한의 말들. 넌 자유가 있잖아. 집이 있잖아. 여권이 있잖아. 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잖아. 8년 전 내 마음을 들끓게 만들었던 그 말들 때문에 때로는 숨이 막혀오기도 했다. 그들의 삶은 지리멸렬했다. 나는 그들 삶을 재단할 자격을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끝내 모른 척했다. 제 발로 떠나왔지만 이제는 이곳을 감옥으로 여기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텅 빈 언어에 불과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해하는 척 흉내를 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들 삶의 수많은 결을 하나하나 살피며 쓰다듬을 여력이 내게는 없었고. 하지만 그들의 삶이, 그들이 원하는 곳에서,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아지기를 바라는 마음만큼은 변함없었다. 나는 경계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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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cleod ganj, india, 2016

경계에 머문다는 것은 동네를 거닐다 낯익은 얼굴들을 만나면 여어- 하고 고갯짓으로 인사를 나누며 지나치는 것이었다. 혹은 그 자리에 서서 싱싱한 파를 살 수 있는 채소 가게에 대한 정보를 나눈다는 것이었다. 자주 가는 카페 주인의 딸내미와 놀아주느라 진이 빠진다는 것이었다. 친구가 된 이들의 소소한 소식들을 전해 들으며 동네 사람으로 지내는 일상을 하루하루 쌓아간다는 뜻이었다.
경계에 머문다는 것은, 동시에, 가끔씩 그들 앞에서 여권을 꺼내어 보여주기가 민망해진다는 것이었다. 양고기를 먹지 못하는 내가 칼자루를 손에 쥐고 눈 앞에 놓인 양고기 수육을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한참이나 고민해야 하는 것이었다. 아는 얼굴들 마주치지 않고 '오롯이 혼자' 머무를 공간을 찾기 위해 좁아터진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아야 한다는 것이기도 했다.

생활의 영역으로 다가가다가도 어느 지점이 되면 부딪히게 되는 보이지 않는 경계의 벽 언저리. 그 자리가 내가 선택한 자리였다. 그런 나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시간뿐이었고 외로움은 덤이었다. 시간과 나는 그 외로운 자리에 덩그러니 놓였다. 출국심사대에서 고백했듯 나는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았다. '뭘 하며 지내느냐'는 질문을 실제로 많이 받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그냥 가만히 있는다'라고 대답했다. 시간이 흐르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말도 적절할 것이다.

2007년 라다크에서 만나고 9년 만에 우연히 다람살라에서 다시 만난 제이미는 명상에 심취해있었는데 내가 하루를 보내는 방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내가 시간 낭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느니 명상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진지하게 내게 권했다. 명상을 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이 복잡한(혹은 공허한) 마음을 붙들고 가만히 있는 이들을 내심 '가엾이' 여긴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충고와 권유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다. 가만히 있는 와중에도 내 마음은 번뇌로 가득 차 있었지만 행복으로 가는 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을 정도로. 그 길은 밝고 곧았다.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되었다. 그렇게 있어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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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rbulinka, dharamsala, india, 2016


2016년의 이야기인데 벌써 아득하게 느껴집니다.
갑작스러운 화폐개혁 때문에 진짜 고생고생을 했었는데(평생 할 욕을 한 달동안 다 했을지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그 가을 루피와 씨름하던 이야기를 풀어봐야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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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여행 방법이 다른데 말이죠. ^^ 여러번 가도 한 곳만 갈 수 있고 단 한번을 가서 진짜 빠듯하게 전부 다 돌아볼 수도 있고 말이죠.
그래도 그 분들은 어쩌면 자신들이 느꼈던 좋은 감정과 경험을 공유하고 싶어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잘 읽었습니다. 사진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담백하게 느낌이 전해져 옵니다. ^^

안녕하세요. @flightsimulator 님! 프사에 하얀 비행기 보니까 심쿵하네요. :-)
느낌이 전해져 갔다니 기쁩니다!

프사를 실물 사진으로 안하길 잘했네요. 이렇게 프사에 대한 칭찬도 받고~ ^^
기쁘다고 말씀해주시니 저도 기쁩니다. 종종 들러 재밌게 글 읽겠습니다. ^^

안녕하세요. 짱짱맨 큐레이터 뉴위즈(@Newiz)입니다! ^-^
@roundyround님께서 3일전에 써주신 '세상에서 가장 낯선 존재' 글이 너무 좋은 것 같아, 짱짱맨레포트 큐레이션에서 추천해 보았습니다.
혹시 큐레이터 추천을 원치 않으실 경우,
말씀해주시면 바로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짱짱레포트 : https://steemit.com/kr/@newiz/2256t9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뉴위즈님! :-) 짱짱맨 레포트 큐레이션에 추천이라니 원치 않을 리가 있나요! 뉴위즈님 덕분에 조회수가 1이라도 더 올라간다면 그것으로 큰 만족입니다! 감사해요. :-D

재밌게 읽었습니다. 인도 여행 다녀온 사람들이 다들 깊은 인상을 받는지, 저도 맥그로드 간즈, 다람살라 같은 지명이 익숙하네요.

안녕하세요. @kmlee 님! :-) 네, 맞아요! 맥그로드 간즈는 인도를 찾는 한국인 여행자들이 참 좋아하는 동네예요. 작고 별거 없는, 대체로 조용한 산동네지만, 달라이라마 법회라도 열리는 날엔 그야말로 스펙타클입니다. 저는 발발 떨면서 달라이라마와 악수하고 사진 찍었던 일이 제일 기억에 남네요. :-)

^^ 즐거운 스티밋!!!

덕분입니다! :-) 늘 감사합니다!

너무 재미있게 사시는거 같아요^^ 저는 여행 떠나는것도, 정착하는것도 쉽게 하지 못하는 소심한 성격이라... 언제 한번 마음먹고 인도 여행 한번 가야겠어요 ㅠㅠ

안녕하세요. @duckcun 님. :-) 저는 익숙한 사람들과 익숙한 장소가 좋아요. 식당도 늘 다니는 곳에만 가고, 음식도 먹던 것만 먹어요. 그렇게 익숙함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서 똑같은 크기만큼 낯선 것에 대한 갈증이 있어요. 아마 @duckcun 님이 소심해서 마음 먹기 힘든 게 아닐 거예요. 인도는 멋진 곳입니다! 꼭 한번 마음 먹어 보시길! :-)

따뜻한 말씀 감사합니다!! 제가 항상 꿈꿔오던 나홀로배낭여행을 갈때까지 힘내야겠네요! 편한 밤 되세요~^^

저는 주로 청전스님이나 달라이 라마의 글속에서 티벳 스님분들의 생활상을 보았지만 생각해보니 수도자들의 생활상이었네요. 난민들의 생활상은 좀 차이가 있겠군요. 그런데 명상 수행은 전혀 안하시나 봐요?

수행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가끔 저만의 방법으로 제게 필요한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의 평화를 찾는 심호흡(?) 정도는 해요! 제가 지금 지내는 곳에는 정말 수많은 명상 센터가 있는데요. 저는 어쩐지 거부감이 들더라고요. 제가 오만한 탓도 있을 거예요. :-)

수행도 인연이지요. 님은 수행 꽃밭에 있는 하나의 꽃이랄까요. 수행센터라고 해도 인연이 맞아야지요. 저도 아직 제 수행에 맞는 수행을 찾는 중입니다. 명상이란게 꼭 수행이라고 여길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님께서 쓰시는 글도 일종의 수행이 될수 있으니까요. 이수행 저수행 기웃거리다 보니까 대게 그게 그거같아요. 이효리가 남자를 말할때

그놈이 그놈

이라고 하듯이,

ps. 저는 개인적으로 로종 수행이 맞는것 같습니다. 입보리행론을 읽는 것도 좋은 것 같구요.

@roundyround 님, 오마주 프로젝트로 이 글 소개해보고 싶어요..!!ㅎㅎ
허락해주신다면 말이죠! 글 링크는 아래 링크 참고해주시면 될것같아요 :-)

https://steemit.com/kr-pen/@kyunga/2tuz2c

어멋 경아님이 오마주 프로젝트에서 소개해주신 작가님들 모두 제가 좋아하는 분들이었는데, 제 글을 소개해주신다니 저야 영광이죠! :-) 경아님 손길로 읽는 맛, 보는 맛 한껏 살아나겠네요. 기대됩니다!

라운디라운드님! 글 올렸어요 구경오세요ㅎㅎ

https://steemit.com/kr/@kyunga/5u3up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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